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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수호자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22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0.11.07 23:50
조회
68
추천
2
글자
7쪽

백야 (9) 어린 소년

DUMMY

어린 소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황금빛 보름달이었다. 아름다운 만월은 찬란한 황금빛을 내뿜었다.


날카로운 탑은 금방이라도 황금빛 보름달을 반으로 가를 듯, 옆에서 자라났다. 그 탑은 언제라도 고개를 높이 치켜세워야만 그 높이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탑 주변의 하늘은 아무런 색깔이 없었다. 밤하늘의 검은빛도 아니었고, 아침 하늘의 밝은 빛은 더더욱 아니었다. 어린 소년의 두 눈에 보이는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에, 순백의 땅이 깔려 있었다. 공허하고 신비한 대지에는 그 흔한 꽃잎 하나도, 잔디 이파리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 광경은 무척이나 단조롭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어린 소년은 작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처한 상황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간이 잠시 흘렀다. 그리고, 그 평화를 멈추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어지럽거나, 시끄러운 소리는 전혀 아니었다. 분명히, 그 소리는 물이 흐르는 소리였다. 어린 소년은 어딘가 맑고, 조금은 시원한 소리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새하얀 분수가 어린 소년의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대리석 분수에서는 투명한 물이 뿜어져 나왔다.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분수 주변에는 아무런 색깔이 없는 나무 의자가 있었다.


어린 소년은 넓은 의자로 다가갔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땅을 밟으며, 한 발자국씩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전혀 기억이 없는 순백의 땅은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을 주었다.


곧, 무색의 의자가 어린 소년을 반겼다. 떠오르는 기억도, 느껴지는 감정도 없는 의자였다. 나무 의자에 앉은 어린 소년을 향해 고요한 물소리가 인사했다. 어린 소년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물방울을 느끼며, 담담하게 주변을 살폈다.


비로소, 어린 소년은 물방울 너머에 홀로 자리한 나무를 발견했다. 오래된 대리석 분수 너머에는 오래된 나무가 있었다. 그래···. 어린 소년은 아름다운 정원에 그늘을 드리워주던 나무를 기억했다.


봄이든 가을이든 그 나무는 언제나 화창한 나뭇잎을 자랑했다. 어린 소년은 튼튼한 나무에 그네를 매달아 놀곤 했다. 어린 소년은 천천히 나무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떠올렸던 오래된 나무를 쳐다보았다.


오래된 나무는 외롭게 홀로 울창하게 자라고 있었다. 고귀한 나뭇잎은 모두 초록빛을, 굵고 장엄한 나무 기둥은 튼튼한 고동색을 내뿜었다. 어린 소년은 이전과는 다른 몸놀림으로, 오래된 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어린 소년은 금방 떠올렸던 그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빛바랜 밧줄에 힘겹게 매달린 판자에는 낡은 손길이 느껴졌다. 어린 소년은 빛바랜 그네를 보며 낡은 기억을 떠올렸다.


어린 소년은 저택에서 심심할 때면, 언제든 그 정원에서 그네와 함께 시간을 보냈었다. 어린 소년에게 저택은 너무나도 심심하고, 또 ···차가운 곳이었다.


저택···. 어린 소년은 비로소 저택을 떠올렸다. 어린 소년은 훌륭하고 오래된 저택에서 살았었다. 어린 소년의 기억에, 그 저택은 꽤 거대했다. 저택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구는 고풍스러운 대리석으로 막혀 있었다.


아득한 그네에 앉은 어린 소년은 저택에 붙은 대리석 출입구를 노려보았다. 저택의 대문은 마치, 어린 소년을 부르는 것 같았다. 대문의 너머에서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도대체 어떤 목소리가 들릴지 어린 소년은 절대 알 수 없었음에도 말이다.


어린 소년은 빛바랜 그네에 앉았다. 그리고 땅을 몇 번이고 차며, 그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네는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 소년의 기억도 함께,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삐걱대는 그네가 조금씩 빨라졌지만, 어린 소년의 뺨을 스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는 아무런 바람도 불어오지 않았다. 어린 소년은 흔들거리는 그네를 천천히 붙잡았다.


어린 소년은 그네에서 일어섰다. 어린 소년은 조금씩, 오래된 저택으로 다가갔다. 저택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린 소년은 여전히 아무런 목소리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제, 어린 소년이 떠오르는 거의 없었다. 주변은 단조로운 흑백의 기억뿐이었다. 빛이 사라진 풍경에서 황금빛 보름달이 유일하게 빛을 내뿜었다.


어린 소년은 보름달을 지켜보았다. 고고하게 빛나는 달은 어린 소년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린 소년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보름달을 지켜보았다. 어린 소년은 언젠가 달을 바라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언젠가 어린 소년은 언덕에서, 달을 바라보곤 했었다. 그리고 아름답게 빛나던 달 아래에는 저택이 있었다.


어린 소년은 새로운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대리석 저택은 어느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언덕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린 소년이 가진 첫 번째 의문이었다.


어린 소년은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었다. 어린 소년은 언덕 아래에 무엇이 펼쳐져 있을지 궁금했다.


그곳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초원이 있을 수도 있었다. 혹은 무수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가 있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는 깊고 드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린 소년은 언덕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흑백의 풍경은 어린 소년이 빛없는 절벽으로 다가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린 소년은 자신을 가로막는 힘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순응할 따름이었다.


하늘에는 아름다운 만월이 찬란한 황금빛을 내뿜었다. 아무런 색깔이 없는 하늘은 아직도 아무런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반면에, 어린 소년은 수많은 감정을 느꼈다. 신비하고도 평화로운 풍경은 어린 소년에게는 꿈과 같은 기억이었다. 그 기억과 같은 꿈에서, 어린 소년은 이상하게도 서운함을 느꼈다. 서글프고도 야속했다. 어린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쏟아낼 뻔했다.


어린 소년은 안간힘을 쓰며 눈물을 참아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하늘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이상하게도, 황금빛 보름달은 보이지 않았다. 날카로운 탑이 황금빛 보름달을 삼킨 걸까? 적어도, 어린 소년의 기억에는 떠오르지 않는 풍경이었다.


황금빛 보름달이 사라진 하늘에는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차가운 아침처럼, 아무것도 없던 하늘은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과 날카로운 탑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어린 소년을 덮쳤다. 하늘에서 만들어낸 빛과 그림자는 평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어린 소년은 평화가 사라진 대지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린 소년은 기억도 꿈도 아닌 그 풍경을 잊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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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마지막 장작 (8) 하인츠 22.02.26 1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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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마지막 장작 (6) 하란 22.02.12 14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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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마지막 장작 (3) 아라기 21.09.04 25 0 7쪽
73 마지막 장작 (2) 린 21.08.07 17 1 7쪽
72 마지막 장작 (1) 에리크 21.07.17 17 1 7쪽
71 안개빛 희극 (9) 카이 바르도나 21.06.19 32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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