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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수호자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16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1.01.30 23:50
조회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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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9쪽

업의 그림자 (9) 에리크

DUMMY

“···아직 하나도 입에 대지 않았군.” 까마귀 가면을 쓴 사내가 구석에 먼지 덮인 빵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까마귀는 에리크가 기억하기에 에그윈이라는 이름이었다. 작은 제등을 손에든 까마귀는 낡고 차가운 감옥에 등을 기댔다.


에리크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순순히 네놈들이 주는 걸 입에 댈 리가 없지.”


“···하.” 까마귀 가면 너머에서 코웃음이 들렸다. “또 배를 걷어차이고 싶나?”


에리크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개소리.”


까마귀 가면은 구석에 제등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빠르게 에리크를 향해 걸어왔다. 에리크는 순간 다시 한번 걷어차이겠거니 생각했다. 에리크는 질끈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에리크는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에리크는 다시 눈을 뜨고 까마귀 가면을 찾았다. 에그윈은 구속된 에리크 앞에 쭈그려 앉았다.


에그윈이 말했다. “여전히 기운찬 사생아야. 조금은 기운이 빠졌겠거니 여긴 내가 바보였어.”


에리크는 자유롭지만, 기운 없는 두 손으로 까마귀를 노렸다. 하지만, 그 노력은 까마귀에게 닿지 않았다. 까마귀는 단숨에 에리크의 머리채를 잡아채, 바닥에 내리꽂았다.


“이제 좀 순순히 있으라고. 나도 지긋지긋하니까.” 에그윈이 험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리크는 저항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울부짖는 굶주린 속은, 전혀 에리크에게 힘을 전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습한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에리크는 전혀 입을 닫지 않았다.


에그윈은 이내 흥미를 잃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 숙인 고개 너머로 옷에 묻은 먼지를 터는 소리가 났다. 에리크는 애를 쓰며 고개를 세우려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 한계야···.’ 희미한 의식과 함께 에리크는 생각했다.


습한 감옥에서 지켜온 고결한 자존심은 의미가 있었을까? 어쩌면 그저 아집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과 불안감이 구린 배 속을 쑤셔댔다. 에리크는 배고픔을 넘어, 공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공허함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사라져갔다. 다시 철창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까마귀의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져갔다. 에리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언젠가 에리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차가워진 에리크의 몸이 흘러간 시간을 말해주었다. 온몸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싸늘했다.


어둠 속에서 난 발소리는 차가운 에리크의 몸에 다시 기운을 불어넣었다. 에리크는 겨우 되찾은 힘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언젠가 보았던 희미한 불빛이 발소리와 함께 느껴졌다.


철창이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리고 습한 감옥에는 또 다른 이가 모습을 보였다.


덩치가 큰 사내였다. 사내는 익숙한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내의 위압감은 언젠가 보았던 에그윈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 사내의 그림자를 이미 에리크는 알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지?” 에리크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벌리며 말을 내뱉었다.


키 큰 까마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빵과 술병이 놓인 쟁반을 들고 있었다. 사내는 천천히 에리크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에리크의 머리맡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에리크는 미간을 찌푸렸다.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앞을 생각하면 먹어 두는 게 좋을 거다.” 사내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앞···. 그게 무슨 소리지?” 에리크가 의문을 표했다.


근엄한 까마귀 가면은 한숨을 뱉었다. “일단 먹는 게 좋을 거야. 이유는 천천히 말할 테니.” 사내는 계속해서 에리크를 재촉했다.


고개를 처박았던 에리크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위압감에 짓눌린 듯 자기도 모르게 쟁반에 놓인 빵으로 손을 뻗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빵은 퍽퍽했지만, 달콤했다. 한번 맛을 본 에리크는 허겁지겁 빵을 삼키기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에리크는 몇 번이고 헛기침했다. 따가운 목을 달래기 위해 술병을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그깟 자존심 따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빵 한 조각, 맥주 한 모금은 고결한 자존심보다 훨씬 나았다.


그런 에리크를 두고, 까마귀는 습한 감옥의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이곳저곳의 벽을 짚어보며 무언가 생각에 빠진 모습이었다.


꾸역꾸역 빵을 목에 집어넣은 에리크가 물었다. “하려던 말이··· 무엇이냐?” 에리크는 여전히 자존심을 세웠다.


까마귀 가면은 잠시 에리크를 바라보더니, 습한 벽을 향해 주먹을 내리찍었다. 단단한 벽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다. 습한 감옥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구멍 너머로 눈 덮인 풍경이 보였다.


“···이게 도대체?” 에리크는 당황하며 사내를 보았다.


까마귀는 다시 에리크에게 다가왔다. 에리크는 화들짝 놀라며 땅을 짚으며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까마귀는 에리크를 가둔 사슬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거친 사슬은 한순간에 가루가 되었다.


“어서 사라져라.” 사내가 말했다.


에리크는 당황하며 물었다. “하지만 ···왜?”


“모두를 위해서다.” 사내는 말하며 에리크를 재촉했다. “자, 어서 가거라.”


에리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친구도 같이 갇혔어요. 혼자서는 한 걸음도 못가요.” 에리크가 말했다.


“···그 녀석을 말하는 건가.” 까마귀는 귀찮은 듯 말끝을 흐렸다. “그 꼬마라면 바로 반대 방에 있다.” 까마귀는 그 말과 함께 품에서 열쇠를 꺼내 에리크에게 던졌다.


“쭉 길을 따라 사라져라. 그곳에 있는 숲에서 도움을 구할 수 있을지도.” 사내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에리크는 잠시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곧바로 사내를 쫓아 밖으로 나섰다.


감옥을 엮은 복도는 습하고, 어두컴컴했다. 복도는 기괴하고 슬픈 소리로 가득했다. 흐느낌과 체념의 목소리 섞인 복도는 에리크와 어울리지 않았다. 소년은 곧장 친구가 갇힌 감옥으로 향했다.


“누구지···? 에리크!” 그곳에는 사슬에 엮인 테오가 있었다.


“무사했구나, 테오!” 에리크는 테오에게로 뛰어갔다. 테오는 조금 야위고 싸늘했지만, 눈가에서는 아직 독기가 느껴졌다.


“어떻게 여기 온 거야···?” 테오가 물었다.


에리크는 까마귀에게 받은 열쇠로 테오의 사슬을 풀었다. “설명은 가면서 해줄게. 일단 도망치는 게 먼저야.”


도망자들의 어깨를 향해 눈이 내렸다. 소년들은 거친 숨을 내뿜으며 눈 덮인 길에 올랐다. 오랜만에 움직이는 몸은 삐걱대며 말을 따라주지 않았다. 하지만, 등 뒤에서 추격자들이 쫓아올 것만 같아서, 소년들은 한시라도 발을 놀릴 수 없었다.


“악···!” 뒤편에서 푸석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에리크는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테오가 눈에 파묻혀 쓰러져 있었다.


에리크는 테오에게 뛰어가서 손을 내밀었다. “어서 일어나, 테오.”


“···고마워.” 테오는 에리크가 내민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숲이 보였다. 숲은 눈으로 뒤덮여 새하얬다. 이상하게도 포근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에리크는 발목을 잡아채는 눈을 따라 천천히 보폭을 좁혔다. 그리고 눈 덮인 나뭇가지 사이로 눈을 쏟아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불필요한 여유였지만, 에리크는 하늘을 보았다. 연신 입에서는 따뜻한 입김이 나왔다.


“이제 안전한 거야···?” 테오가 물었다.


에리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모르겠어.” 입김을 뱉으며, 에리크는 주변을 살폈다.


작게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졌다. 에리크는 경계하며 수차례 몸을 흔들었다. 줄곧 걱정되었던 추격자들의 소리일까? 에리크는 습관적으로 허리춤에서 칼을 뽑으려 했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수풀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름다운 백마에는 누군가가 타고 있었다. 그곳에는 신비한 여성이 있었다.


기나긴 은색 생머리가 내리는 눈과 어울렸다. 조잡한 가죽을 걸쳤지만, 그녀에게서는 아름다운 기품이 느껴졌다. 그녀는 말에 탄 채로 소년들을 내려다보았다.


“어서 오너라, 아이들아.” 그녀가 말했다. 청아하고 마음을 두드리는 목소리였다. “옴브린 숲에 온걸 환영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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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마지막 장작 (9) 에리크 22.03.19 20 0 12쪽
79 마지막 장작 (8) 하인츠 22.02.26 14 0 12쪽
78 마지막 장작 (7) 아라기 22.02.19 16 0 8쪽
77 마지막 장작 (6) 하란 22.02.12 14 0 7쪽
76 마지막 장작 (5) 로나트 21.11.13 26 0 8쪽
75 마지막 장작 (4) 글라드 21.10.09 15 0 7쪽
74 마지막 장작 (3) 아라기 21.09.04 25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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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마지막 장작 (1) 에리크 21.07.17 17 1 7쪽
71 안개빛 희극 (9) 카이 바르도나 21.06.19 32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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