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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터파수꾼
작품등록일 :
2018.06.19 19:07
최근연재일 :
2018.11.20 01:50
연재수 :
9 회
조회수 :
778
추천수 :
0
글자수 :
39,395

작성
18.06.19 19:13
조회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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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글자
8쪽

소설팔이 소녀

DUMMY

한겨울의 바람은 매웠다. 소녀는 살을 에는 바람에 반쯤 헤진 옷깃을 여미며 한아름 안은 종이 뭉치를 추슬러 올렸다. 손은 이미 감각이 없은지 오래였다. 오늘 따라 종이의 무게가 더 무겁게만 느껴져 팔과 다리에 힘이 빠진 채 휘적휘적대며 느리게 이동하고 있었다.


휘이익, 채찍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멀리서 마차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여러 쌍의 따각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돌 위를 구르는 요란한 바퀴 소리가 무섭게 가까워져 와 소녀는 황급히 길가로 피하다가 그만 신발 한짝이 벗겨졌다.


가까스로 마차에 치일 뻔한 걸 모면하긴 했지만 마차가 지나가고 난 다음 여기저기 꼼꼼히 찾아보았지만 어디로 떨어졌는지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한쪽 발이 맨발인 채로 절름발이처럼 차가운 돌바닥을 걷기 시작했다.


“소설 사세요. 소설 사세요.”


가냘픈 목소리로 외쳐보지만 아무도 소녀에겐 관심이 없었다. 고급 코트를 걸쳐 입은 신사가 지나가길래 소설이 적힌 종이 하나를 들이밀었지만 냉담한 신사는 소녀가 내민 종이를 거칠게 뿌리쳐버렸다. 차가운 바람을 타고 종이가 멀리 날아가버렸다.


소녀는 집에서 눈을 부릅뜨며 종이의 장수를 셀 아버지가 떠올라 황급히 종이를 따라 뛰어갔다. 찬바람이 페부 깊숙이 스며들어와 페를 얼려버리는 것 같았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종이를 따라갔지만 종이는 마을 한켠을 흐르는 하천으로 떨어져버렸다.


소녀는 아버지의 소설이 물에 스며 가라앉는 걸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소녀는 소설을 한 개도 팔지 못했다. 그런 채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하나도 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리기까지 한 걸 알면 아버지는 분명 또 다시 매를 들 거였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아버지가 미쳤다고 했다. 돈벌이는 하지 않고 늘 소설이란 것만 쓴다며 가족이 굶든 말든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댔다. 마을에선 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했을 뿐만 아니라 소설이란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런 걸 읽는 사람도 없었고 관심 있어 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들은 하루 종일 노동하고 먹을 것을 직접 만들거나 혹은 양식 살 돈을 벌었다. 부지런함만이 최고의 미덕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선한 것이었다. 그러지 않는 사람은 자연스레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아마 그 마을에서 그런 사람은 소녀의 아버지뿐인 듯 했다.


마을 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가족이 굶거나 말거나 소녀의 아버지는 소설이란 것만 계속 썼다. 밤이고 낮이고 생각에 잠겨 있거나 펜을 들어 글을 써내려가는 일 밖엔 하지 않았다. 종이를 아껴야 하기 때문에 그는 생각을 더 오래 하는 편이었다. 그건 빈둥거리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런 그를 보고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며 지나쳐가기도 했다. 종이는 비쌌고 늘 모자랐기 때문에 빵을 살 돈으로 종이를 사기도 했다. 그런 걸 볼 때는 소녀 역시도 아버지가 분명 미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굶기를 밥먹듯 하던 어느 날 드디어 아버지는 기쁨에 차서 ‘완성했다!’를 외쳤다. 뭘 완성했다는 것일까? 소녀는 궁금하기만 했다. 얼마 후에 아버지는 글자로 가득 찬 종이 뭉치를 안겨주며 소녀더러 팔아오라고 했다. 이웃 마을에는 배운 사람들이 많으니 분명히 팔릴 것이라며 소녀에게 한 장당 동전 한 닢만 받으라고 했다. 그렇게 소녀는 무거운 종이 뭉치를 들고 소설을 팔러 나서게 되었다.


그래도 가을에는 몇 개 사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냥 소녀가 불쌍해 보인다며 동전을 주고 가는 아주머니도 있었고 ‘소설이라고?’ 호기심을 보이며 돈을 내고 가져가는 사람도 있긴 했다. 그때는 소녀도 신기했다. 소설이라는 게 뭔지 모르지만 이런 걸 돈 주고 사는 사람도 있구나 싶어서 아버지가 꼭 미친것만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겨울이 되자 사람들도 잔뜩 움츠러 들어서 모두들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기도 싫다는 듯 혹은 장갑 낀 손을 휘저으며 귀찮다는 시늉을 하며 바삐 지나쳐가기 바빴다. 벌써 며칠째 소녀는 무거운 종이 뭉치만 들고 집에서 이 마을까지 먼 길을 오가기만 할 뿐 동전 한 닢도 구경 못하고 있었다.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신발이 벗겨진 발은 더 이상 감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미 빨갛게 변한 손에도 감각이 없은 지 오래였다. 소녀는 너무 추웠고 배가 고팠다. 어떤 신사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뒤적이다 성냥 하나를 떨어뜨리고 갔다. 소녀는 그걸 주워 주머니에 넣고 좀 더 “소설 사세요, 소설 사세요.”를 외쳐보다가 그만두었다. 모두들 저녁 먹으러 들어가버리고 거리가 휑해졌기 때문이다.


소녀는 집으로 들어갈 것이 걱정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잃어버린 종이 때문에 아버지가 매를 들 것이 무서워서 집에 돌아가기가 싫었다.


소녀는 어느 집 벽 한켠에 웅크리고 앉았다. 너무나 추워서 손을 호호 불다가 종이 하나를 태울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맞아야 할 매라면 한 장을 잃어버렸다고 하든 두 장을 잃어버렸다고 하든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소녀는 성냥을 그어 종이 하나를 태웠다. 아주 잠깐 온기가 느껴졌다. 곱은 손을 불에 쬐려 했지만 종이 하나는 너무도 쉽게 검은 재로 사그러들었다. 소녀는 종이 뭉치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너무 춥다. 한 장만 더. 딱 한 장만 더.


소녀는 또 다시 성냥을 긋고 종이 하나를 태웠다. 소설은 그렇게 소녀에게 약간의 온기를 주며 또 사그러져 갔다. 그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뭔가 어른거리는 게 있었다. 저게 뭐지? 소녀는 사그러드는 불꽃 속에 어리는 어떤 이미지를 발견하고 뭔지 알아내려 했지만 금방 꺼져 버려서 뭔지 알 수 없었다. 뭐였을까, 궁금해졌다. 헛것을 봤나?


소녀는 또 다시 성냥을 그었다. 소설은 불타면서 어떤 이미지를 띄우고 있었다. 그건 따스했던 한때의 추억. 소녀도 어렴풋이 기억하는 아주 오래 전 어머니가 살아 있었을 때의 따스했던 어느 봄날의 추억이었다. 너무도 그리운 어머니였다. 조그맣게 타오르는 불 속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너무도 따뜻한 느낌이었다. 소녀는 그 이미지가 사그러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불이 꺼지기 전에 서둘러 또 소설 하나를 집어넣었다. 거기에 상냥하고 예쁜 어머니가 있었고 모두가 행복했던 한때가 있었다. 소녀는 아직 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래서 그 소설이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소설이란 것이 그런 행복한 한때를 담고 있는 건가보다 생각하게 됐다. 그 느낌을 놓치기 싫어서 소녀는 계속 소설 종이를 불 속에 넣었다.


꽃이 흐드러지고 벌이 붕붕 날아다니던 봄날, 꽃향기가 스민 따스한 햇살이 넘치고 앳된 얼굴의 어머니는 아직 무서운 표정을 가지기 전의 젊은 아버지와 함께 풀밭에 펼쳐 놓은 담요 위에 앉아 웃고 있다. 아직 어린아이였던 소녀는 나비를 따라 뛰어다니고 있었다. 깔린 담요 위에는 햇살이 그득 내려 앉아 있고 커다란 바구니에는 큼지막한 빵과 여러 가지 과일이 가득했다. 아이가 꺾어 들고 있던 들꽃의 꽃잎을 뜯어 날린다. 꽃잎들이 날려가 사랑이 넘치는 젊은 부부의 뺨을 간질이고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대신 실어 갔다. 아이가 멈춰서 돌아본다. 이유 없이 꺄르륵 웃는다. 하늘을 가리키며 나비를 따라 손짓한다. 세 사람의 웃음소리와 꽃향기가 어우러져 날아다니는 그 봄날은 영원할 것만 같다.


다음날 소녀는 어느 집 벽 한켠에 웅크린 모습으로 차갑게 식은 채 지나가던 사람에게 발견됐다. 소녀 앞에는 다 탄 성냥개비 몇 개와 검은 재의 흔적이 아주 조금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소녀가 소설을 팔던 소녀라는 건 알지 못했다. 다만 소녀의 얼굴에 살짝 어린 미소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짠하게 했을 뿐이다.


작가의말

성냥팔이 소녀가 있다면 소설팔이 소녀도 있을법 해서 .... 글이 안 써질 땐 이런 단편들이 불쑥 튀어나와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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