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13년 전 (3)
4화.
“어려운 결정 하셨습니다. 김선생님.”
“하핫, 이것 봐요, 권실장. 내가 뭐랬어? 우리 김선생 책임이 뭔지 아는 친구라 했잖아. 김선생, 잘 판단한거야.”
원장실에 들어올 때만 해도 서슬퍼런 노여움이 깃든 얼굴이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펴진 달덩이를 보니 그에게도 뭔가 떨어질 떡고물이 있나보다. 차기 이사장 자리라도 제안받았나?
그럼 이제 딜을 할 차례다.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무리한 요구가 아니면 최대한 들어드리겠습니다.”
“사망진단 후 시신 처리에 대한 모든 권한을 저에게 주셨으면 합니다.”
“···?”
“아니 김선생, 어차피 죽으면 의료 폐기물로 들어가 소각될꺼야. 아기 사체를 왜?”
“제 환자 중에 36주차 조산아가 있는데 매우 위중한 상태입니다. 신장이식이 필요한데 조건이 딱 맞습니다.”
“···그러니까 제왕절개 후 아기가 심장기형으로 사망 판정을 내리면 그 즉시 신장을 김선생 환자에게 이식하겠다는 거지?”
“네. 오늘 혹은 내일 중으로 이식 못 받으면 사망할 겁니다. 그래서 서둘러야 하는데 비공식 이식 수술이기 때문에 병원에서 기록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기조직혈액관리원에서 알면 곤란해집니다.”
“그렇지. 괜히 등록했다가 공여자 신원 파악한다고 들쑤시거나, 뇌사판정 한답시고 시간 보내고···, 또 그리고 나서도 수혜자 우선순위에서 밀리면 골치 아파지니까.
어때요, 권실장. 이정도는 괜찮은거 같은데?”
“흐음···. 글쎄요.”
권실장은 예의 멋스럽게 고정되어 있는 넥타이 카라핀을 만지며 고민하는 듯 보였다.
뭔가 찜찜해 보이는 듯한 표정을 짓자, 오히려 원장이 나를 두둔하기 시작했다.
“권고공 실장님. 지금 그룹 쪽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우리들 얼굴에 오점 하나 남기는 건데, 최소한 생명 살리는 의료인으로서 긍지와 자존심은 지켜줍시다.
막말로 그룹에서 싼 똥 나몰라라해서 우리가 치우는 건데, 그 똥 재활용이라도 해야 의사로서 명분이 설 거 아닙니까?”
솔직히 조금 놀랐다. 원장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늘 상황에 따라 자기 색깔을 바꿔대는 카멜레온인 줄 알았더니···. 그의 별명이 왜 ‘절반’인지 새삼 깨달았다.
원장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권실장은 눈을 살짝 찌푸리더니 조금 과장스럽게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아휴, 그럼요. 우리 선생님들이 이렇게 협조해주시니 그룹의 평판도 나날이 좋아지고 있죠. 이식수술 하자는 걸 반대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수술을 하게 되면 참여할 스탭들이 필요하게 되고, 그러면 목격자들이 많아지니 그게 좀 염려스럽군요.”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나는 서둘러 준비해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 문제는 걱정하실 필요 없을 겁니다. 안과에 요청할 필요없이 제가 신장이식과 망막변증 둘 다 집도할 것이고요.
스탭들도 최소한으로 꾸려서 비밀이 새 나가지 않게 철저히 관리할 겁니다.”
“김선생! 신장은 그렇다쳐도 망막변증은 안과 도움없이 괜찮겠어?”
“해본 적 있습니다. 미국에서 이식외과 전공할 때 혹시 몰라 소아 안구질환과 폐, 심장도 자주 어시로 참여했었습니다. 문제 없을 겁니다.”
원장이 오오 감탄을 자아내는 가운데 권실장은 손에 깍지를 끼며 나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스탭들이 누구인지 제가 미리 좀 알아야겠습니다.”
“이미 아시는 분들입니다. 산부인과 박과장님, 산과 오선생, 그리고 소아 중환자실 소미연 간호사, 그리고 저. 이렇게 네 명입니다.”
“···?”
“지금 제가 언급한 이 분들은 이미 이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박과장님은 마취과와 흉부외과 트리플 보드를 달성하신 분이라 마취를 담당하실 거고요, 산과의 오선생이 저를 어시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소미연 간호사는···.”
나는 탁자에 올려진 물을 한 모금 마시고나서 말을 이었다.
“그녀는 현재 영아환자 담당간호사로서 아기가 하루 빨리 이식 대상자로 선정되길 바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설득하면 그녀는 무조건 동의할 겁니다. 심장질환으로 사망한 아기의 신장을 이식하는 걸로 알게 할 테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치고, 박과장 그 양반이 하겠어요? 간접적이나마 연루되는 건데.”
“이미 사망한 아기의 장기로 다른 생명을 살리자는 계획이니, 설득할 수 있습니다.”
권실장은 가만히 내 계획을 듣더니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시고, 한 가지 더···, 이식 수술이 끝나면 아기 심장 있잖습니까? 사망의 원인으로 기록될···. 그 심장을 저에게 가져다 주십시오.”
이미 죽은 아기 심장은 왜···? 그것도 기형을···.
내 표정에서 의문점을 알아차렸는지 권실장은 눈을 빛내며 이어 말했다.
“뭐 저도 의뢰인에게 증거 하나는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 * *
나는 기본적으로 공리주의가 싫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되는 건 어쩔 수 없다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또 어디있을까?
그 다수의 편에 섰던 사람도 언젠가 소수에 해당될 날이 올 텐데, 그때 억울해하지 않고 깔끔하게 자신을 희생한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리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릴 때가 있다. 어떤 선택을 해도 기분이 더러워지고 손실이 날 수밖에 없는 지금과도 같은 상황 말이다.
그 때 공리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다. 최선이 아니라 단지 차악일 뿐인.
곧 태어날 아기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로 인해 다른 한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것에 애써 양심의 위안을 가져본다.
그래, 이건 변명이다. 더럽고 치졸한 쓰레기의 변명이다.
.
.
.
“내가 왜?”
“아, 선배님!”
“너 많이 능글맞아졌다? 어디서 내 이름을 막 팔고다녀? 죽을래?”
“타이밍 급한거 아셨잖아요. 급하게 둘러 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어요.”
원장실에서 나와 산부인과를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이런 반응이다.
박과장은 자기 연구실 책상을 정리하다 어이없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건 니 사정이고, 내 사정은 인수인계 끝났다는 거야. 오늘 부로 난 이 병원 의사가 아니란 말이지.”
“추원장이 허락했어요. 마취 한 번만 잡아주시고 들어가세요. 어차피 기록에도 안남잖아요.”
“마취과 의사들 전부 코박고 죽었냐? 걔네들 불러.”
“비공식이라 아무나 콜할 수 없는거 아시잖아요? 제발 이거 한 번 만요···.”
“몰라, 나가 봐. 나 짐 싸야 돼.”
“아, 정말!”
안되겠다.
“크흠···, 상철이 형!”
“···?”
“아니···, 이제부터 늘 형이라고 부르라며···. 좀 도와줘요. 애 하나 목숨 살리는 건데, 형님도 그냥 나가는 것보다 이렇게 하고 가는게 병원과의 관계 상 나쁠 것 없잖아요?”
“하···. 새끼, 꼭 이럴 때 써먹을려고···. 어? 너 전화왔다. 전화먼저 받고 얘기해.”
가운 주머니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발견한 듯 전화받기를 권유한다. 액정을 보니 산과 오선생이다.
“네, 오선생님.”
- 김선생님, 방금 전에 제왕절개 수술 끝냈고요. 아기는 기도삽관해서 신생아 중환자실로 보냈습니다.
“벌써요? 이따 새벽에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시작하라고 원장님이 그러셔서요. 마침 남는 수술방도 있었고···.
아기는 오늘부로 공식적으로 37주차입니다. 미숙아 단계를 벗어났다는 의미이죠.
아무튼 원장님한테 얘기 들었습니다. 이식수술 몇 시에 하실 건가요?
흘깃 시계를 보니 저녁 9시를 넘기고 있었다.
“좀 쉬시고 이따 0시 무렵에 하는 게 어떨까요?”
- 네. 그렇게 알겠습니다. 그럼.
휴대폰 통화버튼을 종료하고 박과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 들으셨죠?”
“들을 귀가 있으니 듣기야 들었지.”
“아 형님 제발···.”
“거, 참···. 알았다. 0시라고? 젠장, 집에 가긴 글렀군.”
“감사합니다! 끝나고 제가 쏘겠습니다!”
“지랄···, 수술 준비나 잘해 임마.”
그 때 휴대폰 진동이 다시 울린다. 오늘 당직인 소미연 간호사다.
“네 소 간호사님.”
- 흐윽, 흐윽···. 서..선생···.”
“여보세요? 소 간호사님?”
- 서..선생님, 지금 와보셔야 될 것 같아요.
“무슨 일이죠?”
- 임..임시연 산모 아기···, 아기가 숨을 안쉬어요..흑.
나는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뒤에서 박과장의 뭐라하는 목소리가 들리다가 사라진다. 젠장! 빌어먹을! 기껏 짜 둔 판이 뿌리채 흔들리고 말았다!
* * *
“어떻게 된 거에요?”
나는 단숨에 신생아 중환자실로 뛰어 올라와, 인큐베이터 앞에서 울고 있는 소간호사를 보고 물었다.
“으흑···, 아기 소변이 너무 안나와서···, 아까 선생님이 처방하신대로 이뇨제 주사했는데···, 제가 라식스 대신, 포.. 포타슘 보존성 이뇨제를 주사했어요. 어으.. 죄송해요···.”
눈 앞이 캄캄해진다.
포타슘(칼륨) 보존성 이뇨제는 소듐(나트륨)만을 사용하는 라식스보다 효과가 약하지만 체내 칼륨 이온을 유지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문제는 신장질환을 앓고 있는 미숙아에겐 고칼륨혈증으로 악화될 위험이 크다.
심장박동은 돌아왔으나 그 순간의 쇼크를 아기는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전해질 이상 쇼크로 뇌사.
VIP 아기의 장기를 희생삼아, 임시연 산모 아기를 살려보겠다는 계획이 물건너 갔다.
사실 이식이 성공한다 해도, 생존을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시도조차 하기 전에 이렇게 하늘나라로 갈 줄은 몰랐다. 내가 너무 시간을 끌었나보다.
아기에 대한 미안함을 뒤로하고, 나는 극심한 혼돈과 당황 속에서 관련된 사람들이 하나씩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먼저 지금까지 신장이식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아기의 부모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아기에게 얼마나 미안할까. 그들이 평생 지고갈 상처와 후회가 클수록 내 양심은 더 짓눌릴 것이다.
그리고 소미연 간호사. 명백한 의료과실이다.
똑똑한 그녀였기에 나름대로 해석한 것이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녀는 내 처방을 무시한 셈이 된 것이다.
그동안 해왔던 이력이 있으니 민형사 소송은 병원에서 책임져 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커리어는 여기서 끝이다.
소송의 결과가 어찌됐든, 병원은 세간에 H 의료재단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을 선까지만 그녀를 보호하고, 이후 내칠 것이다.
수간호사는 커녕, 왠만한 중,대형병원에서의 근무는 물 건너 갔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제 막 제왕절개로 태어난 아기. 곧 심장판막 결손으로 판정되어 세상에서 사라질 불쌍한 아기.
아기의 죽음에 유의미한 이유를 들어 나의 행위를 정당화 시키려 하였지만 이제 끝이다.
그리고, 이렇게 상황을 어렵게 만든 H 그룹 권실장, 빌어먹을 검정양복 새끼!
이 새끼에게 복수할 방법 없을까? 그 잘난 면상이 일그러지는 꼴을 꼭 한 번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내 양심에 조금의 가책을 덜어보자 계획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결국 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쓰레기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연인이 되고자 했던 그녀를 과실치사범으로 만들고, 아기의 부모에게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줬으며, 다른 한 아기를 죽였다.
생명을 살려야 할 의사의 이 손으로!!
지금까지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아기. 애초에 박과장처럼 다운을 선언하고 이 판을 떴어야 했다.
아니, 아니다! 신고를 하든 뭘 하든 최소한 살려낼 수 있도록 노력은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소간호사는 이제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한 채 인큐베이터를 잡은 두 손으로 애써 몸을 지탱하며, ‘선생님 이제 아기 어떻게 해요’라며 오열하고 있다.
생각해야 한다!
정신 차려라, 김수만! 분명 길은 있을 것이다.
연인은 아니지만 곧 그렇게 될 수 있을거라 다짐한 그녀를 위해, 그녀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애타게 아기가 살아나기를 바라는 부부를 위해.
그들은 고령인데다 한 번의 유산과 사산으로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다.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까지 생각해야 한다.
모두가 해피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고보니 그 아기, 아직 얼굴도 못봤다.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있는 가운데,
나는 뇌파활동이 멈춘 채 숨만 쉬고 있는 임시연 산모의 아기를 응시하다, 문득 VIP 아기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반대편 침대에 에크모(손상된 심장과 폐의 기능을 대신하게 해주는 장비)에 의지한 채,
가냘픈 숨소리를 내며 누워있는 자그마한 아기가 보였다.
저 에크모만 정지시키면, 아기의 생명은 끝이다.
그 아기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임시연 산모의 뇌사상태인 아기를 쳐다봤다.
두 세 번을 재차 확인한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가느다란 생각의 가닥들이 하나 둘 꼬아지며 또다른 계획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모두가 만족하고 행복해지는 동시에, 저 비정한 H그룹에게 빅엿을 날릴 수 있는 무모한 플랜B가!
“소간호사, 잘 들어요.”
나는 아직도 울고 있는 소간호사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다급히 외쳤다.
“지금 즉시, 저쪽 아기와 임시연 산모 아기의 발찌에 달려있는 이름표를 바꿔요!”
“··· 네?”
“바로 이식 수술 진행합니다.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언제 뒤따라 왔는지 박과장이 숨을 헐떡이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