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도박장 (2)
17화.
집무실은 생각보다 작았다. 두어 명이 앉을 만한 의자와 책상, 그리고 맨 가장자리에 위치한 대형 금고가 집무실의 전부였다.
서진은 먼저 책상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에는 문구류와 푸른 색이 감도는 고글이 들어 있었다.
고글을 들어올려 눈에 가까이 댔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서랍에 집어 넣었다.
특별한 단서가 보이지 않자, 책상 위에 1단으로 세워진 파일철 묶음들을 뒤져보았다.
“사람들 신상명세가 들어있네? 근데 사진이 없어서 이것만으론 살인범이 누군지 모르겠는걸?”
슈가 옆에서 같이 보다가 실망하자, 서진이 말했다.
“살인범은 여기에 없어. 이 신상파일들을 봐봐. 날짜와 요일 옆에 금액이 적혀있잖아? 아무래도 도박빚을 기록해둔 파일같아. ···가만, 어?”
“왜?”
“이 아저씨···. 우리아빠 회사 공장장이었어.”
“그···, 도박 때문에 회사돈 횡령했다는 그 사람?”
“···응. 더 정확히 말하면 회사빚을 갚기 위해 돈을 횡령해서 도박하다 빚까지 진 사람이지.”
진도운. xxxxxx-*******, 010-****-****.
원금: 8000만 원
이자: 복리 월 4%
상환: 4400만 원
연체: 135,289,837원
채무상환비율: 90% 등급: E (악성)
다음 페이지를 넘기니, 진도운이 서명한 것으로 보이는 각서가 나왔다.
[채무이행각서]
진도운. 상기 채무자는 채권자로부터 빌린 금 팔천 만원과 그에 따른 이자(복리 월4%)를 00년 월 까지···.
[신체포기각서]
본인은 심거혁으로부터 팔천 만원을 대출받았으나 약속한 기한까지 채무를 변제하지 못하였으므로, 계약에 따라 담보물로 설정된 주요 장기를 비롯한···.
서진은 파일철에서 진도운의 채무기록과 각서만 빼내어 조심스럽게 접어 백팩 앞 주머니에넣었다.
집무실의 책상에서 어떤 단서도 찾을 수 없자, 둘의 시선은 곧 금고로 향했다. 금고는 다이얼식 잠금장치로 되어 있었는데, 서진의 가슴높이 정도 되는 규모로 꽤 커 보였다.
“이걸 어떻게 열지?”
“아까 서랍 뒤질 때 쪽지 같은 거 안보였어? 금고 번호 같은거···.”
“너 같은면 그런걸 허술하게 서랍에 넣어두겠냐? 저 정도 금고면 비밀번호를 외우고 있을 확률이 높아.”
“우음, 그런가?”
“너 투시 같은거 안돼? 속의 내용물이 뭔지 볼 수 없어?”
“내가 그런건 안된다고 진작에 말했잖아. 공간을 알고, 내용물을 알고 있어야 이동시킬 수 있다고.”
흐음. 서진은 금고를 돌며 이쪽 저쪽을 둘러보다, 측면 구석에 붙어있는 모델명 스티커를 발견했다.
금고 앞에 쪼그려 앉더니 휴대폰으로 스티커에 보이는 모델명을 검색한다.
잠시 후, 해당 금고의 리뷰와 설명 등이 나열된 웹페이지가 나오고, 내부 잠금장치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야, 사진 속에 이 원형 디스크 3개 보이지? 이 디스크마다 홈이 파져 있는데, 다이얼을 돌려서 홈들을 정렬시키면 걸쇠가 그 홈에 들어가게 되어 열리는 구조야. 이해했어?”
“음···, 근데 이걸 왜 나한테 설명해?”
“네가 이 디스크 3개를 이동시켜서 홈을 일정하게 맞춰야 하거든?”
“···? 말이 되는 소릴 해! 직접 눈으로 보지도 못했는데 사진으로만 이걸 어떻게 움직여?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건 움직이는게 아니라 이동시키는 거라고!”
“그래, 이동! 디스크를 요 걸쇠가 내려가는 부분으로 이동시키면 되는거야, 순간적으로! 그러면 홈이 정렬되면서 딱 열리는 거지.”
슈는 서진을 복잡미묘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나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지 마. 나 힘들다고. 그리고 이 능력을 계속 쓰기가 꺼려져.”
“꺼려진다고?”
“그래. 자꾸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지킬박사와 하이드냐? 평소엔 잇슈고 능력 쓰면 무시무시한 마왕으로 변신하는거?”
“그게 아니라···, 뭔가 자꾸 다른 기억이 떠오르면서 내가 사라지고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거 같다고. 성격도. 그리고 감정도!”
“···슈, 잘 들어.”
서진이 두 손으로 슈의 뺨을 감싸며 정면에서 눈을 맞췄다.
“넌 이시우야. 능력을 쓰는 건 너말고 다른 누구가 아니야. 그냥 잊어버렸던 너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해. 그 옛날 기억이 나온다고 이시우가 다른 사람이 될 순 없으니까.”
“···.”
“처음엔 백팩 안에 소지품을 이동시키는 것만 해도 탈진할 정도였어. 근데 지금은 어때? 점점 더 자연스럽고 몸에 익숙해졌다는 거야. 마치 원래 네 것인 것처럼.”
“원래 내 것이라···.”
“그래! 어릴 적부터 넌 되게 특이했잖아! 눈도 그렇지만 그 나이에 바이올린을 그렇게 잘 켰던 것도 그렇고, 공부는 나랑 비슷하게 하면서 시험만 보면 다 맞고, 뭐 그것 때문에 동오한테 찍혔지만···. 어쨌든 넌 특별한 아이라고!”
보드라운 뺨의 촉감을 손으로 느끼며 자신의 얼굴을 점점 더 가까이 슈에게 가져다 대었다.
슈의 크고 동그란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쳐보이고 서로의 코가 닿을 정도로 거리를 좁히자, 슈가 작게 한숨을 쉬며 시선을 피했다.
“···하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 너는 너야. 그리고 네 곁엔 언제나 내가 있으니까. 힘내!”
“···그게 아니라, ···너 입냄새 나. 담배냄새.”
“···.”
빠악.
.
.
“자, 집중해서 한 번에 옮겨 보도록. 제대로 안하면 한 대 더 때려줄 테니까.”
뒤통수를 감싸며 금고 앞에 선 슈가 무언가 중얼거리다, 서진이 건네준 휴대폰 속 사진을 보며 손을 들었다.
으으음.
이익···!
눈을 크게 떴다가, 질끈 감았다가, 온몸을 배배꼬다가 결국 헉헉대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어휴, 안돼! 애초에 보이지도 않는 걸 그렇게 미세하게 조종한다는게 말이 안되지!”
“제대로 한 거 맞아? 움직이는게 아니라 이동한다고 생각해보라고!”
“제대로 했거든? 그만할래, 머리 아프기 시작했어.”
“하여간 엄살은. 야! 사진 속 내용이 실제 금고 내부랑 똑같은데 왜 이걸 못 해?”
“난들 아냐? 애초에 홈과 걸쇠가 딱 들어맞게 이동시키라는 주문이 잘못된 거 아냐? 차라리 디스크를 밖으로 빼내라고 하면 모를까···. 가만, 밖으로 빼 내?”
슈가 손을 들어 금고에 가져다 대자 오른 쪽 눈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잠시 뒤,
쩔그렁.
잠금장치에서 회전하던 디스크 한 개가 밖으로 나와 땅바닥에 떨어졌다.
“···.”
“···!”
순간 멈칫한 서진이 다소 과장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어머머,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진작에 디스크를 밖으로 이동시키라고 했으면 됐는데. 그럼 공간이 완전히 비게 되니, 자동으로 걸쇠가 내려갈 거 아냐?”
“···.”
“아무튼 방법을 알았으니, 이제 두 개 더 빼내면 되겠다, 그치?”
“···.”
“헤헤, 어서 빨리 해 봐.”
오라질 년.
“뭐라고? 너 지금 뭐라 했어?”
“아무말도. 머리 아픈데 조금만 쉬었다 하면 안될까?”
“응, 안돼. 그냥 빨리 하고 쉬어.”
“···.”
“뒤통수 한 대 더 때려줄까? 작고 동글동글한게 손바닥에 착 감기던데.”
슈가 다시 손을 들어올리고 온 몸에 힘을 줬다.
쩔그렁, 쩔그렁.
한 번에 두 개의 디스크가 빠져나오자, 슈가 휘청거렸다. 서진이 뒤에서 부축해주며 슈를 바닥에 앉혔다.
“나, 토할 것 같아···.”
“잘 했으니까, 여기 앉아서 쉬고 있어.”
슈를 앉혀 두고, 금고 앞에 서서 손잡이를 돌리자,
철컹.
금고의 문이 열렸다.
“우···!”
“···우와!”
금고 내부는 두 개의 선반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윗 선반에는 수표와 5만 원권 현금이 다발로 쌓여 있었고, 아래쪽에 호텔 미니바처럼 보이는 검정색의 작은 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손잡이를 당겨 열자, 냉장실이 눈에 들어왔는데, 연구소 실험실에서나 볼 법한 유리 앰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지쳐서 앉아있던 슈가 레몬색 앰플을 가리리며 소리쳤다.
“저거야! 내가 죽기 전에 맞은 티아민 주사!”
“그래? 근데 티아민은 비타민 주사 아냐? 피로회복이나 근육통 완화 같은···. 네가 비타민이라고 알고 맞은 주사는 실제 티아민이 아니라 다른 약이지 않았겠냐? 그냥 단순 비타민 용액이라면 이런 금고에 처박혀 있을리가 없지.”
“맞아. 그걸 맞고 나서 마나가 몸을 돌지 않았다니까. 마나가 몸을 돌지 못하면 지금처럼 물체 이동도 못 시켜. 그러고 보니 지금도 몸이 뻣뻣하네. 힘을 너무 많이 썼어.”
“흐음. 능력자에겐 천적의 물건이네.”
서진이 앰플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다음 앰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앰플은 티아민보다 조금 더 길고 얇은 앰플이었는데, 용액이 검푸른 색을 띄고 있었다.
“이건 뭔지 알겠어?”
“이···, 이건 뭔가 되게 익숙한 느낌인데? 익숙한데 좀 기분이 나쁘다고 해야하나? 혐오감 같은 그런 느낌?”
“그렇다는건, 아는 물건이긴 한데 그닥 너와 맞지 않거나 적개심을 가진 이들의 것이라고 보면 되겠지?”
그 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러 명이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 한쪽에선 낮은 목소리와 다른 쪽에선 고함을 지르는 소리 등 여러 소음들이 불협화음을 이루며 둘의 귓가에 울렸다.
서진은 집무실에서 나와 소음이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그들이 아직 열어보지 않았던, 도박장으로 들어가는 입구 반대편 문이었다.
“내 직감에 따르면 말이지, 저 문을 열면 오후에 네가 목격했던 지하계단과 이어질 것 같아.”
실제로 그 문 너머에서 주고받는 대화가 들리고 있었다. 그 때,
철컥.
철컥철컥!
문고리 돌리는 소리에 서진이 긴장한 얼굴로 순간 멈칫했다. 그러다가 이내 소리를 죽이고 문으로 다가가 반대편에서 이뤄지는 대화 소리를 들었다.
- 팀장님 문 잠겨있는데요? 철문이라 완력으로 열기 힘들 것 같습니다.
- 이런 썅! 우석아, 뭐 지렛대 같은 거 없냐?
- 부수게요? 영장없는 긴급체포 수색이라 나중에 문제될 수 있는거 아시잖아요? 어···, 채 경위님!”
뚜벅뚜벅.
- 선배, 그럼 저는 이만 지구대로 가보겠습니다.
- 그래 채 주임, 아니 수영아, 수고했어.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할게. 일 끝나고 소주나 한 잔 하자.
- 좋죠. 아, 그리고 선배. cctv영상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니까 빨리 찾아보셔야 돼요. 지하실 문이 잠겨 있어서 이건 영장 없으면 힘들 것 같거든요.
- 그래서 내가 이미 조치해 뒀지. 야, 우석아! 영장 친 거 어떻게 됐어?
- 아직 소식이 없어요.
- 우라질, 우리 영감님 이럴 때는 꼭 늑장이지!
- 형님, 이번에는 바로 청구했답니다. 그것도 신청서 직접 들고. 지금 법원이래요.
- 그럼 판사가 미적거리고 있다는 거잖아? 이놈이나 저놈이나, 쯧···. 야, 근데 이 주변에 이상한 개 냄새 나지 않냐?
문에 귀를 대고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서진이 집무실로 돌아와 아직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슈에게 급히 말했다.
“큰일났어! 경찰이 곧 이곳을 수색할 건가봐. 빨리 주변 정리하고 cctv실로 가서 확인하자.”
“···금고 안은?”
“수표 빼고 현금은 가져갈 수 있는 만큼 다 챙겨! 내 깽값하고, 네 사망 위자료라 생각해. 그리고···, 저 앰플도 가져가자. 한 개씩!”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재충전하는 휴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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