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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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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00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1.05.15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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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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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8쪽

안개빛 희극 (7) 린

DUMMY

트리할트의 선박은 린이 봐왔던 그 어느 것보다 빠르게 물살을 갈랐다.


그 어느 것에도 기죽지 않고 나아가는, 그야말로 ‘아케투르의 방식’ 그대로였다. 린을 메이룬으로 이끄는 트리할트의 선박은 마치 초원을 주파하는 아케투르의 말처럼 용감했다.


린은 강인한 난간에 몸을 기대고 ‘폭풍 해’에 몰아치는 바람을 맞이했다. 아케투르의 현관과도 같은 그 바다는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낯선 선박에 몸을 실었던 린에게 아케투르의 방식은 제법 흥미로웠다. 그 여정은 린의 일생에 있어 처음 겪는 일이었다.


트리할트의 선박, 불어오는 폭풍 해의 바닷내음···. 모든 사소한 것들이 린에게는 처음 겪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린은 더더욱 난간에 몸을 기댔다. 다행히 린에게 뱃멀미라는 저주는 주어지지 않은 모양이어서, 린은 더욱 폭풍 해의 경치를 하나라도 더 눈에 담으려고 애썼다.


구름 한 점 없는 높디높은 가을 하늘은 어느 때보다 푸르렀다. 하늘과 바다를 내리쬐는 태양은, 메이룬에서처럼 여전히 기운차 보였다.


이름과 달리 잔잔한 바다에는 이따금 세찬 파도가 몰아쳤다. 세찬 파도를 기어오르는 이름 모를 물고기들이 린의 눈을 사로잡곤 했다.


린은 그 물고기들의 자취를 눈으로 좇았다. 어쩌면 그녀의 기억에 남은 물고기가 아닐까 싶어, 그녀는 더욱 파도를 향해 눈을 집중했다.


“엇···!” 강인한 난간 너머로 린의 몸이 솟구쳤다. 폭풍 해가 린을 집어삼키려 했···.


누군가가 린의 몸을 잡아챘다. “괜찮아, 아가씨?”


린은 누군가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린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린은 당혹감을 섞으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린에게 손길을 건넨 사내는 트리할트의 도련님이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데나리오트 트리할트가 말했다. 그는 안정감을 되찾으려 애쓰는 린의 옆에 조용히 자리했다.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할게요, 데나리오트 경.” 조금 안정감을 되찾은 린이 공손함을 더해 말했다.


“트리할트와 함께 할 때는 방심하지 않는 게 좋아.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다간 기세에 휩쓸릴지도 모르니까.” 데나리오트가 말했다.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 섞인 데나리오트의 말에 린은 희미한 미소로 답했다. “조언 고마워요.”


린은 폭풍 해에서 눈을 뗐다. 그녀의 시선은 데나리오트 트리할트로 향했다. 트리할트의 도련님은 난간에 조심히 팔을 기댄 채, 린을 집어삼킬 뻔한 바다를 보고 있었다.


“배웅을 너무 멀리 나오신 게 아닌가요?” 린이 물었다.


데나리오트는 그제야 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그러셨거든. 손님 접대는 끝까지 제대로 해야 한다고.” 데나리오트가 말했다.


린은 데나리오트의 눈가에 자리한 그늘에 주목했다. “이름난 가문에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군요.” 린은 지레짐작을 섞으며 말했다.


“뭐,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데나리오트는 잠시 기지개를 켰다. “트리할트의 이야기에 흥미가 있나, 아가씨?” 데나리오트가 물었다.


“뭐, 없다면 거짓말이겠죠.” 린이 재치있게 말했다.


데나리오트는 조그만 미소를 지었다. “알다시피, 우리 가문은 프레이의 위대한 가문 중 하나야. 다이아르와 몰트케에 전혀 꿀릴 게 없는 가문이지. 아홉 대륙 곳곳에는 트리할트의 영향력이 가득하지. 물론 도이니아르에도 말이야.” 데나리오트가 말했다.


데나리오트의 말대로였다. 트리할트 가문은 도이니아르, 즉 산맥 아래에도 충분히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저도 충분히 들어보았어요. 프레이와 세 가문의 이야기를요.” 린은 부족한 지식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래, 나는 그런 가문에서 태어났지.” 데나리오트는 다시 난간에 팔을 걸쳤다. “장남이나 차남 정도로 태어났으면 좋았겠지만 말이야···.” 그의 말끝에는 어느새 조그만 한숨이 섞여 있었다.


어디선가 린은 들어본 적 있었다. 프레이의 위대한 세 가문의 주인들은 하나같이 수많은 자식을 보았다고 했다. 특히 트리할트 가문은 정도가 심해서, 같은 가문끼리도 이름을 모를 정도라는 우스갯소리가 들리곤 했다.


단순한 우스갯소리와 달리 데나리오트의 그늘은 복잡해 보였다. “내 위로 형만 넷이고, 누나는 셀 수조차 없이 많아. 나에게 돌아올 아버지의 유산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지.” 데나리오트가 말했다.


이름난 가문의 고충을 물었던 린의 의도와 달리, 데나리오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린은 전혀 지루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색다른 이야기에 더욱 구미가 당겼다.


“받을 유산이 거의 없다는 게 그렇게 실망스러운 일인가요?” 린이 물었다.


데나리오트가 웃었다. “크게 실망스러운 일은 아니지. 그만큼 내가 성취할 수 있는 것이 가득하다는 소리니까.” 데나리오트는 자신감 가득히 말했다.


“하지만, 지금 이 평화의 시대에 배운 거라곤 전쟁뿐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대로는 그저 트리할트의 숲지기로 평생을 지내겠지.” 데나리오트는 자조가 섞인 미소를 보였다.


린이 말했다. “언젠가 기회가 찾아올 거예요. 너무 낙심하지 말아요.”


“그럼 곧 전쟁이라도 찾아온다는 소린가?” 데나리오트가 물었다.


데나리오트의 빈정거림에, 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잔잔함에 섞인 파도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데나리오트가 크게 한숨을 뱉었다. “미안해, 아가씨. ···딱히 아무런 의도도 없었어. 그저··· 내 신세가 처량해서 말이야. 다른 형제들처럼 기사가 되긴커녕 잔심부름이나 하고 있으니···. 아, 기사단장께는 비밀로 해줘.” 뒤늦게 무례를 알아챈 듯 데나리오트가 말했다.


린이 말했다. “괜찮아요.” 그녀는 이야기를 돌리기 위해, 다시 트리할트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다른 형제분들은 어떻게 지내시나요?”


“대재상인 큰 형님은 수도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둘째 형님은 아케투르 함대의 함장이고, 다른 형들은··· 잘 기억나지 않네.” 데나리오트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참, 넷째 형님은 루테네르에서 기사 노릇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 그러니까 분명··· 예스트라였나? 그곳의 주둔기사였을 거야.”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스트라···. 꽤 가까운 곳이군요.” 린은 언젠가 보았던 아홉 대륙의 지도를 떠올리며 말했다.


“한때는 우리 가문의 영토였던 곳이니까. 지금은 데네르 기사단의 영역이 되었지만.” 데나리오트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데네르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야.”


곧, 데나리오트가 흠칫 몸을 떨며 말했다. “···방금은 말실수야. 잊어줬으면 좋겠어, 아가씨.”


어디가 말실수였는지, 린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데나리오트가 안도의 숨을 뱉으며 자리를 떠났다. 린은 아직 자리에 남아, 계속해서 파도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가을 하늘은 벌써 어두워지려 했지만, 주변의 경치는 여전히 비슷했다. 이내, 하늘 저편에서 달이 떠오를 무렵이 되자, 그제야 경치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잔잔한 파도가 사라지고, 소용돌이가 보였다. 말로만 들었던, 대륙의 경계에 존재하는 위험천만한 소용돌이였다.


거친 소용돌이는 금방이라도 선박을 집어삼킬 기세였다. 린은 거칠게 흔들거리는 배의 난간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하지만, 트리할트의 배는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았다.


린이 난간 너머로 다시 시선을 옮기자, 그곳에 더는 소용돌이 같은 위험한 것은 없었다. ‘아케투르의 방식’을 따라, 트리할트의 선박은 자유롭게 물살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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