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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수호자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13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1.03.20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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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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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9쪽

안개빛 희극 (4) 하란

DUMMY

쇳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잠시 어딘가에 정신이 팔렸던 하란은 다시 기나긴 행렬에 집중했다. 마치 사슬에 엮인 듯 하란은 기나긴 행렬의 하나가 되어있었다.


하란의 두 손에는 무거운 쇠사슬이 있었다. 사슬의 무게만큼이나, 강렬한 중압감이 하란의 온몸을 짓눌렀다. 흙먼지가 휘날리는 땅바닥을 쳐다보던 하란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행렬 너머로 청색 빛깔의 창을 든 청기사들이 보였다. 아름다울 정도로 날카로운 창은 금방이라도 누군가를 꿰뚫을 듯했다. 그럼에도 행렬을 벗어나 도망치는 이들이 있었다. 탈주자들은 금세 청기사들의 먹이가 되었다.


행렬은 주택가와 광장을 잇는 거대한 다리로 이어졌다. 거대한 다리 위에서 하란은 드넓은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성벽을 둘러싼 무서울 정도로 깊은 해자가 보였다.


꽤 정교하게 만들어진 해자에는 수많은 나무못이 자리했다. 아마 꽤 오랫동안 방치된 듯, 해자는 오물로 가득했다. 행렬이 하란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유롭게 바닥을 내려다보던 하란은 말없이 그저 발걸음을 옮겼다.


기나긴 행렬은 돌다리를 건넜고, 드높은 관문을 지났다. 어느덧 하란은 긴 행렬에 이끌려 거대한 광장에 도달했다. 광장에는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마치 연극을 지켜보듯 했다.


수많은 인파 너머로 거인의 옥좌가 보였다. 거인의 옥좌로 향하는 계단 아래에는 거대한 단상이 있었다. 단상은 너무 높았기에, 그곳에 누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이 사태의 주인, 프레오른 황자의 목소리였다. 프레오른 황자는 행렬의 끝이 놓인 단상 위에서 수많은 인파를 내려보고 있을 터였다.


긴 행렬의 발걸음들이 멎고 청기사들의 인도를 따라 하나둘씩 행렬을 떠나 계단으로 향했다. 단상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얼굴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렇지만, 희망을 잃은 얼굴과 거대한 불안 앞에 체념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란은 침묵하며, 줄어가는 행렬을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행렬은 줄어갔다. 단상 너머에서는 계속해서 두려운 도끼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도끼날이 무언가를 내려찍는 무서운 소리가 들렸다.


하란의 바로 앞의 사내는 무서울 정도로 몸을 부들대고 있었다. 두려움에 취한 듯,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하란은 그 익숙한 모습을 알고 있었다. 그는 로나트 아우스타르였다.


바로 코앞에 친근한 사내가 있었지만, 하란은 알지 못했다. 하란도 자신이 두려움에 잠식되고 있음을 눈치챘다. 이것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공포였다.


마침내 하란의 차례가 다가왔다. 두려움에 떨던 로나트 아우스타르는 온몸으로 단상에 오르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커다란 청기사들이 다가왔다. 로나트 아우스타르는 도살장의 돼지처럼, 단상으로 끌려갔다.


하란은 순순히 로나트의 뒤를 이어 단상으로 올랐다. 마침내 하란은 단상 위를 오롯이 볼 수 있었다. 드넓은 단상에는 역시나 프레오른 황자가 있었다.


프레오른 황자는 가장 상석에서 위엄을 내뿜으며 앉아 있었다. 흉터로 뒤덮인 얼굴은 그 분위기에 뒤섞여 더욱 두려움을 내뿜었다.


황자의 곁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다.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얼굴들이었지만, 두려움을 기억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똑똑히 기억나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키르···. 아니, 키루츠 황자는 멀찌가니 앉아 있었다.


귀족들의 자리 앞에는 거대한 도끼를 든 처형인이 있었다. 핏빛으로 물든 도끼의 주인이 처형을 집행하고 있었다. 데르키아 케멜은 눈빛으로 로나트 아우스타르를 불렀다. 로나트는 체념한 듯, 천천히 사형대로 향했다.


황자가 말했다. “이름을 말하거라.” 프레오른 황자는 간이옥좌에 엉덩이를 쭉 빼고 팔걸이 위에 팔을 올린 채 앉아 있었고 왼손으로는 턱을 괴고 있었다.


로나트 아우스타르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하란은 불안정한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쇠사슬이 떨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청기사들은 계속 불안해하는 로나트 아우스타르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대답하도록 해라. 이 몸을 기다리게 할 작정이더냐?” 황자의 고개는 계속해서 왼쪽으로 쏠렸다.


마침내 로나트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이게 뭐야.” 분노와 억울함이 섞인 목소리였다. “말이 다르잖아. 나는 하라는 대로 다 했어. 그런데 왜···.” 로나트 아우스타르는 금방이라도 황자에게 뛰어들 모양새였다.


“당최 무슨 소리인지···.” 황태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재미없군. 데르키아 경.” 황태자는 고개를 돌려 피로 뒤덮인 데르키아 경을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가리켰다. 데르키아 케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붉은 도끼를 들고 로나트에게 향했다.


“아니, 안 돼. 아니야. 죽고 싶지 않아. 아직 아니야. 아직···.” 로나트는 쇠사슬로 묶인 두 팔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발악했다. 청기사들은 다른 죄인들과 같이 그를 무릎 꿇렸다.


내내 지루해하던 황자는 마침내 웃음을 띠고 있었다. 하란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사형집행인의 차가운 도끼날이 죄인을 단죄하기 위해 하늘 위로 높이 떠 올랐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데르키아 케멜의 눈을 꿰뚫었다. “크아악···!” 핏빛도끼는 흉포한 비명과 함께 얼굴을 가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본 이들은 하나같이 소리를 질렀다.


주인 모를 화살은 계속해서 단상으로 날아들었다. 강력한 화살 앞에서는 청기사들의 두꺼운 강철도 전혀 소용없어 보였다.


순식간에 단상은 혼란으로 뒤덮였다. 목숨을 부지하려는 귀족들은 저마다 머리채를 부여잡고 꽁무니를 내뺐다. 하지만 프레오른 황자는 가만히 그 자리를 지켰다.


더는 가로막는 이가 없어진 로나트 아우스타르는 혼란에 숨어 단상 아래로 도망쳤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넋을 잃었던 하란도 재빨리 로나트를 따라 수많은 인파 속으로 몸을 던졌다.


단상 아래도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혼돈에 휩싸인 사람들은 두려움과 함께 광장을 벗어나려 애썼다. 서로 도망치려, 아수라장이 된 인파 속에서 하란은 이를 꽉 깨물었다.


이 혼란 속에서 누군가 하란의 정체를 알아챌 리 만무했다. 여기서 누가 죄인이고 누가 시민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모두가 그저 혼란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다.


하란은 관문을 빠져나와 돌다리에 들어섰다. 하란은 다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나무못이 박힌 깊은 해자에는 물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란은 씩 웃고 깊은 해자로 몸을 맡겼다. 거센 비명과 함께 하란은 깊은 해자와 조우했다.


다행히, 해자 속의 진흙은 하란을 에르칼의 곁으로 보내지 않았다. 하란은 적당한 나무못 끝에 쇠사슬을 걸어, 있는 힘껏 팔을 집어 당겼다. 힘겹게 하란을 옥죄던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간만에 자유를 찾은 하란의 두 손은 해자에 나뒹구는 누더기들을 뒤집어썼다. 그리곤 냄새나는 진흙을 누더기 위에 덕지덕지 칠했다. 어느 정도 위장을 마친 하란은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해자 속을 나아갔다.


다행히도 해자의 한쪽 구석으로 하수도가 보였다. 하란은 방치된 하수도를 향했다. 더럽고 냄새나는 하수도의 끝에는 분명히 끝이 있으리라. 하란은 헛구역질과 두려움을 참으며 조심스럽게 하수도를 지났다.


하수도는 끝없이 이어졌다. 좁은 통로는 어느덧 사람 여럿은 지나갈 만한 거대한 길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거대한 길 끝에는 상상하지 못할 사람이 하란을 반겼다.


“역시 여기로 올 줄 알았어, 마이아르의 하란.” 그곳에는 키르가 있었다.


하란은 당황하며 뒷걸음쳤다. “키르, 어째서 네가 여기에?”


키르는 날렵한 검지를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댔다. “쉿, 긴 대화를 나누기엔 너무 날이 짧아.” 키르는 그러더니 하란을 재촉했다.


“잠깐, 제대로···.” 하란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려 했다.


그러나 키르는 그런 하란을 막아 세웠다. 그리고 저 멀리, 빛이 보이는 통로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저기로 가. 그 끝에 너를 위한 이별 선물을 뒀으니까.”


키르는 하란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하란을 재촉했다. 하란은 어쩔 수 없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통로를 따라, 희미한 빛줄기를 따라 하란은 계속해서 걸었다. 빛줄기의 끝에는 마침내 밝은 세상이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는 키르가 남긴 선물이 있었다. 하란은 흔쾌히 키르가 남긴 말에 올라탔다.


하란은 고삐를 당겼다. 익숙하듯 익숙하지 않은 손맛이 느껴졌다. 하란은 말을 타고 고향으로 향했다. 다정하고 포근한 마이아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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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마지막 장작 (8) 하인츠 22.02.26 14 0 12쪽
78 마지막 장작 (7) 아라기 22.02.19 16 0 8쪽
77 마지막 장작 (6) 하란 22.02.12 14 0 7쪽
76 마지막 장작 (5) 로나트 21.11.13 26 0 8쪽
75 마지막 장작 (4) 글라드 21.10.09 15 0 7쪽
74 마지막 장작 (3) 아라기 21.09.04 25 0 7쪽
73 마지막 장작 (2) 린 21.08.07 17 1 7쪽
72 마지막 장작 (1) 에리크 21.07.17 16 1 7쪽
71 안개빛 희극 (9) 카이 바르도나 21.06.19 32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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