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화 카렌시아와 오블리비언
제 62화 카렌시아와 오블리비언
봉근은 두 팔로 바람을 막으며 움츠리고 있다가 사람들의 소리에 억지로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선율과 박 교수가 바람을 뚫고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난간 위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빌어먹을.” 봉근은 외마디 욕을 하며 달려갔다.
하지만 바람에 막혀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슬로모션을 하듯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며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나 간신히 난간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다리 밑으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봉근은 재빨리 다리 밑을 내려다보았지만 검은 어둠만 바다처럼 넓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신기하게도 두 사람이 사라짐과 동시에 거칠게 불던 바람은 미풍으로 변하더니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봉근은 몸을 세우고 하늘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하였다.
바람이 멈추자 조 회장의 부하들도 우르르 몰려와 다리 밑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어둠이 앞을 가리고 있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염 상무는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빨리 밑으로 내려가. 시체라도 찾아봐.”
부하들은 한꺼번에 밑으로 내려가 두 사람이 떨어졌을 만한 곳을 뒤져보았다. 건설 현장의 조명이 있는 대로 켜지고 주위는 대낮처럼 밝혀졌으나 선율과 박 교수의 시체는 어디에도 없었다. 브리지타워 차단막 바깥으로 반경 100미터 까지 뒤져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염 상무는 두 사람의 시체가 보이지 않자 죽지 않은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곧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 수밖에 없었다. 20층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어떻게 살아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시체는 어디에 있는가? 바람에 날려간 건 아닌가? 둘이 뛰어내리는 순간 몸이 날아갈 듯 엄청난 바람이 불지 않았던가?
그 때 염 상무의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염 상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크게 심호흡을 한 후 공손하게 전화를 받았다.
“예, 회장님. 주무시지 않으시고요?”
“지금 잠이 오게 생겼어? 어떻게 됐어?”
“예상대로 됐습니다. 당초 윤 기자만 나올 줄 알았는데 박 교수도 함께 나타났습니다.”
“오, 그거 잘됐군. 박 교수까지 한꺼번에 잡았단 말이지?”
“그런데 그게.”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브리지타워 중간 다리로 몰아가서 봉근과 격투가 벌어졌습니다.”
“하하, 웃기자 마. 그 자들이 무슨 봉근의 상대가 되겠어?”
“그렇습니다. 그들은 봉근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몸이 날릴 듯 거센 바람이 불어 닥친 겁니다. 봉근이 멈칫하자 그들은 느닷없이 난간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밑으로 뛰어내렸습니다.”
“20층 높이에서 밑으로 뛰어내렸다는 거야? 그렇다면 시체는 작살이 났겠네.”
염 상무는 잘못한 일을 자백하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뭐야? 말이 되는 소리야?”
“브리지타워로부터 반경 백 미터까지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짐작이 가는 것은 그들이 뛰어내릴 당시 어마어마한 돌개바람이 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혹시 바람에 휩쓸려간 것이 아닌지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떨어진 거 맞지?”
“봉근도 옆에 있었습니다.”
조 회장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분명히 죽었을 거야. 그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쇠로 만든 인간이 아닌 이상 살아있다는 건 불가능 해. 그리고 만약 바람에 멀리 날려갔다면 오히려 잘된 것 아닌가? 우리랑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 되잖아. 그렇지?”
“그렇습니다.”
“좋아. 모두 철수시켜. 입단속 단단히 하고.”
“알겠습니다.”
지시를 한 후에도 조 회장은 한참 동안 전화를 끊지 않고 있었다. 염 상무는 핸드폰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올까 잔뜩 긴장을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낮게 조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 변호사는··· 찾아서 조용히 데려와. 죽이지는 말고. 자식이 죽었다는 걸 알면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한편 박 교수는 차마 뛰어내리지 못하고 난간 위에 주저앉으려고 했다. 그러나 선율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강하게 박 교수의 손을 잡아당겼다. 봉근이 지옥에서 기어 나오는 악귀의 얼굴을 하고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아슬아슬하게 봉근의 내뻗는 손을 피해 아래로 뛰어내렸다. 처음엔 곤두박질치더니 곧 이상한 힘이 부드럽게 몸을 받쳐주는 것을 느꼈다. 박 교수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질 정도로 오래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니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 날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박 교수는 눈을 뜨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길고 커다란 동굴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렇게 밝지는 않았지만 은은한 빛으로 가득 차 있어서 사물을 구별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내가 죽은 것은 아닌가?” 박 교수는 허벅지를 꼬집었다. 따끔한 아픔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살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혹시 이곳이 바람이 다니는 길인가?”
박 교수의 동공은 점차 확장되고 입은 크게 벌어졌다. 생전 처음 보는 빛이 동굴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빛은 생명이 있는 듯 한곳에 머물지 않고 춤을 추며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색깔도 시시각각 변하며 오로라처럼 장엄한 광경을 뽐내고 있어 그 압도적인 모습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하늘 속의 모습이 이런가? 마치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 같지 않은가? 박 교수는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억누를 수 없어 벌떡 일어나서 크게 소리쳤다.
“드디어 들어왔다!”
“박 교수님, 진정하세요.”
선율의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선율이 잔뜩 긴장한 채 손사래를 치고 있었고 그 옆에 얼굴이 주름으로 뒤덮인 노인이 서 있었다. 박 교수는 반가워서 말했다.
“윤 기자! 이곳이 바람이 다니는 길, 맞지요?”
선율은 주위를 둘러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바람이 다니는 길이 맞아요. 하지만 조심해야 돼요.”
“무슨 소립니까?”
“이곳에서는 절대로 감정의 기복이 있어서는 안 돼요. 마음의 평정을 잃으면 오블리비언이 쫓아와서 기억을 빼앗을 겁니다.”
박 교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오블리비언은 뭡니까?”
“오블리비언은 기억을 먹고 사는 괴물입니다. 그에게 잡히면 아무 것도 기억할 수 없게 돼요.”
“무슨 허무맹랑한 얘깁니까? 어떻게 그런 괴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 비현실적인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선율은 답답한 듯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박 교수님. 그러면 여기에 있는 바람이 다니는 길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까? 세상은 우리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은 책에서 읽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박 교수가 무어라 대꾸하려는 순간 멀리서 구우- 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노인이 말했다.
“이미 늦은 것 같아. 벌써 그가 오고 있어.”
박 교수는 선율에게 물었다.
“이 분은 누구십니까?”
선율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대답했다.
“이 분이 바로 카렌시아에요.”
박 교수는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카렌시아라면 윤 기자가 말했던 바람의 정령이신가요? 반갑습니다. 저는 박 용진 교수라고 합니다. 역사학자지요.”
그러나 카렌시아는 대꾸하지 않고 한곳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박 교수는 그 모습을 보고 호기 있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렇습니까? 바람을 지배하는 분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분 아닙니까? 이해할 수 없군요.”
박 교수는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났고, 게다가 꿈에 그리던 바람이 다니는 길에 오르게 되자 흥분에 들떠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진정하라는 소리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카렌시아는 그런 박 교수를 보며 코웃음 쳤다.
“흥, 하룻강아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길 한편이 회색빛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잠깐 사이에 회색빛이 점점 진해지더니 거대한 해파리 같은 것이 흐늘거리며 나타났다. 허공에 둥둥 뜬 채, 은밀하게 소리도 없이 나타났기에 마치 길에 붙어있던 물체가 분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 괴기스런 모습에 박 교수는 비로소 입을 다물었다. 카렌시아와 선율은 비교적 침착하게 오블리비언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박 교수는 너무 무서워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특히 머리 한가운데 커다란 눈이 하나 박혀 있었는데, 흰자위는 없고 눈동자만 있어서 깊고 깊은 구멍을 뚫어놓은 것 같았다. 박 교수는 공포에 질려 빨려들듯 구멍 같은 눈을 바라보았다. 선율은 박 교수가 오블리비언의 시선에 붙들려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박 교수. 고개를 돌려요. 그의 눈을 보지 말아요!”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의 눈과 마주치자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허무에 사로잡혀 전신이 축 늘어지고 말았다. 선율은 카렌시아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쯧쯧. 까불더니 오블리비언이 그의 기억을 빨아들이고 있어.”
선율은 다급하게 말했다.
“구해야 됩니다.”
카렌시아는 내키지 않는 듯 무어라 투덜거리고는 긴 칼을 하나 내밀며 말했다.
“이것은 내 검투사 칼이야. 달려가서 놈의 촉수를 잘라버려. 촉수가 잘려나가면 새 촉수가 다시 자라나겠지만 내가 강하게 바람을 일으켜 방해할 거야.”
선율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렌시아는 거대한 검은 그림자로 변하며 외쳤다.
“자, 지금이야.”
순간 선율은 달려가서 있는 힘껏 칼을 휘둘렀다. 박 교수의 주변에서 너울거리던 촉수들이 속절없이 잘려나갔다. 오블리비언은 멈칫해서 선율에게로 눈을 돌렸다. 허무의 느낌이 선율에게로 물밀 듯이 몰려들자 선율은 칼로 눈을 가리며 다시 덤벼들었다.
오블리비언은 화가 나서 구우- 소리를 지르며 촉수를 사방으로 촥 펼쳤다. 촉수는 머리카락처럼 눈 주위에서 꿈틀거리다가 한꺼번에 선율을 향해 쏟아져 나왔다.
그 때 카렌시아는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가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송곳 같은 바람이 먼저 오블리비언의 몸을 헤집었고 뒤이어 바위 같은 주먹이 오블리비언을 강타했다. 그러나 유령처럼 흐늘거리는 오블리비언은 조금 밀렸을 뿐이었다.
오블리비언은 촉수로 몸을 감싸고 카렌시아에게 무어라 항의하는 것 같았다. 카렌시아는 바람의 옷을 입은 듯 주위에 돌개바람을 일으키며 오블리비언과 대치하고 있었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지 핏대를 높이며 서로 화를 내다가 이윽고 다시 맞부딪쳤다. 콰르릉 소리와 함께 강한 번개가 번쩍이고 사방이 어두워졌다가 눈을 뜨지 못할 만큼 환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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