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화 구사일생
제 46화 구사일생
눈부시다
잔물결 위의 햇살이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니
눈부시다.
너의 모습은 강물 위를 뛰어다니는
햇살과 다름없구나.
나는 낚싯대를 휘두르지만
물고기를 잡을 생각은 없다.
오로지 너의 모습을 낚으며
강가에 서 있으니 눈부시다.
세월이 흘러 햇살은
강물 따라 바다로 흐르고
그 뒤를 따르는 반짝임이 아련하지만
물속에 숨어 몰래 숨을 쉬는
추억은 여전히 눈부시다.
검게 탄 얼굴과 손마디의 굳은 살
여윈 너에게 등 떠밀려
서럽게 울며 멀리 떠났지만
이제 돌아와 너를 본다.
흙으로 얼룩진 뜨거운 땀은
깊게 파인 주름 사이에 머물고
긴 시간의 노고와 안식이 흰머리에서
햇살처럼 반짝이고 있구나.
사랑하는 그대여 너는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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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회장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공손하게 말했다.
“아, 한 의원님. 어쩐 일이십니까?”
“미안합니다. 바쁘실 텐데 갑자기 연락드렸습니다.”
“한 의원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섭섭합니다.”
“그렇습니까? 하하하. 사실 조금 전 제 딸이 저에게 부탁을 하나 하더군요.”
“영애께서요? 무슨 부탁을 하였습니까?”
한 의원은 망설이는 듯 조금 뜸을 들였다. 조 회장은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의원님. 뭐든지 말씀 하십시오. 의원님의 말씀을 제가 거절한 적 있었나요? 왜 주저하십니까?”
“혹시 선율이라고 윤 변호사의 아들이 그곳에 있나요?”
조 회장은 깜짝 놀랐다. 한 의원이 어떻게 선율이 여기 있는 것을 아는 것일까? 조 회장은 힐끗 윤 변호사를 쏘아보았다. 윤 변호사는 여전히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있었다. ‘여우같은 놈.’ 조 회장은 중얼거린 후 한 의원에게 말했다.
“의원님.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실 조금 문제가 있어서 야단을 치던 중이었습니다. 아들 같은 녀석이라서 말입니다.”
한 의원은 목소리를 깔고 조금 무겁게 말했다.
“선율은 제 사위가 될 사람입니다. 그를 풀어주면 안 되겠습니까?”
조 회장은 말을 멈추고 얼음이 된 듯 우뚝 섰다. 생각이 정지되고 노여움이 치밀어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로 피가 확 몰렸다. 아무리 국회의원이고 차기 유력한 대통령 후보라지만 다 조 회장이 만들어준 것이다.
그런데 그런 자가 내 일에 간섭을 한다? 조 회장은 침을 꿀꺽 삼키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분기를 참고 어떻게든 이성을 찾으려는 모습이었다. 그래 지금은 어쩔 수 없다. 모든 일의 초점은 한 의원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 그의 비위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의원님. 제가 선율에게 무슨 해코지를 한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조 회장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부탁드립니다.”
한 의원은 짧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사람들이 제법 있었지만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선율의 가느다란 신음소리만 크게 울리고 있었다. 조 회장은 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율이 미르타워의 일을 폭로하지 않게 할 수 있어?”
보현은 대답했다.
“절대 회장님께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번에는 네 아들뿐만 아니라 너도 함께 가는 거야. 알겠어?”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염 상무. 장 기자의 자료는 다 회수했지?”
“그렇긴 하지만 보현과 그의 아들을 그대로 놔둔다는 것은 좀······”
“딱 한 번이야. 한 번뿐이라고.”
보현은 안도의 숨을 쉬며 눈물을 흘렸다. 살았다는 생각이 들자 이마가 몹시 쓰라렸다. 머리를 조아리다 바닥에 부딪힌 이마에는 생채기와 함께 파란 멍이 들어있었다. 보현은 제대로 걷지 못하는 선율을 부축해서 밖으로 나오며 말했다.
“우리 그냥 쉽게 살자.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우리는 분노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선율은 보현이 바래다주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홀로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고 옷은 피투성이인 채였다. 보현은 병원으로 가자고 했으나 선율은 강하게 머리를 흔들었다. 집으로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으라고 하였으나 그것도 거절했다.
선율은 통증으로 신음을 토해내며 간신히 오피스텔 앞까지 왔다. 이제 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긴장이 풀어졌다. 그러나 문을 열었을 때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집 안은 한 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엉망이 되어있었다.
책상 서랍은 다 뒤집혀 내용물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옷장의 옷이란 옷은 다 꺼내져 쓰레기처럼 뒹굴고 있었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는 아예 떼어가 버렸다.
선율은 구석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방 안에 널브러져있는 옷과 물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리가 아파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고 입 안은 터져 침에서 피가 섞여 나왔다. 선율은 방 국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국장님. 저 윤 기자입니다.”
“그래. 윤 기자.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저 며칠 휴가를 쓰겠습니다. 몸이 안 좋아서요.”
“그렇게 해. 그런데 별 일 없지? 며칠 사이에 부쩍 자네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어.”
“누가 저를 찾아 왔나요?”
“경찰에서 자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떼어갔어. 막으려고 했지만 영장을 들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 경찰은 장 기자와 관련된 일이라고 하는데 자네의 알리바이는 분명하잖아.”
선율은 누구의 짓인지 짐작이 갔지만 짐짓 모르는 척했다.
“제 컴퓨터를 떼어가요? 무슨 이유로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제가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누가 찾아왔습니까?”
“혹시 박 용준 교수라고 아나? 안반데기 마을에서 만났다고 하는데.”
선율은 잠시 기억을 되짚은 후에 의아해하며 말했다.
“예. 만난 적은 있는데 무슨 일이랍니까?”
“별 얘기는 안 하고 다음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어.”
“알겠습니다.”
“여기는 걱정 말고 푹 쉬어.”
“감사합니다. 국장님.”
선율은 집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통증이 심해 매우 느리게 움직였지만 시간이 흐르자 어느새 점점 구색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대충 정리를 끝낸 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하루를 되짚어 보았다.
장 기자의 죽음과 자신까지 죽을 뻔한 일, 아버지의 애걸하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갔다. 이 모든 일은 결국 미르타워의 부정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미르타워 건설만으로도 막대한 이익이 생길 텐데 그렇게까지 악작같이 부정을 저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얘긴데, 그렇다면 그 많은 돈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선율은 절대 모르는 체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어떻게든 사실을 밝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장 기자도 편히 눈을 감을 것이다. 미르타워 관련 자료는 모두 빼앗겼지만 내용은 머릿속에 다 남아있었다. 자료와 증거는 기억을 되살려 다시 모으면 될 것이다.
선율은 복수의 화신처럼 이를 악 물었으나 선율을 살리느라 비굴한 모습을 보이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서서히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헐벗은 나뭇가지가 기지개를 켜고, 건조한 길에서는 모락모락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 위로 햇살이 춤을 추듯 뛰놀고 있었다. 벌써 문을 활짝 열어놓고 청소하는 상점이 있는가 하면 큰 대야에 봄나물을 잔뜩 담고 장사하러 나온 할머니도 있었다.
운경은 우두커니 서서 창문 밖으로 할머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실 안에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남은 명의 아이들이 빙 둘러앉아 탁자 위의 호접란을 그리고 있었다. 호접란은 꽃이 나비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꽃잎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색도 섞여있어서 그리기가 쉽지 않았다.
갑자기 구름이 걷히며 햇살이 눈을 찌르자 운경은 창문에서 물러나 천천히 아이들이 그리는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무언가 얘기를 하며 지나가다가 한 아이 앞에 우뚝 섰다.
아이의 그림은 스케치만 한 상태였고 드문드문 분홍색과 노란색으로 점을 찍어놓은 것이 다였다. 운경이 가까이 오자 인상을 쓰며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척했지만 애당초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운경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현아. 너는 지금 뭘 하고 있니?”
상현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그림을 그리잖아요.”
“그게 그림을 그리는 거야?”
“그럼 이게 그림이지 뭡니까? 선생님은 그림이 뭔지 몰라요?”
순간 운경은 화가 치밀어 소리를 꽥 질렀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지 몰라서 물어본 것 같아? 다른 친구들은 색칠까지 다 했는데 너는 뭐하고 있는 거냐고?”
상현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운경을 바라보았다. 운경은 한 번도 지금처럼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운경은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상현의 등을 내리쳤다. 상현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지만 운경은 붓을 집어 던졌다. 마치 발작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운경은 상현을 보고 소리쳤다.
“꺼져!”
아이들이 웅성거리자 아이들에게도 크게 소리 질렀다.
“너희들도 다 나가! 꼴도 보기 싫어.”
아이들은 운경의 눈치를 보며 모두 가방을 챙겨서 나갔다. 운경은 우두커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한두 명의 아이들 때문에 감정이 폭발한 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며 머리까지 치솟는 느낌이었다. 적어도 아이들 앞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가슴을 간질이는 것은 점점커지며 몸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데비툼일까?” 운경은 중얼거렸다.
운경은 선율이 보고 싶어서 무의식적으로 스마트 폰을 꺼냈다. 그러나 선뜻 번호가 눌러지지 않았다. 선율이 인혜와 섹스하던 장면이 선하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운경은 크게 머리를 흔들었지만 그 장면은 지워지지 않았다. 인혜의 신음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다시 가슴이 요동치며 분노가 치밀었다. 운경은 화실에 세워져 있는 이젤을 걷어차고 화구를 마구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괴성을 지르고 원숭이처럼 펄쩍펄쩍 뛰고 난 후에야 비로소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운경은 머리가 텅 빈 것 같아 숨을 헐떡이며 의자에 앉았다. 이 상태로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운경은 어머니의 거울을 꺼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운경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음이 가라앉고 한결 편안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있었다. 박 화백에게 지금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자 성장하는 하나의 과정이라 그저 참고 인내해야한다는 말만 하였다.
그러나 데비툼 때문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데비툼에 대해 아는 사람은 선율뿐이다. “선율아!” 운경은 선율의 이름을 부르며 서럽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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