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화 올가미
제 56화 올가미
박 교수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이대로 진행합시다. 어차피 증거는 검찰이 찾게 될 겁니다. 우리는 이제 3차 제보를 하고 계속 4차, 5차 제보를 하면 됩니다. 그저 불쏘시개를 찔러 넣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미르타워라는 연료가 있으니 활할 타오를 것입니다.”
박 교수는 웃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이글이글 독기가 서려있었다. 이제는 그가 더 적극적이었다. 선율은 문득 섬뜩함이 느껴져 말했다.
“교수님! 어째 많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나는 누구한테 맞으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합니다. 아니 그보다 몇 배로 더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조 회장은 금방 사람을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윤 기자도 나를 꼭 바람이 다니는 길로 데려다줘야 할 겁니다.”
선율은 가슴이 뜨끔했지만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커피를 마시고 잠시 쉰 후 컴퓨터에 있는 자료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박 교수가 선율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 3차 제보 자료를 공개합시다. 내일 아침 뉴스에 나올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선율은 고개를 갸우뚱 하며 말했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기습적으로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윤 기자는 우리가 언제까지 숨어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내일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겁니다. 머뭇거리다가는 어떤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 전에 하나라도 빨리 자료를 공개해서 일을 크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선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 교수의 말이 맞았다. 둘은 지금 거대 기업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둘은 당초 박 교수가 제보하기로 했던 장 기자의 부검자료와 정 소장의 목격자 녹취파일을 우선 제보하기로 했다. 조 회장은 이제 단순 경제 사범에서 살인 피의자로서 민낯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박 교수는 자료를 USB 메모리에 저장한 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선율은 물었다.
“어디에서 전송할 겁니까? 잘못하면 추적당할 수도 있습니다.”
박 교수는 히죽거리며 말했다.
“세상에 널려있는 게 PC방인데 뭘 걱정합니까? 한 번은 강남에서 다음은 일산에서, 이런 식으로 돌아다니며 자료를 보낸다면 절대 추적하지 못할 겁니다.”
선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스럽게 박 교수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치밀하고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었다. 선율은 잠시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보현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마음이 아팠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무사하셔야 할 텐데!” 선율은 중얼거렸다.
다음 날 장 기자의 부검자료와 정 소장의 사망 당시 목격자의 녹취록이 방송에 공개되었다. 미확인 된 것이라는 멘트가 붙긴 했지만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특히 장 기자의 부검자료는 국과수에 확인한 결과 사실인 것으로 밝혀져 반신반의하던 국민들이 대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경찰의 발표와는 크게 다른 내용이어서 이상히 여긴 검찰에서 조사해보니 경찰이 거짓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조 회장은 회장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방송에는 분노한 국민들이 나와 경찰 관련자를 처벌하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조 회장은 혈압이 오르고 온몸이 얼음처럼 뻣뻣하게 경직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나운서는 제보자가 계속 4차, 5차 자료를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조 회장의 일생의 사업이 모두 날아가게 될 지도 모를 엄청난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박 교수와 윤 선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부하들을 들들 볶아대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그대로 말라죽을 것 같았다.
조 회장은 한 의원을 떠올렸다. 그 만이 이 일을 무마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한 의원 만은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몇 번이고 핸드폰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탄식하며 전화를 걸었다.
“한 의원님. 저 조 회장입니다.”
한 의원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도 조 회장이 어려움에 처해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왜 전화를 했는지도 짐작이 갔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가 전화를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예,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건강하시지요?”
“그럼요. 어제도 18홀을 두 바퀴나 돌았습니다.”
“골프도 잘 치시고 체력이 정말 대단합니다.”
둘은 이런 저런 잡담을 할 뿐 쉽사리 본론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 의원도 초조해져서 손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조바심이 나서 막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조 회장은 한 의원의 말을 막듯 헛기침을 한 후 5~6초 정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한 의원은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을 깨닫고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조 회장은 입을 열었다.
“한 의원님. 이런 부탁은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진심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너무 긴장하시는 것 같군요.”
“미르타워에 대한 방송은 이미 보셨을 겁니다.”
한 의원은 올 것이 왔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시치미를 뚝 떼고 말을 했다.
“예, 보긴 했는데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조 회장은 속에서 슬슬 분노가 끓어올랐다. ‘무슨 소리야?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니.’ 하지만 화를 억누르며 더욱 공손하게 얘기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론도 점점 나빠지고 있고 검찰에서는 확증을 잡은 듯 강하게 들러붙고 있습니다. 한 번 도와주셔야겠습니다.”
“그 정도입니까? 나는 회장님이 일을 분명히 처리하는 사람인줄 알았는데요?”
조 회장은 잠시 말을 끊고 한 의원의 의중을 헤아리다가 입을 열었다.
“말씀 하시는 것을 보니 도와주지 않겠다는 얘기 같습니다.”
“아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의원님. 의원님과 저는 한 몸입니다. 내가 잘 못되면 의원님도 잘못되는 겁니다. 저를 도와주는 게 스스로를 돕는 거란 말입니다.”
한 의원은 현기증이 났다. 조 회장의 말이 맞다. 조 회장이 잘못되면 그 여파는 한 의원에게도 미칠 것이다. 하지만 정치를 한다는 사람이 자꾸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그 이치에서 벗어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한 의원은 올가미에 목이 꽉 걸린 것 같았다. 먹은 것이 가슴에 걸려 아무리 용을 써도 내려가지 않는 것처럼 답답했다. ‘그래, 정치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양심이란 낡은 문패와 다름없어. 녹슬고 다 지워져서 이름도 알아볼 수 없는 문패이지.’ 한 의원은 깊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대통령님께 말씀을 드려주십시오.”
한 의원은 머리가 하얘졌다.
“대통령님에게요? 진심입니까?”
“대통령이 아니라면 이 난국을 풀길이 없어 보입니다. 검찰과 정치권만 막아주시면 됩니다. 그 동안 나는 모든 증거를 없애고 여론을 잠재우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한 의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대통령을 이 흙탕물에 끌어들인단 말인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절대로 대통령께 누가 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의원님. 대통령이 직접 개입하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저 보좌관에게 ‘미르타워 조사에 인권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 라는 식으로 슬쩍 말을 흘리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보좌관들이 다 알아서 할 겁니다. 뭐가 문제가 됩니까?”
하지만 한 의원은 계속 망설였다. 결국은 양심에 관한 문제였다. 대통령은 그의 오랜 죽마고우였다. 조 회장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실질적으로 국회의원이 되게 만들어 준 것은 대통령이었다. 그런 대통령에게 누가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 회장은 한 의원이 머뭇거리자 계속해서 강하게 몰아붙였다.
“의원님. 대통령은 의원님의 오랜 친구이고 우정도 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리 없습니다. 만약 검찰이 움직인다면 의원님이 대통령께 말씀드리지 않은 것으로 알아도 되겠습니까?”
돌려서 말하고 있지만 대통령에게 부탁하지 않는다면 한 의원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협박이었다. 한 의원은 머리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혈압이 오르고 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 의원은 숨을 크게 들여 마신 후 담담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통령께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조 회장은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놈. 네 명줄은 내가 쥐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지.” 그는 핸드폰의 녹음 파일을 열었다. 방금 한 의원과 통화한 내용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조 회장은 빙긋 웃었다. “이로써 잘 하면 대통령까지 내 손에 넣을 수 있겠어.”
미르타워에 대한 제보는 3, 4일 정도의 시차를 두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에 따라 방송과 유튜브에서는 연일 미르타워에 대한 비판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갈수록 여론은 악화되었고 국회에서는 국정조사 얘기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다만 검찰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위축되고 있어서 조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조 회장은 대통령의 입김이 들어간 것으로 생각되어 한 의원에게 고맙다는 전화를 한 후 염 상무를 불렀다.
“어떻게 되고 있어?”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하지만 조금씩 범위가 좁혀지고 있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조 회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무 늦었어. 이제 밝혀질 것은 다 밝혀져서 더 이상 제보할 것도 없을 거야.”
“죄송합니다.”
“그만 해. 이제 그 소리도 하도 들어서 지겨워. 그리고 우리가 심어둔 기자들에게 특종 기사들을 마구 터뜨리라고 해. 연예인이건, 운동선수건 가리지 말고 말이야. 그리고 반대 의견들을 모아서 크게 기사화해. 셀럽들을 모아봐.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여론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봐.”
“알겠습니다.”
“시간이 없어. 검찰에서 소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언제 태도가 바뀔지 몰라. 시간이 있을 때 빨리 증거를 없애고 여론을 돌려놔야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박 교수와 윤 선율을 잡는 데 딱 열흘의 시간을 주겠어. 시간을 넘기게 되면 염 상무, 너도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하게 될 거야. 알겠어?”
조 회장은 사냥감을 앞에 둔 뱀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목을 움츠리며 염 상무를 쏘아보았다. 염 상무는 등골이 오싹해져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조 회장이 살기가 일어날 때 보이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염 상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라고 말한 후 물러나와 곧바로 봉근에게 전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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