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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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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20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1.05.01 23:50
조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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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7쪽

안개빛 희극 (6) 글라드

DUMMY

푸석한 자갈밭은 끝없이 이어졌다. 글라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끝없는 길을 걸었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글라드는 알지 못했다. 애초에, 글라드는 지금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그저, 지나온 잠깐의 만남과 이별을 곱씹고 있었다.


도저히 잊히지 않았다. 저주받을 정도로 익숙한 얼굴들이 다시 머릿속에 나타났다. ‘그만 내버려 줘’같은 애원도 이제 지긋지긋했다. 그럼에도 언제나처럼 그들은 글라드를 찾아냈다.


이제 좀 익숙해질 때도 됐다고 글라드는 생각했다. 하지만, 글라드는 전혀 견딜 수 없었다. 모든 만남과 이별에는 그것만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 만남이 사소했든 아니든.


새로운 이별은 다시,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기에 더욱 쓰라리고, 가슴 아팠다.


“이번엔 어디로 향하는지 묻지 않는구나.” 칼렌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 칼렌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글라드는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글라드는 적당한 대답을 찾으려 애썼다. “···그랬었나요?”


“소툴.” 빛바랜 투구 아래에서 칼렌의 조용한 음성이 삐져나왔다. “덴티넬리오르 최후의 도시가 목적지란다.”


글라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툴이라···.” 글라드는 그 도시에 관한 지식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자꾸만 이별의 기억이 글라드를 괴롭혔다.


또다시 소름 끼치는 화염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 생생한 불꽃은 금방이라도 글라드를 잡아먹으려고 했다. 어둠이 내린 추억의 현장에서 글라드의 어린 시절을 책임졌던 작은 통나무집이 아직도 불타고 있었다.


그 화마 아래에, 잠깐의 만남을 통해 얻은 얼굴들이 보였다. 수많은 슬픔의 얼굴들은 글라드를 향해 비난을 던지고 있었다. 살아남은 글라드를 향해, 돌을 던지는 것 같았다.


글라드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째서 내가 살아남은 걸까···?’


“괜찮으냐, 글라드?” 칼렌의 물음이 들렸다.


고개를 숙인 글라드는 거짓을 대답했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러자, 앞서가던 칼렌은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노기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꽤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났단다. 역사와 명예를 두루 갖춘 꽤 훌륭한 가문이었지.”


“···예?” 글라드는 당황의 표시를 내뱉었다. 노기사가 스스로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적어도, 글라드가 기억하기로는.


그렇기에 글라드는 칼렌의 이야기에 쓸데없는 대꾸를 늘어놓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나무뿌리와 썩은 나뭇잎으로 가득 한 숲길을 따랐다.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난 덕분에, 나는 꽤 훌륭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단다. 하지만, 훌륭한 대접에는 반드시 여러 책임과 책무가 뒤따랐지.” 칼렌은 조용히 말을 몰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글라드는 아무런 대답 없이 칼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의 아버지였던 사람은 말이다. 제법 가문과 가족을 아꼈던 사내였단다. 그는 제법 힘들고 고달픈 어린 시절을 보냈었지. 그렇기에, 그 사내는 자식들을 엄격하게 다스렸었지.” 칼렌은 숨을 고르듯 잠시 말문을 닫았다.


썩은 나무 향이 감도는 숲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글라드는 칼렌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길 기다렸다. 제법 젖은 땅을 짓밟는 말발굽 소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곧, 칼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엄격한 사내 아래에서 나는 제법 괜찮은 시절을 보냈단다. 그 시절에는 나와 뜻이 비슷한 이들도 제법 만날 수 있었지. 그런 이들과 어울리는 것은 나쁘지 않았었단다.”


칼렌의 어투에서는 아름다운 추억의 향이 났다. 하지만, 그 향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갑작스레 찾아왔단다. 제법 괜찮은 시절의 종언은 꽤 이른 시간에 찾아왔지.” 칼렌은 꽤 목이 막히는 듯, 허리춤에서 가죽 수통을 꺼내, 오래된 투구 사이로 가져갔다.


칼렌은 제법 목을 축인 듯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단 한 번의 전쟁은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단다. 그 비극의 전쟁에서 나는 모든 가족을 잃었지. 그리고 친구도···.” 옛이야기를 내뱉는 칼렌의 어투는 무척이나 덤덤하고, 차분했다. 그 이야기의 무게와는 다르게 말이다.


칼렌은 계속해서 무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비극을 겪은 이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전장에 살았다. 하지만, 과거에 전장에서 느꼈을 감정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수없이 반복된 전투에서 나는 수없이 많은 이들과 이별했지. 하지만, 더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단다.”


“아무것도···.” 글라드가 조용히 대꾸했다.


칼렌은 고삐를 쥐고, 잠시 썩은 나뭇잎으로 가득한 숲길에 멈춰 섰다. 그리고 낡고 빛바랜 투구를 움직여, 글라드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 감정을 소중히 여기거라, 글라드. 만약 네가 진정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싶다면 말이다. 언젠간, 너도 수없이 되풀이되는 이별에 무뎌질 거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 칼렌은 여전히 차분했다. 차분하다기보다는 약간 소름 끼칠 정도로 냉정했다.


칼렌이 자신의 옛이야기를 통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글라드는 똑똑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글라드는 아무런 대답도 꺼내지 못했다. 대답 대신, 글라드는 첫 번째 이별을 떠올렸다.


글라드가 태어난 마을의 뒤편에는 커다란 산맥이 있었다. ‘암흑 산맥’이라 불린 그 산맥에 둘러싸인 글라드의 고향은 매우 포근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산맥의 거의 바로 아래에, 글라드가 태어난 작은 통나무집이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엄격함과 다정함을 두루 갖춘 어머니, 글라드는 그녀를 절대 잊지 못했다.


칼렌이 말했던 옛이야기처럼, 글라드에게도 갑작스러운 이별이 찾아왔다.


거대한 화마가 아름다운 추억을 덮쳤다. 언제 어디서 일어났는지 모를 거대한 화마는 순식간에 글라드의 어린 시절을 산산조각냈다.


언제나 글라드의 가족이 함께했던 작지만 포근했던 거실. 힘든 겨울을 이겨내게 해주었던 벽난로. 언제나 어머니의 손길이 가득했던 주방. 어린 글라드의 추억이 가득한 글라드의 작은 방.


과거를 앗아갔던 거대한 화마를 글라드는 절대 잊지 못했다. 마치 그 화마는 거대한 괴물처럼, 글라드의 과거를 앗아갔다. 작은 통나무집을 앗아갔다. ···어머니를 앗아갔다.


‘과연 그 기억이 무뎌질 날이 올까?’ 글라드는 앞서가는 칼렌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나도 언젠가 저 사람처럼 될 수 있을까?’ ···글라드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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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마지막 장작 (9) 에리크 22.03.19 20 0 12쪽
79 마지막 장작 (8) 하인츠 22.02.26 14 0 12쪽
78 마지막 장작 (7) 아라기 22.02.19 16 0 8쪽
77 마지막 장작 (6) 하란 22.02.12 14 0 7쪽
76 마지막 장작 (5) 로나트 21.11.13 26 0 8쪽
75 마지막 장작 (4) 글라드 21.10.09 15 0 7쪽
74 마지막 장작 (3) 아라기 21.09.04 25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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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마지막 장작 (1) 에리크 21.07.17 17 1 7쪽
71 안개빛 희극 (9) 카이 바르도나 21.06.19 32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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