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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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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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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5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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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쪽

148

DUMMY

“크으으읏! 아파라.”


대검의 옆면에 맞아 날아갔던 운이 자세를 잡자마자 앓는 소리와 함께 거친 숨을 단숨에 토해냈다. 그리고 찌릿 째려본다.



“저기요? 실례지만 전 영웅님의 검을 보고 싶은 겁니다만?!”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의 운.


정말 주절주절 말이 많다. 상대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진 못할망정. 그나마 보는 학생들이 많은지라 말투만은 정중하지만.


‘참으로 배은망덕하구먼.’


덕분에 홈런이라고 외치지도 못했다.


불만족스럽게 된 리아는 풀스윙을 휘두른 듯한 자세를 풀며 삐쭉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고치고는 도발하듯 일부러 밝게 말하였다.



“어머, 빠따 질――흠흠. 후려치기도 엄연히 훌륭한 검술 중에 하나에요. 신관님의 요청에 따라 최대한 실전성을 중시한 겁니다만?”

“아뇨, 아뇨. 저는 분명 그저 지켜본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제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억지로 끌어들인 건 이스피리아 님이십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분명히 ‘갑자기’ 들이닥친 ‘사룡’을 물리친 그 저력을 몸소 체험하고 싶으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

“어라,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거였나요? 그렇다면 죄송하네요. ――하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저희 학생들에게 본보기도 보여주실 겸 어울려줬으면 하네요. 신관님만치 뛰어난 분은 그리 없거든요.”


이렇게나 치켜세워준 것이다. 운도 그리 매정한 인간은 아니니 본인이 끌어모은, 저 기대 가득한 학생들을 저버리진 않겠지.


실제로도 그리모르 못지않은―― 아니, 더욱 뛰어난 실력 탓에 운은 학원 내에서 성기사로 절찬리 착각 당하는 중이다. 신관이라 부르고는 있으나 그건 그저 명목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어쨌거나 타국에서는 보기 힘들다는 성기사의 출현에 구경하러 오는 학생의 수도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특히 그 강함 탓에 한때 성기사단의 단장이 아니냐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었다. 머리 색과 어딘가 가벼운 기색 탓에 금방 사그라들었지만.


게다가 내심 툴툴거리기는 하나 운 본인이 이 대련을 전혀 싫어하지 않고 있다. 처음 권했을 때 눈을 크게 뜨면서도 흥분 어린 안광을 내뿜기도 했으니.


5일 내내 구경만 하던 운을 끌어내 대련한 것도 벌써 일주일째. 싫었었다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거다.


역시나 곧 진지한 얼굴이 된 운이 검을 똑바로 겨눈다.


그것을 보며 리아는 힘을 담아 갔다.


주변엔 피해가 미치지 않게 에르가 결계를 펼쳐놨다. 조금은 세게 나가도 될 것이다.



“그럼, 갑니다?”


그리 말한 리아는 대답도 듣지 않고 운을 향해 육박했다.


깜짝 놀란 운. 그러나 금세 자세를 고치고는 방비하였다. 과연 아까보다 훨씬 빠른데도 이 속도를 따라올 수 있나 보다.


살짝 감탄한 리아는 다시금 크게 대검을 스윙하듯 자세를 잡았다.


조금 전 날려진 게 떠올랐는지 운이 몸을 움찔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차 대검을 휘둘렀다. 자세는 완벽하다. 이번엔 좌중간을 깊숙이 가르는 2루타 내지는 3루타일 것이다.


이를 피할 수단이 운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작이 크기에 뻔히 읽었음에도 말이다.


그만큼 현재 제법 본심을 다하는 상태로, 운으로서는 움직임을 쫓는 게 고작일 것이다.


역시 피하기엔 힘들다는 생각이었는지 다가오는 대검을 보며 운은 검을 왼팔에 붙였다. 아까 날려질 때와 똑같이 검을 방패로 삼아 피해를 최대한 줄일 요량이다. 거기에 더해 이번엔 더욱 충격을 줄일 셈이었는지 슬쩍 몸을 옆으로 뉜다.


전혀 따라오지 못할 줄 알았는데 좀 더 저력이 남아있었나 보다.



“대처도 훌륭하네요.”


솔직하게 치하한 리아는······ 휘두르던 대검을 뚝, 멈췄다.


충격에 대비하고 있던 운은 눈을 부릅떴다. 본인이 낚였다는 것을 깨달은 거다.


하지만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먼저 예상하고 옆으로 몸을 뉘었던 게 독이 되어 운은 균형을 잃는다.


그런 운에게 리아는 발차기를 날렸다.


물론 평범한 발차기는 아니다. 양팔을 벌리고 경쾌한 스텝을 밟는 이것은 소위―― 사커킥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커흑!”


가까스로 운은 오른팔을 땅겨 막아냈다.


그러나 몸이 기울여진 상태로는 힘이 가득 실린 이 왼발 슈팅을 감당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단말마와 함께 오뚝이처럼 반대편으로 세워진 운은 기세를 죽이지 못하고 날아간다. 이와 중 검을 놓지 않은 집념이 조금 대단했다.


이런 모습에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난간에서 구경하고 있던 학생들이 환성을 내질렀다.


리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차는 순간 발끝에 감이 전해져왔다.


――이건 무조건 골인이다.


스스로가 생각해봐도 정말 완벽한 슈팅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골키퍼도 직각으로 오는 이 변칙적인 슛은 감히 막아내지는 못 하리라.


그런 평가를 함과 동시에 빠른 속도로 날아간 운은 골대인 보호막에 당도했다.


그리고 골망이 출렁였다.


아니, 분명 출렁여야만 했는데······ 운이 골망을 흔들기 직전에 에르가 보호막을 없애버렸다.


촤아아악――


길게 흙바닥을 끌며 운은 물수제비를 뜨듯 몇 번의 바운드를 더 하고는 맥없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들고 있던 검은 그 집념이 무색하게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쳐져 자신보다도 더 멀리 날아갔다.



“······.”


적막감이 흐른다.


평소 훈련이 끝나면 구경하던 학생들 사이에서 어색한 기류가 흘렀어도 손뼉만은 쳐주었는데 오늘은 침묵만이 존재했다.


생각 이상으로 처참한 모습에 리아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에르에게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에르는 반짝―― 마치 칭찬을 바라는 듯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칭찬할 마음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되려 잔뜩 핀잔만을 주고 싶어질 뿐이었다.


‘이건 너무하잖아요, 에르!’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조금 심했다. 나중에 꼭 한마디 해주기로 하자.


초조해진 리아는 사라지듯 재빨리 운에게 다가갔다.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제어할 틈이 없었다. 멈춰서자 반동으로 역풍이 불어온다. 하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니 허리까지 오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운의 진단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운의 상태는 심각하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뇌진탕이 일어난 것에 불과했다. 사커킥을 막아낸 오른팔도 조금 부어올랐을 뿐으로, 부기가 가라앉으면 멍이 생기고 끝날 것이다.


애초에 문제가 생길 정도의 힘은 담진 않았으나 꽤 놀랐었던 만큼 크게 안도했다.


혹시 모르니 상처를 전부 치유한 리아는 간이침대―― 길게 만든 [발판]에 운을 올리고는 에르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에르의 곁에서 구경하던 인디아에게 데려갔다.



“화려하게도 해줬는걸?”


역시나 도착하자마자 꺼낸 인디아의 말엔 가시가 돋쳐있었다.



“그, 그게, 우, 운 씨가 제법 튼튼하다 보니······”

“그래? 내가 볼 땐 화풀이 하나 싶었는데. 제법 신나 보이기도 했고.”

“아, 아뇨.”


양심에 찔렸던 리아의 목소리는 매우 작았다. 왜냐하면 실은 인디아의 말대로 스트레스를 풀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신나 보였다는 것도······ 부정하긴 힘들다.


‘그, 그렇지만 나도 당한 게 있었는걸. 조금은 갚아줘도 되잖아.’


하지만 변명과 달리 리아는 게슴츠레하게 내려보는 인디아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하아. 됐어. 얘도 나름 즐거워했으니까. 그렇지만 적당히 화가 풀렸으면 슬슬 얘가 원하는 것도 좀 들어주는 게 어때. 일주일 내내 쥐어패기만 하는 건 좀 불쌍하지 않아?”

“으음······ 조금은 선처하도록 하죠.”


하긴 운의 잘못만은 아닌데 너무 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것도 아닌 듯싶다. 오늘의 사커킥은 유독 셌던 거 같기도 하고. 각종 공 취급했던 건 슬슬 그만둬야 할 거 같다.


그리 생각한 리아는 인디아와 함께 서 있던 면면들을 보았다.


완전히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시선을 마주한 이들에겐 그렇지 않았나 보다. 리블리지는 두 손을 가슴께에 모으고는 뭔가를 결심한 듯 강렬한 눈빛을 보내왔고, 케트로는 무서운 인상이 찡그려져서는 더욱 무섭게 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 아베라는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


오늘만 예외로 빠진 게 아니다. 그녀는 아예 베르다드에 있지 않은 것이다. 아베라, 그녀는 정말 여행을 떠나기 전 인사를 하러 왔던 것인지 다 함께 찾아왔던 그다음 날에 홀로 베르다드에서 떠났다고 한다.


조금이지만 애석하다.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사람만 떠나고 제발 돌아가 줬으면 싶은 사람들만이 남아있다니······


생각 이상의 아쉬움에 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옮겼다. ――자신은 아무 연관이 없다는 양 은근슬쩍 기척을 죽이고는 한 걸음 빠져있는 에르에게.



“에르? 할 말이 있는데요?”

“리아와의 대화는 언제나 환영이지. 그렇지만 아쉽게도 그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아.”


에르답다고 해야 하나, 변명이 아주 청산유수다. 그렇지만 이번엔 반드시 한마디하고 말 것이다.


리아는 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실제로 화가 난 건 아니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중요한 것이다.



“에르, 해도 되는 일과 안 되는――”

“――리아, 손님이 와 있어.”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요! ······응? 근데 손님이요?”

“응. 저기.”


구경꾼들 사이를 가리키는 에르. 손가락질임에도 기품이 넘쳐흘러 전혀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는다.


‘자, 잘생긴 사람은 역시 뭘 해도 멋지구나······’


꽤 치사하다고 생각하면서 리아의 시선은 에르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뻔히 잔소리를 무마하려는 의도는 알았지만, 기껏 언급한 것이니 영 허튼소리는 아니니라.


그리고 그 끝에 있는 인물을 발견한 리아는―― 사라졌다. 한마디 해주려던 것은 완전히 잊고는 제대로 낚여버렸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발견했던 인물의 앞.


어느새 대검도 귀걸이에 집어넣은 리아는 놀라는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고는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아이리스!”

“어, 어머······ 자, 잠시 진정 좀 하세요.”


당혹스러워하며 만류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멈출 순 없었다. 다 떨어져 가던 아이리스 성분을 보충하기 위해 리아는 볼을 마구 비벼댔다.


그렇게 한참 열중하던 리아는······ 문득 강렬한 시선이 느껴져 겨우 멈춰 서게 되었다.



“페리······랑 델리안!”


적당히 아이리스 성분도 보충했겠다, 리아는 곧장 페리랑 델리안에게로 냉큼 다가갔다.



“델리안, 고생이 많으시네요.”


올려다보는 리아에게 델리안은 활짝 핀 미소로 대답을 대신 했다.


마주 웃은 리아는 고개를 내렸다.



“페리도 수고하셨어요.”


그리 말하고는 칭찬도 할 겸 페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그만둬라, 멍청아. 주변을 보란 말이다.》


낑낑거릴 정도로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마다하는 페리.


그런 이상한 모습에 고개를 갸웃한 리아는 여전히 턱과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구경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몽땅 몰려있었는데, 그 중앙엔 자신과 아이리스들, 그리고 5명의 여자아이가 있었다.


‘응? 5명?’



“아이리스? 곁에 있는 분들······ 혹시 다과회나 같이 식사했다던 그분들이니?”

“맞아요. 제 친구들이에요.”

“오호?”


소문만 무성했던――혹은 의심만 가득했던―― 여자친구들의 등장. 꼭 보고 싶었던 리아는 눈을 번뜩이고는 얼른 페리를 내버려 두고 몸을 돌렸다.


아들을 교우관계를 확인하는 것도 엄마의 일.


리아는 친절한 미소를 매단 한편, 눈빛만은 예리하게 하여 빈틈없이 상대를 관찰했다.



“다들 이렇게 만나서 반가워요. 이스피리아라고 해요. 우리 아이리스의 친구들이라고요?”

“정중한 인사, 감사드립니다.”


귀티가 나는 선두의 아이가 대표로 말을 받으며 인사를 하자 바로 옆에 있던 3명의 아이도 따라 예를 보였다. 다들 자세가 깔끔하고 익숙해 보이는데 상당한 집안의 아이이지 않을까 싶다.


한 박자 느리게 허둥지둥 예를 표하는 아이도 있었는데, 이 아이는 혼자만 조금 떨어진데다 자세 또한 어색했다.


‘저 아이는 왠지 친밀감이 느껴지네.’


귀족이라는 상위 계층과는 연이 없었던 리아로서는 저쪽이 훨씬 정감이 갔다.


‘게다가――’


슬쩍 옆에서 낮게 우는 페리를 쳐다봤다.


아무 의미 없이 운 게 아니었다. 페리는 저 아이에게 말한 것이었다. ‘쭈뼛대지 마라, 계집’이라고.


말투는 거칠지만, 나름의 응원을 한 거다.


어지간하면 저러지 않을 성격 나쁜 페리이다 보니 리아는 호의와 더불어 약간의 호기심도 생겨났다.


그래서 잠시 대화를 나눠보려 했으나, 먼저 아이리스의 말이 들려왔다.



“죄송한데······ 인사는 다음 기회에 해도 될까요? 이제 강의를 들으러 가야 해서요.”

“강의? 어라, 남은 수업이 있었니?”

“네. 1학기 시간표랑 착각했죠?”

“엇?!”


머릿속에서 천둥이 친 리아. 빠르게 기억을 더듬으니 확실히 아이리스의 2학기 시간표에는 10분 후에 마법의 기초이론이란 강의가 있었다.


매번 그렇지만 아들과 함께하는 식사에 너무 들떴다.


리아는 풀이 죽었으나 이는 아주 잠시로, 금세 희희낙락 밝아지고는 아이리스에게 달려들 듯 껴안았다.



“크으······ 어쩜 이리 착할꼬. 일부러 알려주러 오고. 정말 누구 아들인지 엄마의 얼굴이 보고 싶네.”

“누구 아들이긴요. 그보다 이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톡톡 등을 두들기는 아이리스의 말에 리아는 정신을 차렸다.



“아, 그렇지 참! 어서 수업 들으러 가렴. 여러분들도 같이 와줘서 고마워요. 이번엔 기회가 안 됐지만, 주말이라도 괜찮으니 꼭 놀러 와요. 그때 제대로 인사를 나누죠.”

“예.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또다시 선두에 있는 아이를 따라 다음에 뵙겠다며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아까 쭈뼛댔던 아이―― 페리가 응원한 아이도 어설프게 아이들을 따라 하고는 다 함께 훈련장에서 빠져나갔다.


조용히 따라가는 페리와 델리안에게 잘 부탁한다고 전하고는 배웅했다.


격렬하게 손을 흔들던 리아는 아이리스들의 모습이 사라진 건물의 모서리를 아쉽게 쳐다보며 손을 내렸다.



“너, 진짜 유유자적 태평하게 사는구나?”


잔뜩 여운을 느끼고 있건만.


리아는 모처럼의 흥을 깬 인디아를 째려봤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풀고는 능글맞게 입꼬리를 올렸다.



“주교님들만 할까요? 할 일도 없이 학원에 머물면서 빈둥대시잖아요? 팔자도 좋네요.”

“큭.”


한 방 먹여준 리아는 분해 보이는 인디아가 땍땍거릴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바로 걸음을 옮겼다.


향한 곳은 난간에서 학생들과 함께 있던 그리모르로, 그는 앞서 대련한 운과의 일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선생님도 대련하실래요?”

“아니. 오늘은 참도록 하지.”


그리모르는 자신의 뒤를 엄지로 가리켰다.


거기엔 설레는 듯한 얼굴인 고등부의 학생들이 즐비했다.


그렇다. 정말 황당하달까, 대범하게도 그리모르는 무려 본인의 수업 중임에도 학생들을 전원 이끌고 찾아온 것이었다.


엄연한 직무 유기. 수업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리모르는 뇌까지 근육은 아니었던지, 견문을 넓힌다는 핑계를 대고 이 자리에 왔다. 의외로 약았다.


‘감봉이 걱정되긴 하지만······ 다들 좋아하니 됐나. 어차피 내 일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학생들에게서 거친 야유가 튀어나왔다.



“우우! 도망쳤다.”

“추하다~! 내빼지 말라!”

“신관님이 처참히 당하는 걸 보고 쫀다니 꼴불견이다!”


그 외에도 빨리 가서 걸레짝이 되라는 둥 저주에 가까운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러한 외침에 다른 학생들은 열렬히 환호하였다.


이윽고 이구동성으로 싸워라를 연호하는 학생들.


······정말 인기가 좋은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래 가진 않아, 그리모르가 살기를 내뿜으니 그런 일은 없었다는 양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잠시 황당하게 보던 리아는 조심스럽게 치마를 정리하여 쪼그려 앉았다.


오늘은 이른 시간인지라 자주 찾아오던 레스도 없다. 아이리스와의 점심 약속도 깨졌고 하니 대화나 나누기로 하자. 다만······ 왜인지 주변에서 술렁거린다.


신경이 쓰였지만 리아는 피식 웃는 그리모르에게 말을 걸었다.



“매번······ 살기로 해결하시네요.”

“이게 직방이거든.”

“그, 그런가요.”

“어. 편하고 좋잖아. 뭐, 아가씨에겐 귀엽게 보이겠지만.”

“아뇨. 저도 움찔하긴 해요. 단지 선생님보다 훨씬 강렬한 살기를 맞아본 기억 때문에 무덤덤해진 거죠.”

“헤에~ 필시 엄청난 놈이었겠구먼.”

“네. 정말······ 진짜 굉장한 분이거든요.”


뼈있는 말에 아주 미세하게 에르가 움찔했다.


그 모습이 재밌었던 리아는 쿡쿡 웃고는 슬쩍 그리모르가 데리고 온 학생들을 쳐다봤다.



“그런데 어째 수강한 분들이 늘지 않았어요?”


그리모르는 여전히 검술 기초를 담당한다고 들었건만. 분명 인기가 없을 기초 수업이 왜 2학기에 늘어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도 거의 3배에 가깝게.



“왜긴 왜겠어. 아가씨가 거쳐 간 수업이니 너도나도 들으려고 온 거지.”

“엑? 저요?”

“그거 말고 뭐가 있겠냐. 대부분이 드래곤 슬레이어인 아가씨를 동경해서 반쯤 호기심으로 수강한 거야.”

“······.”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깜짝 놀란 리아는 드래곤 슬레이어란 오명도 정정하려 들지도 못했다. 대신 힐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반짝반짝.


바로 원위치시켰다.


‘부······부담스러워!!’


특히나 그리모르와의 대화가 들렸을 앞자리는 더더욱 기대 어린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보내왔다.


덕분에―― 조금도, 정말 눈곱만큼도 없었던 책임감이 생겨났다.


‘그야 선생님의 수업······ 수수하잖아.’


자신 때문에 수강을 신청했는데 하는 거라고는 지루한 설명과 시범, 단조로운 반복뿐이다.


반복 연습이 중요하다는 건 알고 그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도 알지만, 솔직히 말해서 재미라곤 하나도 없다. 학생들은 분명 실망할 거다.


그리고 그 실망감이 어디로 향하겠는가.


――꿀꺽.


갑자기 의욕이 불태워진 리아는 희번덕 안광을 뿌리며 그리모르에게 물었다.



“서, 선생님. 수업이요! 대련은 왜 안 하는 거예요? 저 때도 첫날 이후로는 한 적이 없잖아요.”

“갑자기 뜬금없는 걸 묻네.”

“됐고, 알려나 주세요!”

“어, 응.”


기세에 밀린 그리모르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격투술 수업은 거의 귀족이 안 듣긴 하지만 가끔 있기는 하잖아? 제2 왕자님이라든가.”

“쉽게 말해, 높으신 분들도 있으니 위험한 건 안 된다는 거죠?”

“그렇지. 딱히 신분이 아니더라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니까. 나쁜 마음 먹는 놈들이 나올 수도 있고.”

“응? 그럼 첫날에 실력 체크라며 했던 대련은 뭐에요?”

“······.”

“선생님?”


그리모르는 몸을 움찔 떨었다.



“설마······”

“아, 아냐! 아가씨나 조, 조금 눈에 띄는 녀석들이 있길래 잠깐 살펴봤을 뿐이야. ――그리고 그 일은 이미 끝났어. 감봉으로······”

“······순전히 자업자득이지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도록 하죠.”


당시를 떠올린 것인지 쓰디쓴 신음이 새어 나온다.


그의 심정을 절실히 공감할 수 있었던 리아는 한동안 애석한 마음으로 위로했다.


‘직장인들에게 감봉이란 피를 삼키는 기분이니.’



“선생님, 그럼 대련은 아예 못하는 건가요? 실력 향상엔 솔직히 그만한 게 없잖아요.”


자신 또한 이를 세스와의 일전으로 똑똑히 체험했었다. 그전까진 반신반의했지만.



“아. 서로 다치지 않게 대련하려면 실력 차이가 압도적으로 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가.”

“그것도 그렇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

“어떤 거요?”


그리모르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인디아를 보았다. 그러고는 대놓고 들으라는 듯 말하였다.



“다치면 [치유]가 필요하잖아. 근데 [치유] 한 번은 정말 무지하게 비싸거든. 중태일수록 더욱. 아무리 학원 재정이 넉넉하다지만 하나하나 [치유]했다간 금방 거덜 날 거야. 그런데다가 기껏 비싼 돈 주고 불러봤자 [치유]할 수 있는 횟수조차 턱없이 부족하지.”

“헤에······”

“우리도 학생들에겐 최고의 교육을 베풀고 싶은 거야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런데 파견 나온 치유사는 값에 비해 형편없는 데다, 듣던 거와 달리 이~리도 비쌀 거라고는 예상도 못 했지 뭐야.”

“들었던 비용은 얼마셨는데요?”

“원동화 5장이었던가······? 중상이라면 원은화 1장까지도 간다고 했지만.”

“실제는요?”

“경상만으로도 원금화를 달라고 하더군. 욕심 많은 녀석은 당당하게 주금화까지 요구하기도 해.”

“백배에서 천배라······ 폭리도 그런 폭리가 없네요. 중상은······ 말할 것도 없겠어요.”


대화를 일단락한 리아는 능글맞은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덩달아 학생들의 시선도 따라 움직인다.


이야기의 맥락을 알아차리고서는 어물쩍 자리를 벗어나려 했던 인디아는 무수히 꽂히는 시선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뒷모습을 보며 리아는 일부러 크게 말하였다.



“그러나 신님께선 이를 알고 바로 잡으시려 했나 보네요. 때마침 인도의 주교님이 이곳에 계신 게 바로 그 뜻이 아니겠나요?”


무얼 하려는지를 눈치챘는지 그리모르도 능글맞게―― 하지만 눈빛만큼은 차갑게 하여 맞장구를 쳤다.



“과연 신의 인도이기에 인도의 주교님이 오셨다는 거로군. 어려운 이웃을 도우라는 교리를 저버린 사제 및 신관들을 바로 잡기 위해.”

“그렇겠죠. 루시아스 님을 모시는 ‘주교’님이신데. 잠시 마가 낀 신도들을 자~알 인도하시겠죠. 그렇지 않나요, 인디아 빌 쿠리스리움 ‘주교’님?”


주교를 계속해서 강조하는 리아. 그리고 진한 미소를 유지 중인 그리모르.


더불어 치유사들의 만행은 공공연한 비밀인지 지켜보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긴장감이 흘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주교를 이렇게 대놓고 압박하는 게 신기했던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흥미진진하니 보고 있었다.


이러한 시선들이 거북했나, 인디아는 작게 헛기침하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배움에 터인 베르다드에서 그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 줄이야.”

“――실례지만 베르다드 뿐만이 아니유, 주교님. 벨루디스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지요.”


말을 자르고 끼어든 그리모르는 일어서고 살짝 머리를 숙였다.



“베르다드에서 선생을 하는 그리모르요.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하게 됐슈. 그리고 말투가 나쁜 건 전직 모험가였던지라 그런 거니 이해해주쇼.”

“진실을 전했을 뿐인데 사과할 게 뭐가 있겠나. 오히려 성국의 추태를 낱낱이 전해주어 나야말로 감사할 따름이지. 게다가 고명한 모험가인 귀공을 만날 수 있음에 크게 감격했다네. 말투 따위야 아무래도 좋을 만큼.”

“주교님이 날 다 알고 그것참 영광이로구먼. 그래서······ 어떻슈?”

“당연히 사건의 전모를 조사한 뒤 시정하도록 하겠네. 교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여유롭게 인디아는 대답했지만 리아는 알아볼 수 있었다. 입가에 걸린 저 미소가 매우 딱딱하다는 것을.


‘진짜 시정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의 견제는 됐으려나?’


쓸데없는 일을 하여 루비아가 맡은 일을 방해한 게 아닌가도 싶지만 좋은 게 좋은 거겠지. 큰 문제가 될 거 같진 않다.


뜻밖의 얻은 확실한 답변에 놀라는 학생들을 뒤로하고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수업요. 아직 안 끝났죠?”

“어. 한 30분 남았지.”

“······월급 도둑이 여기 있었네.”

“뭐?”

“아뇨, 태평하시다고요. 또 감봉되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요.”

“윽.”

“그보다 어차피 시간이 남은 거 대련해보는 게 어때요?”

“아가씨랑?”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학생분들끼리요.”

“흠. 그렇군······ 모처럼 치유사를 확보했으니 나쁘지 않아. 기초반이라 크게 다치지도 않을 테니 시범적으로 해봐도 되겠지. 하지만······ 지금 치유사를 부르러 가면 수업이 끝날 때쯤이나 도착할 거야. 아쉽지만 다음 수업에나 해야겠지.”

“어라라.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치유사는 이미 와 있잖아요?”

“응? 와 있다고?”

“네.”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그리모르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드디어 깨달았는지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찾았다.



“주교님들이 아녜요. 뭐어, 1급 신관님들뿐이니 이해는 하지만.”

“그러면 누굴 말하는 거야?”

“누구긴요. 저죠.”

“아가씨? 아아, 맞아. 그러고 보니 아가씨 [치유] 엄청나게 잘 썼었지. 매번 신세를 졌는데 까먹고 있었네. 그런데 괜찮겠어?”

“문제없어요.”

“하긴 반년 내내 [치유]를 계속 썼다고도 했으니 괜찮을지도. 그렇지만 만약을 위해서 확인할게. [치유]가 가능한 범위는 어떻게 돼?”


학생들이 걸려서 그런지 본인 때와는 달리 꽤 꼼꼼히 확인한다.



“으음······ 신체의 절단이나 주요 장기의 손실까지는 일단 가능해요. 제대로 치유한 전적도 있으니 의심하지 않으셔도 돼요.”

“의심 따윈 안 하지만······ 그거 죽지만 않으면 살릴 수 있단 소리아냐? 참고로 가장 난항이었던 [치유]는?”

“각종 주요 장기들의 태반이 소실 및 온갖 근육, 신경, 인대가 몽땅 끊긴 분이었죠? 그땐 꽤 신중해야만 했어요. 아아, 그래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게 바로 쌩쌩해지셨어요. 흉터도 하나 없이 아주 말끔했고요.”

“어······ 그래. 진짜 굉장하네······ 그 지경에도 살아있었던 사람도 말이야.”


눈에서 빛이 사라진 그리모르는 슥, 인디아를 쳐다봤다. 왜인지 학생들도.


그렇게 한동안 홀로 당황하고 있으니 돌연 그리모르가 자기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자, 다들 들었지? 드래곤 슬레이어께서 직접 봐주는 것도 모자라 주교님 못지않은 [치유]로 상처까지 손수 치료해주신단다.”

“오오.”


소리를 높이는 학생들.



“하지만 갑작스럽게 시행할 대련이니만큼 강제는 아니니 빠질 사람은 빠져도 좋다.”

“누가 빠집니까. 그보다 검은 어찌합니까? 들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 그거라면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얼마 전 델리안과의 목욕 중 배운 [생성] 마법을 시연할 자리가 찾아왔다. 이때다 싶었던 리아는 냉큼 손을 들고 이야기하였다.


모두 놀란 듯하지만 달리 반대는 없다. 이에 리아는 즉시 이미지를 그렸다.


만드는 숫자는 예비까지 포함하여 대략 110개.


형태는 연습용이니 화려할 필요는 없다. 밋밋한 외관에 날이 서지 않은 것으로 하였다. 다만 전체적으로 난이도를 낮췄음에도 숫자가 제법 되다 보니 익숙하지 않은 지금으로서는 실패할까 봐 조마조마하다.


그렇지만 자신 있게 뛰어든 것이다. 이제 와 물러설 순 없으니 각오를 다지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결과는······ 성공. 주변으로 작은 빛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이 가라앉은 그곳엔 110개의 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리아는 그 검들을 각각 학생들 앞으로 날려 보냈다.


직접 가져가게 할 수도 있었지만 번거롭기도 하고, 기왕 만드는 거 학생 개개인의 신체에 맞게 검의 길이를 조절하였기에 맞춰서 나눠주는 게 좋으리라. 원하는 취향이 있을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잠깐 쓰는 연습용이니 그 정도는 참고 넘어가 줬으면 한다.


그리모르의 것도 나눠줬는데, 그는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검을 들고는 두들겨 보기도 하는 등 살펴보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녀석이네······ 학원 거보다 훨씬 좋은데.”


가슴을 펴는 리아.


당연히 허세다. 실은 성공했다는 것에 깊고 깊은 안도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창피하게 끝나지 않아서.’


보통의 마법들은 무언가의 목적―― 어떠한 것으로 특정 행동을 하는 것을 그려 마력을 조작하면 발동. 그러면 그려냈던 어떠한 것이 만들어져 의도했던 행동을 한다.


이것이 마법의 기본 원리. 목적을 다한 마법은 사라진다.


생성마법도 다른 마법들과 큰 차이는 없다. 그저 목적의 설정이 조금 다를 뿐.


그렇기에 실패할 걱정 따윈 없을 거 같지만,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았다. 저 사소한 차이가 다른 마법들과는 아예 결을 달리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로 리아도 성공을 확신하지 못했던 거다.


자세한 원리는 존재의 유지. 어떠한 것을 만들어 내는 것까지는 같지만 이후가 다르다. 만들어 낸 무언가를 사라지게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도록 하는 것이다.


목적 자체가 남는 것이니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생성마법이다.


그야말로 마법다운 마법―― 창조의 영역에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나름 쉬운데다 마력의 연비도 조금 나쁠 뿐이니 그런 꿈 같은 마법은 아니겠지. 약간 신기한 마법 정도? 그렇지만 어디까지 가능한지 확실히 알아봐야겠지. 그에 따라 활용도는 정말 무궁무진하니까.’


그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그리모르는 시끌시끌해진 학생들에게 외쳤다.



“그만들 떠들고 나오기나 해라. 30분밖에 없다는 거 잊지 않았지? 드래곤 슬레이어가 몸소 봐주는 시간을 그냥 버리고 싶다면 계속 꾸물거려도 돼.”


이 말은 극적이었다. 서로 잡담하는 것도 멈춘 학생들은 부리나케 난간에서 뛰쳐나왔다.



“어이, 거기 상급반의 녀석들. 은근슬쩍 끼지 말고 빠져라. 마음은 알겠는데 다음 기회로 미뤄둬. 아아, 걱정하지 않아도 드래곤 슬레이어께선 너희들의 무기부터 착실히 다 준비해 줄 거야. 그렇지?”

“드래곤 슬레이어 좀 그만 말하세요!”

“으응?”

“······아, 알겠어요.”


승낙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환호가 울린다.


자신이 봐주는 훈련이 그렇게나 좋아할 일인가 싶기도 하다. 그렇지만 치유사가 없어 전혀 대련할 수 없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확실히 반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이해는 간다.


그리고······ 그리모르는 정말 선생님 주제에 치졸하기 그지없다. 용케도 학생을 상대로 협박 비스름한 짓을 한다.


‘저번의 원한도 아직 잊지 않았건만, 또 같은 수단을 이용하다니······’


이번엔 용서가 안 된다. 다음번에 펼쳐질 대련은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거. 지금 당장 분이 풀리지 않았던 리아는 툴툴거렸다.



“원래부터도 시간 나는 대로 도와드리려고 했거든요. 오해하시면 안 돼요.”

“오해 따위를 할 리가. 아가씨는 원래 사려가 깊고 착하잖아.”


작게 콧방귀를 끼니 그리모르는 피식 웃고는 늘어선 학생들을 돌아봤다.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경고하는데, 경솔하게 몸을 굴리지 마라. 되도록 [치유]는 없다고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치유]에 익숙해져 험한 작전을 쓰는 녀석일수록 빨리 죽는 법이거든. 그런 의미에서 [치유]는 승패가 난 다음에나 할 거다. 알았냐, 짜식들아?!”

“넵!”


우렁찬 대답과 함께 학생들은 각자 짝을 지어 거리를 벌렸다.


근데 서로를 째려보며 걷는 모습이 어째······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짝을 지은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조금 우려스러운 마음으로 시작된 대련. 초급반인 만큼 다들 그리 대단한 실력은 아니었다.


‘분명 그랬어야 했는데······ 어째서 투기술도 쓰고 그러냐.’


그랬다. 대련을 시작한 학생들은 중급반에서나 배울 투기술을 제법 능숙하게 쓰고 있었다. 그 수는 대략 절반. 딱 보기에도 진짜 초보인 사람은 10명이 조금 안 되었다.


검술 초급반이란 수업의 명칭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행이라면 서로 비슷한 실력끼리 짝을 지었다는 거다. 덕분에 큰 사고는 벌어지지 않을 듯하다.


이러나저러나 안심한 리아는 느긋하게 지켜보다가 결판이 난 학생들에게 [치유]를 쓰거나, 혹여 치명상을 맞지 않나 주의 깊게 관찰하였다.











“으우······ 힘들어.”


방으로 돌아온 리아는 소파 위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진이 빠진 힘없는 목소리 하며 어딜 어떻게 봐도 지쳐 보인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리아가 지친다는 건 거의 있을 수도 없다. 실제로 꽤 격렬했던 세스와의 일전이나 세인트리안에서의 폭주에서도 근육통 따위는 조금도 있지 않았었다.


지쳐 보이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요인일 뿐.


그렇다. 리아는 2학기 들어 매우 바빠진 본인의 일상에 육체가 아닌 정신이 먼저 피곤함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왜······ 어째서 점점 참가를 원하시는 분들이 늘어나는 거야?”


본래 그 모임은 대검을 다루기 위해 시작된 것인데······ 이제는 주객이 전도되어 자신이 단련할 틈도 없이 남의 수련을 봐주기만 하는 실정이다.


원인은 짐작이 됐다. 일주일 전 그리모르의 수업을 도와준 이후로 쭉쭉 늘었으니 아마 그날의 일이 기폭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나 늘어날 거라고는 정말 예상치도 못했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가히 인기 강의와도 비견되지 않을까.


더군다나 자신이 훈련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니만큼 정해진 시간도 없다. 하지만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금세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덕분에 소문은 참 무서운 거구나 싶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람이 적은 상급 훈련장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모여들면 민폐다.


이를 핑계로 600여 명으로 늘어난 학생들을 좋게 타일러 돌려보내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그리모르가 벌써 학원장인 리카드에게 허락을 맡아뒀었다.


놀랍지만 사실로, 여태까지처럼 보호막을 펼쳐놓으면 안전하지 않겠냐는 말을 리카드 본인에게서 들었다. 실제로도 에르의 보호막을 뚫을 사람은 없으니 안전하긴 할 거다.


게다가 미리 상급 훈련장을 쓰는 선생님이나, 그 수업을 듣는 학생 전원에게도 양해를 얻어내어 애초에 반박할 요소들을 사전에 차단해버렸다. 참고로 그들은 배울 게 많다며 환영했다고 한다.


더는 딱히 해산시킬 명분도 없거니와 그리드와 닐을 비롯한, 방어전에 참가했던 학생도 특유의 부담스러운 예를 보이며 절반의 가까운 수가 합류했기에 더더욱 거절하기 곤란했다.


그래서 바빠지게 됐다.


처음엔 검 만들기로, 자신이 나눠줬던 검을 다들 부러운 눈치로 보길래 차별이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새로이 온 500여 명의 검을 만들어줬다. 시간이 나면 세세한 조정까지도 해주었다.


솔직히 사서 고생을 늘리는 느낌이지만 모두 좋아하니 힘을 냈다.


다음은 대련을 봐주는 것으로, 다친 사람들의 [치유]와 동시에 위험할 때면 끼어들어 말리는 일이었다.


이건 좀 편했다. 세스에 비하면 다들 멈춰있는 듯한 움직임이기에 많은 인원수임에도 세세히 관찰하는 정도야 여유였다.


[치유]도 학생들이 마련해준―― 어딘가 왕좌 같은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튕기기만 하면 되니 어려운 것도 없었다.


그러나 매일 지속되다 보니 아무래도 정신이 조금씩 갈려 나간다.



“이젠 다른 선생님들도 끼기 시작했는데―― 이거 완전 원래의 의도에서 벗어났지? 학생이 할 일도 아닌 것 같고 말이야.”


아이리스에게 동년배의 친구를 사귀게 함과 동시에 선진 문명을 배울 수 있게 하려고 온 베르다드. 자신은 그저 즐거이 학원생활을 보내려고만 했을 뿐인데 어째 일이 점점 커져만 가는 느낌이다.



“거기다 리카드 씨도.”


푹 한숨을 내쉬는 리아.


사실 지치게 하는 건 공부 모임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치게 만든 주된 원인은 리카드 때문이었다.


이전 뭔가를 떠올리고는 분위기가 바뀐 리카드. 그와의 연구는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처음엔 큰 무리가 없었다. 조금 쭈뼛거리기는 했으나, 친절히 대하는 태도는 변함이 없었으며 적절히 술식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는 등 공부가 되면 됐지, 불편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후로, 며칠 지나자 익숙해졌는지 리카드는 학자 그 자체가 되었다.


사양하는 거 자체가 없어진 듯 돌변한 그가 이거저거 부탁하거나 물어보기를 반복하게 된 것이다.


······정말 끊임없이.


전문적인 지식은 없기에 달리 도울 게 없을 거라며 가볍게 발을 들이민 과거의 자신이 후회됐다. 마도구에 마력을 넣는 일―― 단순히 마력의 제공만을 예상하였건만, 연구라는 일을 너무 얕잡아 봤다.


눈이 뒤집힌 리카드는 본인이 구상한 마법을 써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거기서 생겨나는 마력의 흐름―― 술식을 알려달라는 일을 계속해서 요구해왔다.


때로는 발현되는 현상 자체는 똑같으나 방식을 달리하기도 했는데, 말해주기로는 양측의 술식을 비교하여 어느 도형이 무슨 효과가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당연히 하나도 못 알아듣겠지만.


그러나 절대 되묻진 않는다. 한 번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 기특한 학생을 보는 듯했던 리카드에게 무려 4시간에 가까운 연설을 들었었던 것이다.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 소릴 4시간이나 들어야 하는 거다.


그런 지옥과 같은 경험이 있으니 다시는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저 얌전히 시키는 것만 하며 지정한 시간에 말리러 오는 세리오를 기다릴 뿐이다.



“으······ [공간이동]이랑 [차원이동]이 걸린 거라 내뺄 수도 없고.”

“리아, 그리 힘들다면 내가 리카드 녀석을 족쳐―― 흠. 따끔하게 한마디 해 줄까?”

“아, 아뇨.”

“흐음······”


고민스러운 에르의 목소리.


잘못하면 진짜로 에르에게 쥐 잡히듯 리카드가 털릴지도 모를 일이기에 리아는 몸을 일으켜 아내 사랑이 지극한 그를 보았다.


에르는 눈치도 빠르게 마실 걸 준비했는데, 리아는 재빨리 그걸 받으며 확고히 의사를 밝혔다.



“진짜 괜찮아요, 에르. 리카드 씨의 연구는 제가 바라는 데다, 여러모로 저에게도 도움이 돼요. 당장은 전혀 이해가 안 되지만 공부하다 보면 이해할지도 모르잖아요. 일단 전부 기억은 하고 있으니까요.”


에르는 빤히 쳐다보았으나, 이윽고 고개를 끄덕여주며 이해해주었다.



“알았어. 리아가 괜찮다면 아무 말 않고 있을게. 하지만 도를 넘어 귀찮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라도 말해줘.”


눈을 번뜩이는 에르. 아마 귀찮다고 하면 리카드는 반쯤 죽지 않을까······


‘응. 어지간하면 그냥 감내해야겠다.’


내심 입이 근질거렸던 것도 싹 가시고 리아는 어색하게 알겠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땀이 삐질 나올 듯한 분위기로 받은―― 곰보 코코넛을 활용해 새롭게 개발한 칵테일 비스름한 음료를 쭉쭉 들이켰다.


입안 가득 새콤한 맛과 블루베리의 깊은 향이 퍼진다.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진 리아는 머릿속에서 리카드를 완전히 지우고는 미소를 그렸다.



“에르, 고마워요! 덕분에 기운이 났어요.”

“뭘.”


웃는 에르의 모습에 볼이 빨개진 리아는 슬쩍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엔 아무도 없다. 이를 확인한 리아는 컵을 놓고 잽싸게 뛰어올라 에르의 목을 껴안았다. 그리고는 부비부비. 에르 성분을 듬뿍 섭취해 나갔다.


자연스럽게 몸을 받아준 에르도 만족스러워하며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다. 적당히 보충한 시점에서 리아는 아쉽게 에르와 떨어졌다.



“자. 이제 아이리스의 친구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죠.”


계획상으로는 느긋하게 주말에 맞이하려고 했으나, 친구의 주말을 빼앗은 건 조금 그렇다는 아이리스의 의견을 수렴. 일주일이 지난 오늘에야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으~ 역시 우리 아이리스는 너무 착해. 엄마의 실수도 감싸줄 줄도 알고.’


루비아에게 뒤늦게 들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자신이 권유하는 건 어정쩡한 집안의 자제들로서는 명령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아이리스의 친구들도 매한가지. 나름 부호와 귀족의 아이들이기는 하나 최고 국빈의 말을 거절할 방편 따윈 가지고 있지도 않은 것이었다.


몰랐다고는 하나 미안한 짓을 했다. 그러한데 피 같은 주말에 시간을 내달라고는 할 수 없다.


‘하다못해 대접만큼은 잘 해내야지. 아이리스를 위해서라도.’


필살기인 곰보 코코넛도 넉넉히 따왔다. 모자랄 일은 없을 테니 문제는 없다.


당분간 자신의 몫이 줄어드는 뼈아픈 지출이기는 하지만 아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



“엄마니까!”


기분이 업된 리아는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면서 에르를 졸졸 따라다니며 준비를 도왔다. 별로 도울 일이랄 건 없었지만.


그러던 때에 문이 두들겨졌다.



“어라. 좀 이르지 않나?”


아이리스의 수업은 아직 40여 분 정도 남아있다. 의아함에 리아는 문밖에 있는 마력을 더듬어봤다.



“누구지?”


문밖에 있는 마력은 처음 느껴보는 자의 것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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