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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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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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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5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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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9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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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DUMMY

공작이라는 신분임에도 사용인을 자처하여 샤라즈 공작이 새롭게 차를 내려 직접 따라준다.


밖으로 내보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또한 떠올린 자 중 한 명일 것이다.


그의 입은 무겁다. 가볍게 열리는 일은 단연코 없으리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관심을 끄고 루비아는 찻잔을 내려다봤다.


‘향초의 한 종류인가?’


노란빛의 차는 냄새를 보건대, 제법 쓴 맛이지 않을까 싶다.


어딘가 리아와 취향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잔을 들었다. 독의 걱정은 없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거니와, 잘 통하지도 않는다. 왕족들은 거의 모두 독의 내성을 길러두는 편이니.


신종 독의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니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감의 근거는 있었다.


자화자찬은 아니지만, 자신은 공국에선 둘도 없을 존재. 잃는다는 건 나라의 큰 기틀이 무너지는 정도의 크나큰 손실이다. 당연히 노리기 쉽고 간편한 독의 대비는 철저히 해두고 있다.


그 일환으로 [해독]의 아티팩트를 지니고 있었다. 유물급의 아티팩트로, 성능은 꽤 좋은 편이다. 공국에 자리 잡은 해충의 끄나풀들이 처형 전에 잔뜩 실험을 도와주어 검증도 끝난 상태다. 믿을 만은 하다.


‘뭐, 걱정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지만.’


자신들은 리아의 친구들이다. 건드린다는 건 척진다는 의미였고, 엄청난 호의를 내비치던 황제는 절대 리아의 역린을 사려 들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황제는 리아를 알고 있다.


주변인을 건드린다면 어찌 되는지······ 해충이라는 사례도 있는 마당에, 설령 리아를 잘 모른다 한들, 바보가 아닌 한 건드릴 리가 없다.


‘그가 이렇게까지 물렁물렁해질 줄은 몰랐지만.’


이전 자신이 알던 그였어도 물론 건드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에 대해서는 상당히 방향성이 달랐을 거다. 지금처럼 리아에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다는, 그런 사사로운 감정은 일절 없이 오로지 황제로서 냉철하게 제국에 이익이 되는가를 저울에 달았을 터다.


‘사람을 바꿀 정도의 뭔가가 있다는 소리네. 미래인가 하는 것은.’


루비아는 역시나 씁쓸한 차를 목뒤로 넘기면서 슬쩍 찻잔 너머로 주위를 살폈다.


마찬가지로 차를 마시고 있던 라프리트는······ 나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추이를 보려는 건가. 그렇다면 라프리트에게도 지금 이 상황은 예기치 못한 일이었나 봐? 하긴 이딴 것을 어떻게 예측하겠냐마는······’


자신이니 그나마 혹시―― 라며 의심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절대 이 근처엔 생각이 이르지 못 하리라.


다만,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건, 다른 미래의 일을―― 믿기도 힘든 이것을 떠올린 사람이 의외로 너무 많다는 것이다.


라프리트 하나만 있더라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는데. 당최 어떻게 된 건지 진짜 영문을 모르겠다.


‘이것만은 아무리 나라도 예측이 안 돼. 관련자들의 인과관계를 보면 대다수 리아로 집결은 하지만······ 정작 리아 본인은 이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눈치야. 아직 연관을 짓기엔 정보가 부족해.’


물론 리아가 이 일―― 미래에 관련해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충격을 주긴 했다. 어리바리한 리아이기에 더욱.


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리아는 자신이 인정한 몇 안 되는 사람. 최근 친하게 지내는 탓에 그 근본이 어떠한지를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완성―― 인간이란 존재에겐 연이 없을 이 단어를 붙이게 된 최초가 바로 리아이건만.


황제의 말대로 누구보다도 먼저 떠올렸다 한들······ 전혀 위화감을 못 느끼겠다. 되려 격하게 동의 할 수도 있을 거 같다.


지금은······ 그 반짝임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지만.


참 재미있는 녀석과 만났다고 생각하며 루비아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니. 만날 수밖에 없었으려나. 운명······ 그래. 이게 그건가? 뭐, 거창할 거 없이 단순한 인과―― 필연에 불과하지만.’


겨우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신에겐 길고도 긴 시간이었다. 생각을 정리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루비아는 천천히 좌중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시작하기에 앞서······ 폐하, 그걸 줘도 괜찮았던 건가요? 제가 잘못 알고 있던 게 아니라면, 그 위패―― 분명 황제의 대리인을 지칭하는 것이었을 텐데요.”


그렇다. 칼윈이 리아에게 준 건 본인의 권한.


즉, 전권 대리인이었다.


베르그나 레스들이 흠칫 몸을 떨며 놀란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저 위패가 있는 한 리아의 말은 곧 황제의 명. 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제 본인뿐이다.


오늘 처음 일면식을 가진 타국의 사람에게 어느 누가 전권 대리인으로 임명할 거라 예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놀라는 건 당연하다. 정작 리아에겐 아무런 생각이 없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귀족들의 반발이나, 심하면 반란까지도 일으킬 수 있는 일을 저질렀음에도 황제는 느긋하기만 했다.



“가소롭구나, 소베르비아여. 이 짐이 그렇게나 우스웠나?”


······평가를 수정해야겠다.


황제는 느긋한 게 아니었다. 그러긴커녕, 빈틈없이 이쪽에 맞설 준비를 해두었기에 나온 말로였다.


‘여유······였었군, 그래.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쉽게 봤나 봐.’


아주~ 아주 작은, 자존심에 자그마한 흠집이 난 정도였지만, 칼윈 황제는 한 방 먹여준 것에 만족스러운지 즐거운 기척을 흘렸다.



“비젠탈까지 대동하여 화려하게 이목을 끈 건 다름이 아니라, 세인트리안을 고립시키려는 목적이었겠지. ――우리 제국을 이용해서.”


어차피 다 들켰겠다, 루비아는 솔직히 인정하기로 했다.



“삼국의 회담이란 기정사실을 만들어두면 실제야 어떻든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민중들은 사이에선 특히나 더 그렇겠지. 세인트리안에는 여태 쌓인 것들이 있으니. 로즈린느는 보기 좋게 이용당했어.”

“네. 덕분에 일이 편하게 풀렸죠.”

“심안인가······”

“호오. 깊게 떠올렸군요.”

“그렇다. 이전까진 그저 비상한 머리와 뛰어난 정보수집만이 전부인 줄 착각했지만.”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과 만나지 않으려 아등바등 노력했던 것인가. 직접 만난다는 것의 위험성을 알고 있으니.


‘딱히 그런 게 아니더라도 로즈린느―― 꼬맹이의 생각 따위야 뻔했지만.’


하지만 돌연 의문이 생긴다.


과연 칼윈은 ‘언제’ 떠올렸느냐 하는 것이다.


시기상으로 보면 자신이 3살 이후에는 전혀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 그쯤이 아닐까도 싶다. 그렇지만 그의 말에서 유추하자면 그리 오래전에 떠올린 게 아닌 것도 같다.


역시나 아직 정보가 부족하다.


――그리고 심안에 대해 누가 알려줬는가가 궁금하다.


제아무리 다른 미래를 떠올렸다 한들 모르는 건 모른다. 그러나 황제는 알고 있다.


이 말은 어디에선가 정보가 샜다는 건데······ 그게 좀 이상하다.


심안은 비장의 무기. 알려진다면 그 위력이 급감한다. 모르기에 손써볼 수도 없는 막강함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러하니 남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최우선으로 신경을 쓰던 부분이다.


어수룩하게 군 적 따윈 없으며, 심안을 알고 있는 자는 단 3명. 심복인 레딧츠와 리아, 라프리트만이 전부이다. 그 외에는 측근이라 할지라도 전혀 모를 정도로 보안엔 철저히 굴었었다.


정말 어디에서 샜단 말인가.


칼윈에게 물어본다면 빠르게 궁금증이 해결될 것이다. 그렇지만 기껏 아는 척하는 꼴이 들킬 수 있기에 속으로만 삭였다.


대신 자신의 또 다른 무기인 생각을 해보았다.


루비아는 정신을 집중했다.


갖가지의 정보를 축약, 분석하여 새로운 사실에 도달한다. 비록 그것이 또 다른 미래라 할지라도.


가히 신에게 도달했다고 해야 할 지혜의 연찬. 흙발로 성역에 발을 내딛는 이 불경을, 괴이의 영역에 있는 루비아는 어렵지 않게 해내었다.


하여 나온 결론은······


‘나―― 내가 알린 건가.’


스스로도 피곤했나 싶을 정도로―― 미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의구심이 피어오르는 추론이다. 하지만 머리는 이 외엔 없을 거란 의견만을 도출할 뿐이다.


‘생에 처음으로 비상한 머리가 원망스럽네. ······좋아, 다 좋다 치자고. 근데 대체 왜?’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제국과 손을 잡아 세인트리안에 대항한다 치더라도 굳이 알릴 이유가 되지는 않고.


그러나 아무리 온갖 가정을 늘어놓아도 황제가 알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원인을 찾아야만 했다. 자신이 그랬어야만 하는 어떠한 연유를――


‘――응?!’


문득 드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감정은 아니라고, 믿을 수 없다며 부정까지 하였다.


엄청난 혼란에 휩싸인 루비아는 벌떡 일어날 뻔했다. 가까스로 멈출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지만, 경악스러운 심정은 수그러들 기미가 없다.



“리아······”

“루비아 님?”

“아, 아냐.”


라프리트가 묘한 눈치로 쳐다본다. 더불어 황제까지도 꽤 흥미진진한 눈으로 본다. 뒤에 대기하고 있던 샤라즈 공작까지도.


자신답지 않은 실수.


루비아는 차분히 부릅뜬 눈을 되돌리며 감정을 추슬렀다. 하지만 속은 빠르게 생각을 이어 나갔다.


‘하얀 악몽, 최흉의 성인. 그리고 황제의 저 호감······. 확실하겠네. ――어쩜 이리도 어리석을 수가!’


그딴 머저리 같은 짓을 저지르다니. 다들 멀쩡히 달린 머리는 내버려 두고 뭘 했나. 그 미래엔 바보들밖에 없었단 말인가.


쭉쭉 치고 올라오는 두통에 이마를 짚고 싶다. 참지 못하고 탄식을 흘릴 것만 같다.


‘거기에······’


잘도 지켜만 봤거나, 심하면 동참까지 했을 자신이 자꾸만 어른거려 더더욱 두통에 박차를 가했다.


너무나 처참하였기에 마주하기 싫다. 이대로 인정하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싶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이성과 감성. 자신이 둘 중 어느 쪽을 택할지는 너무나 뻔하였다.


그리고 선택받은 이성은 추론엔 이상함이 없다며, 근 99%에 달하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래. 라프리트가 날 적대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나. 푸하하하! 자기애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라니. 본인이 최고라고 외치는 나는······ 응. 실로 끔찍하기 짝이 없네. 정말로······. 그때의 내 주위엔······ 레딧츠 정도밖에 없었으려나.’


원했던 대로 정보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이 얻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안 여느니만 못한 상황이랄까.


루비아는 깊게 숨을 들이셨다.


그러다 문득 정자에서 리아가 패닉을 일으켰던 그때가 떠올랐다.


아니, 실제로는 패닉 따위가 아니다. 당시 리아의 헛소리는 다른 미래와 현재를 겹쳐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마수에게 먹이로 던져주고 싶다거나,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고 말하라는 핀잔은 다른 곳에선 진짜로 있었다는 소리였다.


――실로 멍청한 나 자신에게서 나올 법한 멍청한 줄거리다. 그 장면이 자연스럽게 그려지기까지 한다.


어찌 그런 단편적인 것만을 보고 있었단 말인가, 그때의 자신은. 심안까지 지니고 있으면서도.


기분이 급격히 내려간 루비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여러 의문이 남아있지만 더는 생각하기 싫은 기분이다.



“적이 많을 만도 하네······”

“네?”

“아냐. 미안했어, 여러모로.”


마음을 담아 말하였다. 그때의 자신이었다면 분명 라프리트를 업신여겼을 것이니.


뜬금없는 사과에 라프리트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쑥스러움에 루비아는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입을 열라고 했는데······ 상대가 먼저 선수를 쳤다.



“짐에겐 필요가 없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으니. 오히려 감사를 전해야겠지. 게다가 전부 너의 책임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세인트리안의―― 교황에게도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다.”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황제.


역시······ 지금까지 그린 추론은 틀리지 않았다. 라프리트의 반응도 그렇고.



“후후. 소베르비아여. 설마하니 너의 입에서 사죄가 나올 줄은······ 그때의―― 하얀 악몽의 결의가 네게도 영향을 끼친 모양이군.”

“흐음······ 그리 생각하시게 된 근거라도?”

“음? 하얀 악몽―― 이스피리아와 같이 있지 않나.”

“그저 이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어요.”

“아니. 이전의 너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선택이다. 게다가 상당히 진심으로 그녀를 위하고 있지.”

“······.”


말이 없는 자신을 보며 황제는 진한 웃음을 지었다.



“짐이 이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증거지. ――꽤 사람답게 되지 않았는가, 철혈의 여왕이여.”

“헤에······ 해충의 똘마니인 주제에 좀 건방지지 않으신가요, 황제 폐하~?”


제국으로서는 금기나 다름없는 도발에 여태 침착하니 있던 샤라즈 공작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그러나 정작 가장 많이 화가 났어야 할 황제는 평온했다.


불발로 끝난 것을 확인한 루비아는 혀를 찼다.


‘그리고 여왕은······ 못 들은 것으로 해야겠지. 알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마음과 달리 자신감 가득하여 오라버님들을 제치고 왕좌에 앉았을 꼬락서니가 눈에 선했다.


아무리 질풍노도와 같은 치기 어린 자신이었다지만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치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야 할―― 아니, 다른 미래에서만 남아야 하는 알고 싶지 않은 미래이다.


기대한 것과는 많이 다름에 재차 속으로 혀를 찬 루비아는 살짝 빈정대는 어투로 말하였다.



“제법 성장하셨네요.”

“아니. 짐은 이전과 다를 게 없다. 성장했다고 느끼는 건 단순히 네가 변했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느낀다라······”

“스스로도 이전 자신과의 차이를 실감할 텐데?”

“뭐, 저는 그렇다고 치죠. 하지만 폐하께선 말씀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셨던데, 이 점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네요.”

“짐은 황제다. 제국을 위해 보험을 들어두는 건 지극히도 자연스러운 게 아니더냐.”


보험이란 리아에게 준 그 전권 대리인의 증표이다.


한 방 먹여준 것은 바로 이것이다.


황제는 이를 통해 철두철미하게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뒀다. 이쪽이 찜해놓은 리아를 전권 대리인으로 임명해 오히려 빼내 가려 한다는, 공국의 제안에 정면으로 맞선다는 모습으로 말이다.


제국은 삼국 회담―― 세인트리안을 등지지 않는다는 분명한 어필. 누가 뭐라 하더라도 변명할 수 있는 강력한 명분이 된다.


다만······ 이 행동은 그가 보여온 이념에 반하는 짓이었다.



“이해가 되질 않네요. 지금만치 좋은 기회는 달리 없는데.”

“과연 대단하군. 베르그와 로즈린느를 보낸 것만으로 알아차렸나.”

“단 두 명의 호위만을 붙여 황자와 황손을 국외로 보낸다는 건 여간해선 있을 수 없으니까요. 안전을 위해 빼돌렸다고 볼 수밖에 없죠. 더군다나 리아는 정에 약한 아이. 모른 척 내버리지 않겠지요.”

“쉽게 말하지만 겨우 그것만으로는 도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외에도 나라의 정세나 각종 정보를 해석했기에 도출된 것이겠지. 나쁜 버릇은 여전하구먼. 당연히 이해하고 있을 거란 전제로 설명을 빼먹는 그것이.”

“그렇네요. 설마 이 정도도 모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거든요.”


루비아는 도발하듯 씨익 웃어 보였다. 그걸 따라 황제도 맞불로 진한 미소를 짓는다.


‘별로 재미없네.’


정말로 재미없는 반응이다. 그러나 답은 얻게 됐다.


――다른 미래가 얼마큼의 영향이 있는지를.


하지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인생을 배로 산 것이니. 지금의 황제처럼 상대하기 까다로워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라.


조금 분위기를 달리한 루비아는 물었다.



“서로 간을 재보는 건 여기까지 하죠?”

“좋다. 기왕 모인 시간도 아까우니.”


황제도 동의했겠다, 루비아는 사양하지 않고 들이댔다.



“폐하의 바람은 제국이 세인트리안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게 아닌가요?”

“그렇지. 짐은 오롯이 이를 위해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근데 왜 리아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등의 분란을 조장하시어요.”

“흐음······”


말을 길게 끈 황제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보았다. 그 속엔 뭔갈 이해했다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왜 그런 건지 스스로 알아내도 됐으나 조금 귀찮다. 어차피 편하게 가기로 한 거 바로 묻자.



“왜 그러시죠?”

“네가 떠올린 부분이 적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루비아는 냉정을 가장하여 물었다.



“어찌하여 그리 여기신 건지······ 여쭈어도?”


황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천천히 턱을 괬다. 차분히 쳐다보는 그의 눈은 오늘 중 가장 진지한 빛을 담고 있었다.



“분명 기회가 온 건 맞다. 너도 말했듯 둘도 없을 기회지. 이 적기를 놓친다면 영원히 오지 않을 천운이다.”

“그런데 왜?”

“세인트리안은 절대 약하지 않다. 이번 사태로 창피를 당했지만, 그건 하얀 악몽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알고 있――”

“――아니. 그 진가를 아직 모르고 있다. 그렇기에 네가 많은 걸 떠올리지 못했다고 확신했지.”


납득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황제는 안타깝다는 시선을 보냈다.



“충고한다. 하얀 악몽이 곁에 있는 것에 익숙해지지 마라. 그녀는 틀에서 벗어난 존재―― 세인트리안에서 외쳤던 신언 그대로다. 우리와는 다른 위치에 있지. 그녀를 기준으로 계획을 짰다간 자칫 돌이킬 수 없는 판단을 내릴 것이야.”


자신을 알고 있는 황제가 저리 말하는 것이다.


평소라면 울화가 치밀었을 것임에도 루비아는 가볍게 듣지 않고, 찬찬히, 그가 왜 이런 말을 하였는지를 추측해보았다.



“설마······ 진 적이 있었다고?”

“실로 굉장하군. 이 대화만으로 거기까지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이 말하는 황제.


그에게 부정적인 감정은 없으나, 별로 달갑진 않다. 더군다나 황제는 곧바로 눈을 가늘게 하여 진득이 쳐다본다. 필시 지금까지 연기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겠지.


‘뭐, 의심하더라도 상관은 없어. 이미 엎어진 물이니까.’


황제도 이해하고는 허탈한 웃음소리를 냈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자로군.”

“칭찬은 감사드리죠. 이에 보답하고자, 저도 한 말씀 올려도 되겠는지요?”

“뭔가.”

“폐하가 알고 계신 그때와는 다를 거란 얘깁니다. 이번 일은 폐하가 그리도 흠모하는 리아가 손을 빌려줬으니까요.”


이 말은 극적이었다. 황제는 눈을 크게 뜨고는 체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잔뜩 흥미 어린 기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감출 마음은 아예 있지도 않았다.



“자세히 듣고 싶군. 하얀 악몽이 무얼 해주었는가.”

“[치유]의 술식이에요. 그걸 제공해줬죠.”


다른 것들도 더 있으나, 어찌 나올지 아직 모르는 황제에겐 이야기해 줄 순 없다.


그러나 황제는 이것만으로도 괜찮았는지 허허실실, 얼빠진 얼굴로 웃었다. 정말 리아에 대한 호감도가 높다.



“과연. 그녀에게 [치유] 정도야 숨을 쉬듯 간단한 일이었겠지. 성녀라 불린 적도 있으니. 안 좋게······ 끝난 적도 있지만.”


황제는 잡담하듯 가볍게 이야기하였지만, 이것을 듣던 루비아에겐 아니었다.


‘서, 성녀?! [정화]······라고?! ······리아, 이 계집애. 그 중요한 걸―― 말할 순 없겠구나. 어쨌든 돌아가면 가만 안 둬. 하지만 진짜 별걸 다 할 줄 아네. 꼬맹이 주제에······’


지금은 어떨지 모른다. 그렇지만 본능이랄까. 스스로도 어이가 없지만, 평생 믿지 않았던 예감이 리아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외쳐댔다.


루비아는 그것을 믿었다. 리아는 분명 할 수 있다고.


‘그런데 안 좋게 끝났다고?’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근데 힐끔 쳐다본 황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리아에게 호감도가 천장까지 뚫을 그가 이런다는 건, 지금으로서는 그리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상황. 즉 현재의 리아에겐 오지 않을 미래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궁금하긴 하지만 닥치지도 않을 일에 괜한 힘을 쏟긴 싫다. 미련도 없이 관심을 접어뒀다.


――비록 라프리트의 기색이 이상하더라도 말이다.



“한데, 폐하는 리아가 직접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아예 고려하지도 않으시네요.”

“확실히 그녀가 적극적으로 도와준다면야 세인트리안 따위를 겁낼 이유가 없지. 함께 왔던 자들도 엄청난 존재들이었으니. 승산 같은 건 고려할 가치도 없겠어. 하지만······ 그녀는 참전하지 않는다. 세인트리안도 그녀에게만은 조심할 테니 더욱 그러하겠지. 알고 있지 않은가?”

“네. 만약 당장 전쟁이 난다고 하면 리아는 최선을 다해 이 나라를 뛰쳐나가겠지요. 베르다드에 가서는 그곳의 있는 전원을 보호하면서 농성을 펼치겠죠.”


그래. 그것이 리아다. 느긋하고 다툼을 싫어하는, 한없이 착해빠진 녀석이다.


‘미련하게······’


그딴 꼬맹이이니 전쟁처럼 피 튀기는 일엔 절대로 손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참전하게끔, 황제가 언급한 것처럼 화나게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미쳤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짓을 다른 미래에선 실행에 옮겼겠지······’


평소의 행실 때문에 잘 상상이 안 되지만, 저래 보여도 리아는 대단히도 냉철한 편이다. 적으로 돌린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 미래가 어떻게 됐을지는······ 황제의 호감을 통해 능히 짐작된다.



“뭐죠?”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물으니 신기하게 보던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치 당시를 회상하듯 정확해서 놀랐을 뿐이다. 그리고 비슷한 일로 연이 있었던 자가 너도 만난 가베인이다.”

“아하. 그렇게 된 거군요.”

“이젠 놀랍지도 않군. 솔직히 너만큼은 어지간하면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기분이야.”

“그럼 서로 피곤하지 않게 협력하도록 하죠?”

“그건 거절하도록 하지.”


망설임 없이 단칼에 잘라낸 황제. 그는 진심이었다.


루비아는 눈을 가늘게 했다.



“이유를 들어도 될까요?”

“상황이 다르다는 건 알겠다. 분명 승산은 어느 때보다도 비약적으로 높겠지. 허나, 네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뭐죠?”

“짐의 바람이다. 짐이 바라는 건 세인트리안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게 전부가 아니다. 제국의 진정한 독립이지.”

“딱히······ 대가를 바라진 않습니다만?”

“빚이라는 건 남는다. 어딜 어떻게 봐도 네가 제공할 것들이 훨씬 클 테니. 설령 이겼다 한들 그것들은 주박으로 남아 제국을 옭아맬 것이다. 세인트리안의 도움을 받아 근린을 통합할 수 있었던, ――지금의 제국처럼.”


그리 말하는 황제에게선 노도와 같은 분노와 열화와 같은 갈망이 있었다.



“소베르비아여. 그 눈으로 똑똑히 보거라.”

“······.”

“800년. 무려 800년을 속국으로 지내왔다. 짧게 지낸데다가 영향력도 적었던 공국은 이 비참함을 모른다.”

“······.”

“치욕스러운 과거는 짐의 대에서 끝을 맺는다. 짐은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고, 다시는 이 굴욕을 반복하지 않겠다 다짐했노라.”


굉장한 각오다. 몸이 떨릴 정도로 굳센 의지다. 마음 한편에서는 조금은 칭송해주고 싶은 기분마저도 들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다.


루비아는 어이없음에 대놓고 실소를 터뜨렸다.



“이기지 못하면 암만 위대한 뜻을 품고 있든 말짱 끝인데요? 중대한 사안일수록 황제답게 이성으로 판단하심이 옳을 줄 압니다만?”

“물론 그러하지.”


휙, 황제는 한순간에 분위기를 가볍게 하였다.



“선언했듯 협력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대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역시 그런 거였나요.”


예상했던 말에 덧없음을 느낀 루비아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의를 모두 집어치웠음에도 황제는 끄떡도 없다. 마이페이스를 그대로 유지하며 얄밉게 말할 뿐이었다.



“공국과 벨루디스는 좋을 대로 해라. 제국은 제국대로 알아서 처신할 것이니.”

“혹시······ 얌생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뭐라 해도 좋다. 이것이 짐의―― 네가 충고한 황제로서의 방침일 뿐이다.”

“하아. 마음대로 하시죠. 대신 벨루디스를 찌르는 것 좀 그만두셨으면 하네요. 진짜 번거롭거든요.”

“그렇게 하지. 안 그래도 ‘누군가가’ 방해해 별 이득도 얻지 못하던 참이다.”

“어머나. 안타까운 일이네요.”

“정말 그러하군.”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황제.


그가 이야기한 내용은 간단했다. 세인트리안의 고립에는 동참한다. 하지만 긴밀히 협약하는 일은 없을 것이고, 대충 상황을 봐가며 대응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는 영 좋지 않게 상황이 흘러간다면 발을 뺀다는 소리였다.


참으로 졸렬하기 짝이 없다. 군사 대국이라는 이름이 아깝기만 하다.


‘상정했던 것보다도 까다롭고, 짜증 나네. 지금의 황제는.’


조심하려는 기분은 알겠지만, 도대체 굳이 힘들게 돌아가려고 하는 그 심보를 모르겠다. 게다가 아쉬운 건 양쪽 모두인지라 딱히 위협할 방도가 없다는 점이 더욱 울화를 터지게 했다.


다만, 짜증만 나는 건 아니었다. 얻는 것도 있었는데, 일단 해충들의 전력에 대해선 좀 더 상세히 조사할 필요성을 느낀다. 저 황제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저리 경계할 이유는 없으니.


‘아오!! 빌어먹을 해충들. 대체 지네들만 얼마나 해 처먹은 거야? 귀찮게시리!’


만사가 싫증 난 루비아는 가식 따위는 모두 집어치우기로 했다. 망설임도 없이 방정맞게 테이블 위에 팔을 베고 누웠다.


갑작스러운 변모에 황제와 샤라즈 공작이 놀란다. 그러나 거들떠보지도 않고 엎드린 상태로 고개만을 돌렸다.



“내 볼일은 끝났어. 별 소득은 없었지만. 라프리트, 넌? 계속 조용히 있던데 용건은 없어?”

“아뇨······”

“사양하지 않아도 돼. 이래저래 다 너와 똑같으니까. 그건 보장할게.”


라프리트는 대답 대신 말없이 빤히 쳐다봤다. 품고 있는 마음은 의문이었다.


어떻게 알았느냐 궁금하겠지. 하지만 정보의 중요성을 매우 잘 절감하고 있는 라프리트다. 황제와 공작이 있는 앞에서 묻진 않을 것이다.


‘거기에 내가 떠올린 것인지, 아니면 추측한 것인지 고민하려나. 정답은 후자인데 잘 맞춰봐.’


정확히 생각을 읽은 건 아니지만, 즐긴다는 것은 알아본 라프리트의 눈엔 살며시 분노가 아른거렸다. 당연히 가볍게 웃음으로 넘겼지만.


‘그나저나······ 왜 나만 떠올리지 못했지? 가만 보면 가베인 같은 비중이 적은 놈들도 떠올렸는데, 이 내가 빠진다는 게 좀 묘하네.’


뭔가의 조건이 있어 보인다. 자신에게 걸려있었던 저주와 같이. 단순히 리아와의 친분만이 전부는 아닐 듯싶다.


‘이건 정말 짐작도 안 가네.’


아니, 사실은 얼추 짐작이 간다. 무작위성이 아닌―― 누군가의 의도가 느껴지는 현 상황을 보노라면. 자신답지 않게 마주하지 않으려 회피할 뿐이었다.


‘아아. 찝찝한 하루구나.’


그렇게 한탄하고 있으니 정수리 위, 정면에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용 받지 못하는구먼.”

“쯧.”


이번엔 진짜로 혀를 찬 루비아는 황제를 무시하고, 의욕 없이 침묵을 일관하고 있는 라프리트를 쳐다보았다.



“딱히 할 말이 없다면, 내가 물어도 될까?”

“뭘 말입니까?”

“――너, 왜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거야?”


늘어지는 목소리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습적인 질문.


혹여나 흐트러지는 라프리트를 통해 정보를 얻을까 싶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의도를 읽으려 했다.


신경전 같은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이 기류를 깨는 대답은 엉뚱한 사람에게서 나왔다.



“아니다.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신 말한 것은 황제였다.


루비아는 슬쩍 고개만 그에게로 돌렸다. 너라고만 부르는 자신과 다른 라프리트의 호칭에 조금 불만이 있었으나 그건 넘기기로 했다.



“무슨 소리죠?”

“정말 별로 떠올리지 못했나 보군.”

“됐으니까 말씀이나 해보시죠. 어떻게 라프리트의 움직임도 모르면서 확신하시나요?”

“흠. 주변의 경계는 확실히 해두었나. 여전히 철저하군.”


황제는 힐끔 시선을 올려 레딧츠를 보았다.


‘와. 레딧츠의 정체까지 말해준 거야? 진짜로 사면초가였었나 보네. 있는 패 없는 패, 다 내보일 줄은.’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다른 미래의 상황에 묘한 감탄이 인다.


하지만 생에 첫 당혹으로 물들었을 그때의 자신을 그려보니······ 그다지 즐길 기분은 들지 않는다.


살짝 입술을 내민 루비아는 눈짓으로 황제에게 다음을 말해보라 하였다.


너무나 무례한 짓이었지만 황제는 선뜻 이에 따랐다.



“대충 예상했겠지만, 이 자리에 리벨리타스의 영애가 있다는 사실이 그녀가 행동을 취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항~ 지금이 처음이라는 건가요?”

“그렇다. 이전에도 후작 가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귀족의 모범이라 불리며, 그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주목받거나 하진 않았지. 단 한 번도 없던 일이다. 다른 미래를 떠올리지 않고서야 불가능하지.”

“근데 평가가 꽤 좋으시어요. 겨우 그런 걸로 과하지 않나요?”


황제는 작게 웃었다.



“리벨리타스의 영애야말로 누구보다도 먼저 하얀 악몽의 진가를 알아차린 자이며, 마지막까지 그녀의 유일한 친우였다. 존중해줄 이유로는 충분하지. 거기에 더해 오직 하얀 악몽만을 위해 이 자리에까지 왔다. 그런데 어찌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는가.”


친구를 위해 노력한 건 조금 갸륵하지만, 저 정도까지인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리아 때문에 많은 점수를 받은 게 아닐까.


루비아는 황제를 게슴츠레하게 보았다.



“에이, 됐다.”


그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람.


단숨에 의혹을 접은 루비아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왜 다 알고 있다는 이점을 이 따위로밖에 안 쓴 건지 원······”

“――알아도 쓸 수가 없던 것이다, 소베르비아여. 우린 네가 아니야.”


대꾸를 바란 건 아니었기에 갑자기 들려온 황제의 목소리에 살짝 놀랐다.


루비아는 그에게 설명을 바라는 눈치를 보냈다.



“인과란 복잡한 것이다. 다양한 것들이 얽히고설켜 있지. 당장 눈앞의 것을 피하고자 미래를 바꾼다면 후에 어떤 영향이 돌아올지 모른다.”

“응?”


뜬금없이 인과라니. 이상한 소리를 한다.


한동안 더 누워있으려 했건만 참을 수 없다. 드디어 몸을 일으켜 세운 루비아는 잔뜩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을 했다.


그때였다. 곧바로 깨닫고 말았다.


――황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심각한 표정이 된 라프리트를 보아하니······ 틀리지 않은 듯하다.


‘얼핏 비슷한 이론을 본 적이 있어. 분명 가볍게 던진 돌이 다른 대륙에 커다란 눈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던가 하는 거였지?’


그 이론이 말하고자 한 것은 이해하기 쉽다.


저자 본인은 범인이어서 원인에 따른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비굴한 투정 비슷한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산수와 마찬가지로 정보를 계산할 뿐인 간단한 작업이거늘. 이런 쉬운 것도 못 해서 굳이 논문까지 쓰는 그 어리석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시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자기애가 가득했던 치기 어린 시기의 잔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황제의 말처럼 인과관계란 복잡하다는 걸 안다. 계산하기 쉬운 직선 구조가 아니었다.


너무나도 뻔해 보일지라도 깊게 파고들면 200~300년 가까이 이어져 오는, 혹은 몇 세대에 걸친 깊은 뿌리가 존재할 때도 있다.


그 안에서 특정 행동에 대한 원리를 결정하는 계기―― 나열하기도 힘든 무수한 요인들을 모두 알기란 불가능하다.


――신이 아니고선.


아니. 오대신도 가능할지 솔직히 의문이다.


그러하니 인간은 예측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계산에 필요한 정확한 값을 모르는데 어찌 답을 내겠는가.


라프리트가 지금껏 조심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만큼 무서운 건 달리 없으니······. 미래를 바꾸다 통제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는 것이 저절로 그려진다.


자신이야 곧바로 그 위험성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다.


라프리트를 비롯해 황제나 샤라즈 공작. 이들 전원은 분명 경험을 통해 이를 알았을 것이다.


‘그 중에선 전혀 유쾌하지 않은 결과도 있었겠지. 라프리트는 안네 쪽을 바꾸다 실패했나?’


루비아는 입맛을 다셨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면 정보가 쌓이면 어느 정도는 분석이 가능할 터. 이들이 무얼 바꾸고,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좀 듣고 싶다.


그렇지만······ 차마 묻진 못하겠다.


다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침통한 모습인데 물을 수나 있겠는가. 라프리트가 여태 보여왔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하자.


루비아는 눈치 빠르게 의자를 빼주는 레딧츠의 도움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승맞은 건 질색이니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할게요. 너는 어쩔래?”


라프리트는 일어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폐하, 나름 즐거운 담화였습니다. 오늘 한 말은 꼭 지켜주시고요.”

“그럴 셈이다. 너와는 싸우고 싶지 않으니.”

“예. 믿겠어요. 그러면 실례하도록 할게요.”

“알았다. 편히들 지내거라.”


몸소 문 앞까지 마중을 온 황제에게 예를 보이고는 곧장 다가오는 안내인을 따라갔다.


황제는 모두에게 각자의 방을 준비해줬다. 사실 이것이 기본적인 상식으로, 공주와 최고국빈, 후작 영애가 한방에서 잤던 공국 쪽이 비정상이었다.


그렇다고 제국도 마냥 상식을 지킨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안내역인 기사가 데려온 곳은 황제의 집무실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객실이었기 때문이다.


황성의 중추나 다름없는 이 객실은 본디 최측근이나 머무르게 하는 장소다. 잘도 타국의 주요 인사를 이런 곳에 들였다. 보안에 대한 걱정이나 경계 따윈 전혀 느낄 수 없다.


‘이 정도면 그냥 집착 아니야?’


다시금 느낀 리아의 대한 황제의 호감에 황당해하며 루비아는 몸을 돌려 라프리트를 마주 봤다.



“루비아 님, 편히 쉬십시오.”

“예. 라프리트 양도 잘 쉬시고, 나중에 찾아뵙도록 하죠.”


보는 눈이 있기에 귀족으로서 예를 갖췄다.


인사를 마치고는 다른 대화 없이 그대로 객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소파로 몸을 날렸다.



“크으~~ 의외로 지쳤어.”


루비아는 체통도 없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생각보다도 시원함에 상쾌해지고 있자니, 대충 집어 던진 부채를 정리한 레딧츠가 다가온다.



“왜?”

“원하시던 것은 얻으셨는지?”

“그래. 칼윈이 꺼리지 않고 술술 말해준 덕에 상정했던 것보다도 한참이나 얻어갔지. ――하지만 이런 걸 듣고 싶은 게 아니잖아?”


드러누운 자신을 내려다보는 레딧츠에게 루비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굳은 얼굴로 잠시 고민하던 레딧츠는 마음을 정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프리트 님의 주변을 조사하시라는 건 이 때문이었습니까?”

“응. 내 예상엔 미래를 안다고밖에 결론이 나질 않아서.”

“어떠셨습니까?”

“너도 봤던 대로야. 다른 미래라는 건 실존했었고, 그걸 떠올린 자들도 있지. 아까 집무실에 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리카드에 비젠탈, 베르다드에 온 인디아 주교 일행. 거기에······ 델리안 시조님이랑, 아마 그 양자라던 세스타스도 어쩌면 떠올리지 않았나 싶어.”

“대단히도 많군요.”

“기가 차지? 이딴 괴현상인데 말이야. 후훗.”


이토록 예측하기 어렵다니. 다른 미래의 자신은 이 재밌는 것을 못 느껴봤을 거란 생각에 찌릿하다.



“이스피리아 님은······”

“리아? 음. 알고 있었는데 까먹은 느낌? ――그렇군! 그래. 잊어서야. 잊었기 때문에 완성됐던 리아가 지금처럼 반쪽짜리가 된 거야!”


레딧츠는 무슨 소릴 하는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런 그를 내버려 두고 번뜩 떠오른 생각을 정리하기 바빴다. 덜떨어진 녀석처럼 피식 웃기도 하는 등, 머저리 같이 보임을 알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홀로 자기만의 세상에 있었던 루비아는 마침내 결론을 낼 수 있었다.



“내가 모르는 뭔가의 개입이 있다는 건 확실할 듯하네.”


아직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윤곽선이 잡히질 않는다. 그러나 이 괴현상을 일으킨 원인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다름 아닌 리아에게.


얼떨결에 알아낸 정보에 루비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기다리고 있던 레딧츠에게 시선을 옮겼다.



“미안~ 조금 걸렸지? 그런데 레딧츠, 네 잘못도 있어.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얼른 말하면 되지 뭘 꾸물거리는 거야?”

“역시 당신의 눈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여운을 울리며 말한 레딧츠는 입가를 살짝―― 자신도 손에 꼽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주인이 꼴사나울 수야 없다. 그가 왜 이러는지,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 루비아는 주인답게 같이 입가를 끌어 올렸다.



“다른 미래에서의 저는 여전히 주인님을 모시고 있었습니까?”


겨우 이런 질문을 하지 못해 쩔쩔매다니. 카딜라신디의 수장이었던 자가 한심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잔뜩 매도하는 마음과는 달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자신답지 않게 너무나도 다정한 음색을 띠고 있었다.



“내 옆에 없으면 어디 있겠냐. 죽임을 당할 때까지도 함께 있었을 거야. 근데 모시기엔 조금 힘들었으려나······? 그때의 난 무지하게 땍땍거리는 성격이었을 거거든.”

“더욱 보람찬 일상이었겠군요. 힘들었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좀 취향이 특이하지 않아?”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와 부하들은 약간 기이한 면이 있으니 말이죠.”

“칫. 말만이라도 아니라고 해야지. 이 나를 욕보일 셈이야?”

“면목 없습니다.”


이렇게 시시덕거리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군.


‘전혀 생산적이지도 않고, 불필요하기만 한 이 광경을 다른 미래의 나는 과연 뭐라고 할까?’


이해가 안 된다며 고개를 저을지, 아니면 관심조차 두지 않을지도. 모르긴 해도 지금 자신의 감정을 느낄 일 따윈 없을 것이다.


이 재미난 걸 평생 모르고 산다니.


불쌍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게 같았음에도 조금의 틀어짐으로 전부 달라졌으니 말이다. 단지 주위를 보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삶이 갈린다는 게 불합리하게만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살아간다는 것이겠지. 그러니 사람은―― 살아있는 존재들은 하루하루에 필사적일 테고.’


답지 않게 자신이야말로 오늘따라 청승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징그럽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감정과 기분을 잃지 않게 고이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묻는 말에 루비아는 감정을 지우고 냉철한 공주로 돌아왔다.



“군은 움직일 수 없어. 종장에 이를 때까진 베르다드에 있는 우리만으로 대처해야 할 거야.”

“예. 제 목숨과 맞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아니. 죽으면 안 돼. 그게 최저한의 조건이야. 팔이 잘리든 다리가 잘리든, 설령 심장이 꿰뚫렸어도 기어서 돌아와. 한 명이라도······ 우리 중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걸로 끝이라 생각하고 움직여.”

“전원에게 전달해두겠습니다.”

“응. 부탁해.”


무릎을 꿇고 존명을 표하는 레딧츠를 마지막으로 루비아는 눈을 감았다.



“우리의 적은 해충과 ――제국이야.”


작가의말

와 나비효과 아시는구나! (대충 모두가 아는 bgm)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이번화는 약간 소베르비아의 특별편 같은 느낌이 되었네요 ㅎㅎ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앞으로 소베르비아의 비중은 조금 떨어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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