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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수호자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02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1.03.13 23:50
조회
77
추천
1
글자
7쪽

안개빛 희극 (3) 에리크

DUMMY

이른 아침의 숲은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로 가득했다. 아직 지난날의 피로에 취한 에리크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좁은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낯선 풍경이 있었다.


주변을 둘러싼 방책과 해자가 가장 먼저 보였다. 옴브린 숲에 존재하는 작은 주둔지의 풍경은 신선하다기보다는 정겨웠다.


그 광경은 어제, 황급한 상황에서는 전혀 눈에 들지 않았었다. 조금 여유가 생긴 지금, 드디어 그 풍경은 에리크의 눈에 붙잡혔다.


옴브린 숲의 작은 주둔지는 마치, 어린 날에 종종 읽었던 이야기에 나올 법한 곳이었다. 고개를 숙인 나무들은 신비한 색으로 빛났다. 에리크의 입에서는 서늘한 입김이 나왔지만, 그곳은 마치 만개한 봄처럼 느껴졌다.


아직 새벽은 쌀쌀했지만, 주둔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저마다 목적을 가진 이들의 얼굴은 성마을에서 보았던 얼굴들과 사뭇 달랐다. 숲 사람들의 얼굴에는 작은 미소가 담겨있었다.


에리크는 미소가 담긴 이들을 조용히 바라보며, 주변을 걸었다. 차가움이 담긴 주둔지의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오랜 시간을 머금은 듯, 하늘 높이 치솟은 거목.


수많은 등불이 거목을 꾸며주었다. 거목에 붙은 등불은 뿌연 안개로 시작된 이른 아침을 밝혀주었다. 희미한 불빛을 따라, 에리크는 거목으로 향했다.


거목. 그 아름다운 거목에는 나무갓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었다. 거대한 밑줄기를 따라 둥글게 지어진 계단 너머에는 신비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신비함 속에서는 차가운 겨울 주둔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 신비함을 가진 좁은 오두막에는 옴브린 숲의 수호자가 살았다.


에리크는 지난날 보았던 은색 머리의 수호자를 보기 위해, 거목을 오르려 했다. 낡은 계단에 막 발을 올렸을 때, 누군가가 에리크의 어깨를 두드렸다.


“일찍 일어났군, 소년.” 굵은 목소리가 에리크를 붙잡았다.


에리크는 두꺼운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기억에 있는 사내였다. 어제 보았던 옴브린의 수호자 곁에 있었던 사내였다. 분명히 이름은··· 그래, 할코르였다.


사내는 하얀 늑대 가죽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할코르의 덩치는 우락부락했다. 사내는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기에, 강인한 근육이 한눈에 보였다. 하얀 늑대 아래로, 사내의 짙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할코르 씨.” 에리크가 말했다.


“···그래, 좋은 아침이군.” 그리고 사내의 시선은 에리크의 발걸음으로 향했다. “거목에는 무슨 용건이지···?” 할코르가 물었다.


에리크는 고개를 숙였다. “···딱히, 아무것도.” 에리크는 사실대로 말했다.


늑대 가죽 아래로 할코르의 날카로운 눈매가 느껴졌다. “수호자께서는 진작 순찰을 나가셨다. 우리 사람들은 꽤 부지런하거든.”


“수호자를 뵈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에리크가 말했다. “···그저 거목 위에서 숲을 내려다보고 싶었을 뿐.” 에리크가 설명했다.


“참 할 일도 없군. 그럴 시간에 검을 한 번이라도 더 휘두르는 게 낫지.” 할코르가 혀를 찼다. “너와 함께 왔던 소년은 꼭두새벽부터 검을 휘두르고 있더군. 조금이라도 본받는 게 어때?”


“···테오, 그 녀석이요?” 에리크가 되물었다.


할코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테오··· 그런 이름이었지.”


에리크가 물었다. “테오는 지금 어디에···?”


할코르는 등을 돌렸다. “따라와. 직접 데려다주지.” 할코르가 등 뒤로 손짓하며 에리크를 인도했다.


그들은 겨울 주둔지를 나섰다. 숲 사이로 난 흙길을 조금씩 걸어가자, 시원한 물소리가 들렸다. 물소리를 따라 조금 더 걷자, 강을 낀 좁은 공터가 나왔다.


그루터기가 가득한 공터에는 물소리 말고도 다른 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 주변에는, 사뭇 진지하게 검을 휘두르고 있는 푸른 머리의 소년이 있었다.


테오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에리크는 그런 테오에게 다가가려다, 멈춰 섰다. 진지하게 휘날리는 검 끝에서는 아름답다 못해 비장함까지 느껴졌다.


테오가 만들어내는 칼날의 선율은 아름답게 느껴졌다. 에리크는 잠자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무심코 말을 잃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몇 번이고 검을 휘두르던 테오는 이윽고 휘두름을 멈췄다. 그루터기가 가득한 공터에는 다시, 물소리만 존재했다. 끝없이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테오가 에리크를 향해 돌아보았다.


“···우리가 방해했나 보군.” 할코르가 말했다.


테오가 말했다. “아뇨, ···아닙니다.” 테오는 휘두르던 검을 조용히 칼집으로 돌려놨다. 테오가 휘두르던 검은 평범하고 조잡했다. “마침 쉬려고 했었거든요.”


“좋은 아침이야, 테오.” 에리크는 짧은 인사를 건넸다.


테오가 대답했다. “좋은 아침, 에리크.” 테오는 다시 할코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신가요, 할코르 씨?”


할코르는 늑대 가죽에서 살짝 삐져나온 머리를 긁적였다. “이 녀석이 널 찾고 있었거든. 그래서 안내하는 겸, 겸사겸사 같이 온 거지.”


“제게 무슨 목적이라도 있으십니까, 할코르 씨?” 테오가 물었다.


할코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딱히. 그저 수호자께서 너희를 잘 챙겨주라고 하셨거든.”


“수호자께서···?” 에리크가 물었다. 수호자의 과분한 환대에 에리크는 어안이 벙벙했다.


할코르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시간도 괜찮으니 모처럼 검이나 휘둘러볼까.” 할코르는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누가 봐도 잘 연마된 날카로운 검이었다. “나는 검보다는 도끼를 선호하지만, 하루쯤 휘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에리크는 그루터기에 놓인 검을 쥐어 들었다. 시원한 소리와 함께 흘러가는 강물, 이제 겨우 고개를 내민 차가운 태양이 함께 했다. 검을 쥔 소년들은 할코르의 검날에 집중했다.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사내는 천천히, 그리고 날렵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의 솜씨는 투박했지만, 나름의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어느새 테오도 사내를 따라 검을 휘둘렀다. 질세라, 에리크도 집어 들었던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에 다시 아름다운 칼의 소리가 섞였다.


곧 겨울의 햇빛이 그루터기에 고개를 내밀었다. 투박하게 검을 휘두르던 할코르가 검을 거두었다.


“이쯤 해두지.” 할코르가 말했다. “나는 할 일이 있으니, 거목으로 돌아가겠어. 너희들도 적당히 휘두르고 돌아오도록 해.”


할코르가 떠났지만, 소년들은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그 행동은 하나의 결의와도 같았다. 까마귀 가면···. 저택에서 그 기묘함을 만난 이후 한시도 그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복수와는 다른 결심이었다. 모이카···. 에그윈···. 그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언젠가 다시 찾아올 그 날을 위해. 에리크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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