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SS랭크 던전
0.
그 레이드가 계기였어.
난공불락이었던 SS급 던전 레이드.
나는 그때 고작 B급, 그것도 CC셔틀이었어.
다들 무리라 했지.
나도 굳이 따라가고 싶진 않았어.
‘거부권 행사 금지. 의무 레이드 3회’
회사 측이 내민 서류에 딱 쓰여 있는데.
그래도 의무레이드 두 번은 해치웠는데, 마지막이 남았더라.
어쩔 도리가 있나.
입사할 때 서명한 조항인데···
은퇴를 하더라도 퇴직금은 챙겨야지.
도리어 위약금 물고 나면 여윳돈이 없으니까.
하나뿐인 여동생도 아직 시설에 있는데···
둘이서 손가락만 쪽쪽 빨고 살 수는 없잖아.
운명이란 참 짓궂어.
그 날 이후로 던전이라면 학을 떼던 나였는데.
막상 할 수 있는 일도 던전에 가는 거밖엔 없더라고.
세상이 이 꼴인데 먹고 살려면, 하기 싫은 일도 하면서 살아야지.
나만 그런것도 아냐.
다들 어쩔 수 없으니까 버티듯이 사는 거지.
후회되는 일이 있어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한다더라.
거기에만 사로잡히면 될 일도 안 된대.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오를 수 있어도.
강물이 산으로 흐를 순 없는 거잖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이 말이야.
그러니 헛물켜지 말라 이거지.
1.
벌써 세 번째 시도라더라.
SS랭크 레이드.
앞선 두 번의 실패는 ‘탐색전’이래.
이번엔 반드시 성공한다고 장담을 하더라고.
사실 그 말을 믿은건 아니야.
그냥 어쩔 수가 없어서 가게 된 거지.
하도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니까 고작 B급인 나를 차출하더라고.
CC셔틀은 이래봬도 꽤 희귀하니까.
그래도 이번엔 정말 만만의 준비를 했다더라고.
대륙의 강자라는 사람들은 다 모였어.
인류 최강의 전력, S급이라는 사람만 15명은 있었으니까.
쟁쟁하더라고, 성검 롤랑, 정령검사 루시안, 십자군이니 성녀니, 대기업 소속 지원팀에 최강의 길드들까지.
보스는 이런 사람들이 잡는 거고, 어차피 내가 할 일은 그전까지 CC만 잘 걸고, 내 목숨만 챙기면 되는 거지.
근데 SS급 던전이라 그런가.
보스 룸까지 가는 길도 장난 아니더라고.
던전을 그래도 10년은 들락거렸는데, 이렇게 일반 몹부터 어려운 던전은 처음이었어.
이제 눈앞에서 사람들 죽어 나가는 것도 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하마터면 울컥해서 튀어나가 나까지 뒈질 뻔했지 뭐야.
사실 나 따위가 튀어 나가봐야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던전에서 애매한 랭크의 헌터는 ‘소모품’인게 상식이니까.
결국 꾸역꾸역 죽어가면서도, 보스 룸 바로 앞까지는 도착했어.
보스 룸은 그냥 던전보다 몇 배는 위험하기 마련이잖아.
사실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지.
보스한테 내 CC는 먹히지도 않으니까.
2.
애초에 작전이 그랬어.
나를 비롯한 저랭크 헌터들은 보스 룸에서 하수인만 처리하면 빠지는 걸로 얘기가 다 끝났지.
던전 자체가 어려워서 그랬는지 보스 룸은 의외로 무난하더라고.
난다긴다하는 에이스들도 보스 룸에선 실력발휘를 한 것도 있고.
다들 노골적으로 MVP를 노리는 눈치였어.
나는 그런 건 관심도 없었지.
어차피 딜 박을 스킬도 없고, 스치면 죽음이니까.
애초에 보상에 눈 돌아간 불나방이나 초짜 헌터 아니면 누가 MVP를 노려.
뭐 그러니까 나처럼 수준 안 되는 저랭크 헌터는 하수인 처리하고 내보내는 게 작전이었지.
보스가 ‘최후의 발악’을 시전 하기 전에 말이야.
던전 보스들한테는 나름대로 패턴이 있어.
그중에서도 제일 무서운 게 체력이 10% 미만으로 떨어졌을 때 나오는 ‘최후의 발악’이야.
방심하면 고랭크도 그대로 썰려버릴 정도니까.
광역으로 들어오는 최후의 발악을 버티려면, 최고급의 힐러나 서포터도 메인 공략팀만 신경 쓰는 게 당연하지.
우리 같은 쪼렙한테 힐 돌리다가는 공격대가 다 전멸할 거야.
“메인 공략팀만 남고, 나머지는 전원 퇴각한다!”
레이드를 지휘하는 인류 최강의 팔라딘 성검 롤랑이 드디어 명령했을 때, 드디어 살았구나 싶었지.
그런데 내 경험상 퇴각도 막 부산떨면 안 되거든.
그러다가 어그로 튀면, 집 가려다가 그대로 황천길로 빠지는 거지.
그래서 나는 오히려 항상 마지막에 빠져나가는 습관이 있어.
무서워도 제일 안전한 타이밍인 거지.
어차피 공대장도 마지막 사람 나가는 거 보고 딜 쏟아 붓거든.
3.
보스 룸 포털이 바로 눈앞이었어.
푸른 빛의 포털에 발을 딱 올려놓는 순간.
갑자기 온 세상이 회색빛으로 보이더라.
얼마나 허무한지.
이게 죽은 건가 싶더라고.
레이드 하던 놈들이 원망스럽더라.
딜 관리를 얼마나 못했으면, 내가 나가기도 전에 최후의 발악이 터지냐.
‘씨발’
죽으니까 그냥 시간이 멈춘 것 같더라.
몸도 꼼짝을 안 해.
눈알 하나 돌릴 수가 없고, 시끄럽던 소음도 하나도 안 돌리더라고.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간이 흐르기는 하는 걸까 싶었는데,
뭐가 들리더라.
아니, 들린다기보다 머릿속에서 울린달까.
분명 소음은 하나도 안 들리는데도, 선명한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었어.
그러니까... 시스템 메시지나 알림음 같은 느낌?
【인간, 10년 전의 그 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나?】
대뜸 나한테 질문을 하더라고.
매일 꿈에 나오는 그 날을 어떻게 알았는지, 누군지도 모르겠는데, 홀린 듯 대답부터 나오더라.
‘돌아가고 싶어, 신이든 악마든 시스템이든 누구라도 좋으니까.’
‘내 실수를 바로잡고 싶어.’
【좋다. 인간. 나와 계약하는 게 어떤가?】
‘계약···?’
‘어떤 계약이지?’
【나는 인간 자네를 10년 전 그 날로 돌려 보내주겠다. 대신 자네는 나를 해방(解放)시켜주게.】
‘해방? 무엇으로부터? 당신은 누구지?’
【그게 중요한가? 분명 누구라도 좋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누구든 좋아.’
‘계약하지, 나를 10년 전 그 날로 돌려 보내줘. 나는 당신을 해방시키겠어.’
띠링!
《시스템 메시지》
《인간 정시우와 악마 바싸고의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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