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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 오징어

라이더 크로니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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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thepan
작품등록일 :
2022.05.21 12:45
최근연재일 :
2022.08.07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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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1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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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version (1)

DUMMY

1.


터덜터덜 걸어서 회사에 도착했다.


시간은 저녁 10시가 조금 넘었고, 밖에서 불 켜진 사무실들을 살펴보니 오늘도 다행히 몇 명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


우리 사무실은 . . . 아무도 없고.


다시 터덜터덜 걸어 정문 보안대를 통과해서 엘리베이터에 타서 9층을 누른다.


텅 빈 사무실에 들어와서 내 책상 위 불만 켜놓고 자리에 풀석 앉은 다음, 아직 식지 않았길 바라는 맥도날드 봉지를 책상에 조심스레 올려놓았어.


상하이 스파이시 버거 세트 75,000, 맥 너겟 6,000, 해서 거금 81,000 크레딧이 들어간 간만에 내 진수성찬이야.


우선은 자리의 화면을 켜고 그물에 걸린 뉴스피드들을 자동으로 스크롤시킨다.


공짜로 케첩 2개에 살사 소스 하나, 오늘 만난 알바생에게 감사, 간만에 마시는 달달한 콜라 한 잔.


우선은 햄버거를 한 입 먹어보고 감동에 젖어보자.


[Melon Muskat 그룹은 화성 문명 독립을 선언, 지구와 별개로 독자 문명을 시작하겠다고 화성의 유일한 노블 선언]


[북미 대륙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민병단체가 'North American Sheriffs(북미지역 사설 경찰기업)'에 드디어 투항, 민간인 소지 무기 전량 회수 폐기]


요거 두 개가 손님끌기 괜찮은 거리로 보이는데, 아차, 다른 정보사에서 이미 기사를 써버렸네.


쓸만한 아이템 두 개가 바로 날라가는 걸 보고 이제 손에 든 햄버거의 값어치가 천 배 만 배로 늘어가는 것 같다.


[내일 날씨는 아주 맑다가 12시부터 비가 시작, 오후 2시 폭우 최고 강수량 예상, 5시부터 차차 맑아짐]


그냥 사무실에 쌓여있는 햇반 하나 데워먹었으면 오늘 저녁도 공짜였는데.


이미 저질러버린 낭비라면 끝까지 기분이라도 좋아보고 싶어.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무실 안에 없는 사람도 한 번 더 살펴보고, 소심한 마음에 불꺼진 복도도 한 번 더 살펴본 뒤, 화면의 소리를 0에서 80까지로 확 올린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바로 경쾌한 비트의 펑크 락이 사무실을 넘어 복도까지 울려퍼져.


21세기도 아니라 20세기 말에 SEATBELTS라는 그룹이 만든 Want It All Back이란 명곡이다.


공식 해외 뉴스피드들에선 헛탕을 치고 이제는 조심스레 접근도 신경써야할 그림자 세상의 뉴스피드들을 모아보자.


어떻게든 맥 너겟 값이라도 건져 볼려면.


가동시간은 역추적에 걸리지 않기를 바라며 빠듯하게 5초로 잡고 [bot]을 가동시키고 평소의 무사항해 기원 의식을 시작한다.


매니저들 눈치로 북적이는 사무실에서는 두 잔 이상을 못 마시는 값비싼 원두커피를 평소의 두 배는 가득 담아서 진하게 커피를 내려 텀블러에 가득 담아.


모두가 내가 집이라고 부르는 조그만 화장실 딸린 방에서는 누릴 수 없는 사치야.


어떻게든 이 회사에 남아있으면 매일매일 조금이라도 배를 채우고 이 넓은 공간이 다 내 것인양 호사를 누리며 내일을 기대해볼 수 있는 게 지금 내 처지에서는 제일 희망찬 상황이야.


눈을 감고 뜨거운 커피가 입술에 닿을 때까지 조심조심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는 제발, 하며 눈을 뜬다.


여러 곳의 익명 BBS들에서 또 다시 격론이 벌어지고 있어.


최근 눈여겨 보고 있는 사건인데, 약 한 달 전쯤, 무엇을 증명하고 보존하려는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동영상들이 제일 오래된 구식 블럭체인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모두 같은 서명이 되어있는 동일 소스였어.


처음 올라온 동영상들은 예전 '북조선'이라는 나라 시절의 학예회 동영상 같은 것이었어.


깡마른 아이들이 이제는 이름도 잊혀진 예전 북조선의 수령의 이름을 눈빛만 초롱초롱한 채 핏줄이 터질 듯 외치며 율동과 합창과 무용을 선보이고 있었어.


멸망 전인지 후인지 알 수 없는 시간대 속 사람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처절한 모습도 보여.


어떻게 도와주고 싶어도 더 이상 도와줄 수 조차 없는 사람들.


내용은 이미 100년도 전에 찍혔을 법한 화면이지만, 그 포맷이 바로 지금 버전이였단 말이지.


처음 볼 때는 예전의 동영상이니까 새 포맷으로 변환하면서 화질도 전문가급으로 후처리를 했겠거니 했지만, 어딘가의 호기심 많은 이가 VR로 돌려보니, 이게 360도는 아닌데 시야각을 미세하게 조정해야할 정도로 정확하게 안구 시야각과 같더라는거야.


[생체 렌즈]인가 싶었지만, 이 물건은 아직 시장에 풀리지 않았거든.


도대체 이렇게 시대에 맞지도 않고 재미도 없고, 그것도 이미 사라져버린 세상의 영상을 올리는 악취미는 뭔가 하고, 여기저기 사설 BBS의 음모론 호사가들이 출처를 찾는데 열을 올렸지만, 조금씩 밝혀낸 서명자의 위치가 음모가들의 구미를 더욱 당겨내고 있어.


바로 예전 '북조선'의 땅이었던 [VOID]더란 말이야.


예전 '러시아'란 나라에서 만든 [Tsar Bomba 2]가 떨어진 땅이야.


몇 개나 사용됐는지는 아직도 정확하지 않지만.


지금도 높은 방사능으로 국제적으로 접근이 금지된 불모의 땅.


그곳에 사람들이 얼마나 살아남아 지금까지 연명하고 있는지도 일반인은 알 수가 없어.


그런 땅에서 누가 살아남아 이런 최첨단 포맷으로 예전의 '기억'들을 [웹]에 올리고 있다는 걸까.


하물며 [VOID]는 현재 지구상에서 [웹]에 연결되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이러던 중, 딱 일주일 전 새로운 동영상이 같은 서명으로 체인에 등록되었어.


이번 것은 갑자기 배경이 완전히 바뀌어져 있었지.


또 그 완벽한 '안구'의 시야각으로 드넓은 평원을 꽉채운 채 말을 달리는 두 세력의 전투가 펼쳐졌어.


멀미가 날 정도로 흔들리는 화면은 말 위에 타고 칼을 뽑아든 손으로 선두를 가르키며 앞장서고 있는 군단의 지도자 같은 사람의 시야였어.


전에 올라왔던 북조선의 동영상들이 정적인 화면으로 카메라인지 사람의 1인칭 시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면, 이번 영상은 확실한 1인칭 시점으로 눈을 중심으로 한 몸과 사지의 비율이 소름끼칠 정도로 내 팔과 다리처럼 느껴진다.


좌우와 뒤를 돌아보며 보이는 우리 편의 수많은 기수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보여.


이제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보면 우리 편의 왠지 동양적인 갑옷과는 대조적인 유럽풍 갑옷의 기병들이 긴 창을 앞세우고, 일부는 날개처럼 퍼덕이는 깃발 두 개를 꼽고, 땅이 흔들리는 발굽소리와 함께 파도처럼 밀려온다.


양쪽 후방에서 쏘는 듯한 대포탄이 여기저기 터지며 땅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양쪽 세력의 또 여기저기서 총 쏘는 소리도 들려온다.


몇 초 뒤 치킨게임에서 충돌하는 두 저돌적인 바보들처럼 양 세력이 조금도 멈춤 없이 그대로 부딪혀 버리고, 한 순간에 여기저기 흩뿌려지는 피와 살점의 고어에 깜짝 놀라 두 눈을 감으려는 찰나, 짧은 영상은 끊어져버린다.


8초 정도되는 이 짧은 영상의 임장감과 압박감은 역사상 어떤 전쟁영화보다도 더 강렬했어.


특히 그 압도적인 규모와 물량은.


이전의 동영상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BBS들 속 논쟁과 추측과 분석은 아예 별도의 위키채널을 만들 정도였지.


[CG인가? : 아니다]


[이렇게 많은 엑스트라를 어디서 동원한 거지?]


[데이터베이스에 등록 안 된 진짜 옛날의 걸작영화인 거 아냐? : 아니, 이런 영화는 없어]


[창과 칼은 그렇다쳐도 대포와 진짜 총은 어디서 가져온 거야? 영화 속 총싸움에서 화약연기까지도 특수효과인 이 세상에서?]


그러다 곧 모든 논쟁을 끝낼 라이브 피드 하나가 우크라이나 중남부의 '주테 보디' 지역의 주테강 옆 평야에서 3명의 역사광의 설명과 함께 올라온다.


카메라에 잡히는 광경은 바로 문제의 영상의 배경과 같은 장소다.


시간이 그렇게나 흘렀지만 강의 모습과 그 굴곡이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어.


물론 전세계의 밀공급을 책임지는 '우크라이나 대곡창지대'답게 그 중간의 여백은 모두 빼곡히 펼쳐진 밀밭이 메꾸고 있지만.


[어떻게 가능한지는 전혀 설명할 수 없지만, 너희가 본 영상은 17세기, 그러니까 정확히는 1648년에 펼쳐진 '주테 보디 전투'야. 재연이 아니야. 그건 진짜 . . . 카자크-타타르 연합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진짜 전투야. 너희는, 우리는 . . . 진짜 '코삭'과 '훗싸'의 싸움을 본 거라고!]


멘트를 마친 3명의 아마추어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발견에 스스로 절정을 느끼듯 미친 듯이 괴성과 함성을 질러대며 평야를 뛰어다녔지.


[Święte gówno! To była pamięć Bohdana, którą widzieliśmy? (그럼 우리가 본 게 보흐단의 '기억'이란 말이야?)]


덕분에 지구에서 완전히 잊혀졌던 역사와 인물이 검색순위 상위권의 끝머리에 걸릴 만큼 나름 '핫'한 주제가 되어버렸다.


[보흐단 흐멜니츠키]


나도 찾아보게 된 이 남자의 인생은 시련과 고난과 방랑과 배신과 좌절과 성공의 절묘한 매듭과 고리다.


1595년에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약소 귀족으로 태어나 22세에 예수회 대학을 졸업하며 넓은 세상의 과거와 현재를 알고, 폴란드어와 라틴어, 터키어, 타타르어, 불어에 능했던 남자.


17세기 유럽의 강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대상으로 카자크들을 이끌고 일어나 우크라이나에 독립국가를 세운 남자.


이 남자의 독립봉기는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쇄락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된다.


보흐단과 세력다툼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Nobles' Democracy]는 1652년 자신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Liberum Veto]를 발동, 의회를 해산시켰고, 이후 거듭되는 귀족들의 거부권 행사는 연방의 중앙정부를 약화시켜 나가고, 결국 1797년, 연방은 물론 '폴란드'라는 나라가 유럽의 지도에서 사라져 버린다.


자, 그래서, 오늘은 또 어떤 '기억'이 올라와서 다들 시끄러운 거지?


이번에도 고맙게도 안전하게 새로운 포스트를 훔쳐와준 [bot]에게 감사하며, 체인블럭에 방금 전 꽂혔다는 동영상을 틀었어.


대히트를 기록한 주테 보디 전투의 '기억'과 달리 이번에는 어느 평화로운 유럽의 도시 속에서 축제가 펼쳐지고 있어.


이번의 '기억'의 주인도 보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남자의 1인칭 시점으로 갈색 머리의 아가씨와 춤을 추고 있어.


커다란 성 앞의 광장에 사람들이 모두 모여 왜인지 익숙한 민속리듬에 맞추어 짝을 지어 흥겹게 손을 잡고 돌고 있어.


이번 영상도 과거의 얘기임이 분명해.


아직 세상이 평화롭던 시절?


눈앞의 아가씨는 하얀색의 섬세한 레이스가 수 놓아진 흰색 블라우스 위에, 마치 여자 한복의 윗저고리 처럼 생긴 초록색과 갈색의 수가 놓여진 조끼 같은 옷 위에, 역시 같은 무늬의 긴 치마 위에는 또 하얀색의 속이 비치는 앞치마를 덧 입었어.


머리는 두 갈래로 땋아 마지막 꽁지는 빨간색 천으로 큰 리본을 묶었고, 머리에는 꽃들로 덮인 보넷 같은 것을 쓰고 있어.


남자의 손을 잡고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 때 마다 목에 건 빨간색 염주처럼 생긴 목걸이 3개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어.


아가씨의 뒷 배경 오른편에는 흰색의 벽에 밝은 갈색의 지붕을 올린 커다란 건물이, 왼편에는 황동색의 첨탑이 우뚝 솟은 아름다운 성당 건물이 보여.


이제야 생각 났어.


깜짝놀라 SEATBELTS의 펑크 락 Want It All Back 플레이를 멈춘다.


다시 고요해진 사무실 안.


여기가 어딘지 알아.


저 배경의 건물은 '바벨성'.


이 아가씨가 입고 있는 '콘투쉬(폴란드의 전통의상)'.


여기는 크라쿠프야.


동그래진 나의 눈이 책상 위에 올려둔 텀블러를 향한다.


텀블러에 그려진 그림을 내쪽으로 돌리니 내 기억이 맞다는 걸 다시 확인했어.


텀블러에는 폴란드 특유의 앙증맞은 데포르메로 디자인된 [바벨 드래곤]의 풍선과, [크라쿠프 지역의 콘투쉬]를 입고 있는 여자 모델 뒤로, 웅장한 [바벨성]이 서 있고, 그 위에는 축제의 이름이 귀엽고 화려한 폰트로 적혀있어.


[KRAKOW GREAT DRAGON NOBLE FEST]


그리고 한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곳의 '기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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