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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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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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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4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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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쪽

143

DUMMY

왕성 내의 복도를 걸으며 마차장으로 향하던 인디아는 주위의 사람이 적어진 틈을 봐 작게 말을 걸었다. 주위에 들리지 않게끔 방음의 경계도 만들어 냈다.



“이래저래 오래 걸려서 미안하다, 리블리지. 바로 가고 싶었을 텐데.”


푹 한숨을 내쉬는 인디아.


그런 그에게선 20일간 쌓인 여정의 피로와 쉴 틈도 없이 이어지던 방문 요청에 시달린 고됨이 뚝뚝 묻어나왔다. 아직 복도인지라 표정만큼은 변함없이 싱글거림을 유지했지만.


하지만 본디 인디아가 이리 피곤함에 절을 일 따윈 없다. 인도의 주교라는 건 타국으로 따지면 공작과도 비등한 직책. 어지간한 일들은 1급 신관 선에서 다 처리하기 때문이다. 인디아가 너무 편안해졌기에 가끔 까먹긴 하지만······


그러나 이번엔 극소수의 인원으로 워낙에 다급하게 왔던 터라 그를 보좌해줄 사람이 부족했다.


급한 대로 아네픽시르에 있는 교회에서 사람을 구해와도 되나, 주교급을 수행할 만한 신관을 찾기란 어렵다. 최소 2급 신관은 되어야 하는데 수가 많을 리도 없다.


시간이 걸릴뿐더러, 더욱이 이번 일은 성국과는 무관한 개인적인 일이다. 외부인이 들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그렇기에 소식을 듣고 몰려드는 벨루디스의 정계 인사들을 인디아가 몸소 상대해주었다.


물론 급이 낮은 남작, 자작까지 일일이 상대해줄 순 없으니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걸러내긴 했다. 그러나 만남을 가진 이들은 하나하나가 정신을 갉아먹는 시간이었기에 제아무리 강인한 인디아라 하더라도 지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딱 한 명, 짐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맨 뒤를 조용히 따라오는 여성을 떠올린 리블리지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아요, 주교님.”

“아니, 진짜 미안해. 괜히 신관복까지 입게 만들고.”


그거야말로 진짜 괜찮다. 정말 가끔이기는 해도 대외적인 자리에 참여할 때는 입었으니 그리 어색하지도 않았다. 준비해주었던 원피스와 마찬가지로 가슴 부분이 조금 답답한 거 말고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인디아가 이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사과를 입에 올리는 건······ 명목상의 입장인 사자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괜찮아요. 주교님은 타국으로의 방문이 쉽지 않은바, 기왕 온 김에 여러 가질 보시려고 한 것이잖아요. 그렇죠?”


동의를 구하며 리블리지는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과 같은 목적인 그녀를.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대신 송구하다는 듯한 분위기로 작게 고개를 숙이기만 하였다. 말조차도 함부로 하질 않는다.


그녀, 아베라 자르 디비치온은 갑작스레 동행을 요구한 뒤로부터 계속 이러한 태도를 보여왔다.


――마치 자신이 하급자인 것처럼.


심판관과 주교 간에 상하는 없다. 업무의 양과 표면상의 얼굴인 이유로 주교가 심리상 약간 위인 느낌이지만, 엄연히 직책 간의 위아래는 없다. 동등한 입장이다.


‘그러하건만······’


왜 그녀가 이러한 행동을 취하는지 출발 전 듣기는 했으나, 솔직히 좀 곤욕이다.


더불어 그 의지의 표명으로 그녀가 입고 있는 의복엔 양어깨를 두르는 금색의 영대가 빠져있다. 이것의 의미는 1급 신관이라는 것. 공식적인 문서에도 세인트리안에서 온 사자는 주교가 한 명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베라는 이조차도 사절단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입었다는 느낌으로, 입지 않아도 됐다면 당장에라도 사복으로 갈아입으려 했을 것이다.


다시금 한숨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인디아도 시선을 보고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어색하게 웃고는 별말 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렇게 침묵으로 도착한 왕성 내의 마차장에는 벨루디스 측에서 준비해준 마차가 대기 되어 있었다. 타고 온 마차는 정비를 위해 다른 곳에 보관 중이었다.


다가가자 마차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온 것은 안내인을 따라 먼저 마차를 수령하러 간 인원으로, 그들 중 한 명이 크게 손을 흔들면서 반겨주었다.



“어서들 오입소. 고생들 하셨슴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남자의 곁에 또 한 명의 남자가 서더니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원래 인상이 저렇다―― 핀잔을 주었다.



“체통을 지켜라, 카를로 운. 지금의 너는 신관이다. 경솔한 발언에는 주의하도록.”

“뭐, 어때서, 선배. 어차피 주위엔 아무도 없는데.”

“감시자가 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네요~ 다 계산해 둔 거야. 이 거리라면 안 들려. 겨우 손 흔드는 걸로 체통 같은 게 떨어질 리도 없고.”

“아니, 가볍고 경솔하다며 비웃음 살 수도 있다.”

“친근함을 느낀다면 모를까, 딱딱한 신관의 이미지상 그럴 리는 없어 보이는데······”


뭔가 만담 같은 행색의 둘.


그렇다. 그들은 출발 직전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자신들도 같이 가도 되겠냐며 따라온 카를로 운과 케트로 세르칸체였다.


언제나와 같은 그 둘을 인디아는 조금 질린 듯한 눈매로 보았다. 그러나 별말은 하지 않았다. 묵묵히 옆으로 길을 터주는 둘을 지나쳐 마차의 안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리블리지는 뒤따라오던 아베라에게 권해보았으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양하며 이쪽이 먼저 타라고 한다.


요 며칠 매일 겪던 일이다. 리블리지는 재차 권하지 않고 뻗어주는 인디아의 손을 잡고 먼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외관도 그랬지만, 벨루디스 측에서 상당히 신경을 써주었는지 내부도 불편함이 없도록 잘 꾸며져 있었다. 넓이도 꽤 되어서 이 정도라면 이동하는 동안 편안히 있을 수 있으리라.


인디아의 옆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케트로의 손을 잡고 아베라가 들어왔다. 그리고 바깥에서 조심히 문이 닫혔다.


문을 닫은 이는 바깥에 있던 운으로, 여러 재주가 좋은 그답게 이번에는 마부의 역할도 담당하기로 했다. 벨루디스에 오기 전에도 케트로와 함께 교대로 마차를 몰기도 했으니 실력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럼 출발합니다요~”


늘어지는 운의 말과 함께 마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를 따르는 건 없다. 오직 한 대의 마차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만이 들린다.


마차만은 훌륭하지만 차마 성국, 세인트리안의 사자라고는 볼 수 없는 초라하디초라한 규모.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인디아가 출발하기 전에 모든 걸 준비해놨을 것이다.


소규모라도 전혀 어색함이 없도록.


그에 대한 성과도 확실하여 벨루디스의 왕을 포함하여 누구도 사자의 규모가 작은 것에 의아함을 보이지 않았다.


역시 꼼꼼한 인디아. 대단하다.


스윽.


그리 생각하고 있으니 마부석과 연결된 창문이 살짝 열렸다.



“인디아 주교님아. 저 혼자서는 심심하니 도착하기 전까지 말동무 좀 해주실 수 있으심까?”

“카를로 운······”

“뭐, 뭐 괜찮아. 한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니잖아? 운 군이 마차를 몰다가 사고를 낸 적도 없고. 여기선 여태 쭉 마차를 몰아준 운 군에게 감사도 겸할 겸 느긋하게 가자고? 케트로 군.”

“······알았다.”

“오! 역시 인디아 주교님. 너그러우셔.”

“좀 더 감동해도 된다고? 난 관대한 인도의 주교님이니까.”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케트로를 뒤로한 채 마차 안은 유쾌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케트로조차도 분위기 자체는 부드러워졌건만, 딱딱한 표정인 아베라의 얼굴은 좀처럼 펴질 기미가 없었다.


웃는 와중에도 그녀가 내심 신경이 쓰였는지 인디아가 힐끔 봤으나, 그는 티를 내진 않고 무심한 척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다.



“그래서? 운 군은 뭘 듣고 싶은 것일까나?”

“다 알고 계시지 않슴까.”


인디아가 피식 웃었다.



“용사―― 그 돼먹지도 못한 것을 말하는 거야?”

“예입. 바쁜 와중에도 주교가 일부러 만나려 했던 거니 말입죠. 근데 보아하니······ 영 그랬나 봅니다.”

“딱 네가 싫어할 타입이야.”

“엑? 그럼 진짜 용사라는 검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계에서 온 용사라는 건 말이 안 돼.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배경으로 용사라 내세울 이유도 굳이 없어. 그러니 용사로서 소환했다는 건 진실이라고 보는 게 좋겠지.”

“주교님이 그런 거라면 그렇겠지만······ 정말 그만한 인물이었슴까?”

“내가 본 인물상으로는 평범한―― 아니, 여느 왕족보다도 더더욱 평화롭게 살아온 듯하더군. 이계에서 귀족처럼 자라왔다고 한 것도 진실일 가능성은 없지 않아. 본인이 떠드는 것처럼 말이지.”

“아! 그래서 일부러 어려운 이야기들을 하셨던 건가요?”


듣던 리블리지는 떠오르는 생각에 조심스레 물었다.


그 물음에 인디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등기관에 있었다니까 한번 시험해볼 겸 말을 꺼내 본 거지.”

“결과는 어땠음까?”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달까? 적어도 바보는 아니야. 내가 모르는 여러 지식들을 줄줄이 읊어대더군.”

“하지만 제가 싫어하는 상이라는 건······”

“그래. 이계에서 왔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주 기고만장해져 있더군. 특별한 능력이 어쩌고, 주인공이 어쩌고. 오로지 능력에 관한 것만을 창피한 줄도 모르고 떠들더라. 운 군이랑 완전 상극이야. 특히 자신이 이 세계―― 오엘문리아를 구원하러 왔다고 짓거릴 때는 정말 웃음을 참기 힘들었어. 뭔가 세뇌라도 당한 줄 알았다니까. 아주 철석같이 그럴 거라 믿고 있던데?”


운이 콧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린다.



“용사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네들 세상이 더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것도 참 용하네요. 혼자서 세계를 구한다느니 잘도 생각할 수 있고.”

“그러게. 오엘문리아의 존재들을 도대체 얼마나 하찮게 보았길래 그딴 헛소리를 할 수 있는지 궁금하더라. 실제 능력이 있다고 한들 혼자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란 매우 좁을 텐데 말이야. 하물며 그만한 힘도 없는 주제에.”

“그냥 철없는 꼬마네요.”

“현실 분간 못하는 꼬마긴 했어. 나이도 22살밖에 안 먹은 애송이기도 하고. 물론 좀 심각하게 덜떨어지긴 했지만. 확실한 건 정치 쪽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을 거야. 통치자를 끌어내리고 어쩌고 한 건 허풍이었겠지. 군인이었다는 것도 영 신뢰가 안 가.”

“괜한 고생이셨겠슴다.”

“누가 아니래. 나태한 천재 따윈 아무런 가치도 없거늘. 애당초 진짜 재능이 있기나 한지 의심밖에 안 되는 녀석인데 아까운 시간만 날렸어. 그나마 세스타스의 일을 후작에게 설명할 수 있었단 것에 만족해야겠지.”

“뭐라고 둘러대셨슴까?”

“모른다, 밖에 뭐가 더 있겠냐.”

“하핫. 그것도 그렇지요.”


웃는 운과 달리 인디아는 정말 시간만 날리고 아까운 짓을 했다며 혀를 찼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으로서 리블리지는 인디아의 심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알렌나시안 후작과 함께 있던 용사는 정말 오만불손했으니.


자기 평가가 매우 후하다고 해야 하나?


특히 이제야 교회 세력이 왔다며, 자기에게 줄 성검은 가지고 왔냐고 물었을 때는 제정신인지 정말 궁금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언니를 향한 그 불경은······’


이야기는 돌고 돈다. 그러니 후작과의 대화에 장안의 화제인 드래곤 슬레이어가 빠질 순 없을 것이다. 드래곤의 토벌은 몇 백년 가까이 깜깜무소식이었으니 말이다.


세스타스의 일을 어떻게 처리했나 들을 겸 꺼낸 그 화두에서 그 용사라는 작자는 사사건건 아이템―― 아티팩트의 힘으로 물리쳤다며 트집을 잡아댔다. 검으로 물리쳤다는 왕가의 공식적인 발표가 있었음에도.


후작도 조금 마음에 걸렸는지 ‘그럴지도 모르나, 아티팩트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라며 부정까지 해주었다. 그러나 용사는 너희들이 모르는 뭔가가 있었을 거라고 끝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보다 못한 인디아가 학원 내에서 언니의 공부 모임―― 상당한 수준인 듯해 이쪽의 귀에도 들려오던 그 모임을 못 봤냐고 물었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별것도 없던데.”


A랭크의 모험가란 무력으로 인류의 최고봉에 속한 사람들이다.


최후이자 최전선에서 인간을 수호하는 그들은 귀중한 인적 재산. 그러한 사람들이니 암만 성국이라 하더라도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서야 A랭크의 모험가는 처분의 대상으로 올리지도 않는다.


그들과 부딪혀 발생할 피해를 무서워한 게 아니다. 힘들기야 하지만 목격자 하나 없이 조용히 처리하는 것도 가능하니 말이다.


오히려 무서워한 것은 처분으로 인한 그들의 부재. 세인트리안은 오로지 그들이 사라짐으로써 각 나라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상황만을 걱정했다.


그런 고급 인적자원 중 한 명인 그리모르가 가르치는 자가 아닌, 배우는 자의 입장으로 언니의 공부 모임에 속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데 용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이야기한 거다.


입만으로 떠드는 건 누가 못할까. 내심 그러면 네가 그리모르랑 싸워서 이겨보라고 외쳐대고 싶었다.


다시금 떠올리니 화가 치민다.


직접 마주하며 느낀 용사의 강함은 벌레 수준.


화가 나기에 저평가를 한 게 아니다. 용사라는 작자는 실제로 널리고 널린 평범한 벌레들과 비슷한 강함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거다.


그나마 인간이니 검 같은 무기로 무예를 펼칠 수 있기에 싸운다면 조금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도 있어 보인다만, 기초능력이 워낙 형편없는 탓에 마력조작 면에서 훨씬 뛰어난 벌레가 이길 확률도 있지 않을까 싶다.


겨우 그러한 용사가 그딴 말을 한 것이다.


제아무리 후작이라도 조금 어이가 없었던지 이후로 용사가 뭐라 떠들던 살짝 무시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뭐, 아서인지 뭔가 하는 용사는 그것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그런 민폐가 언니에게 사사건건 트집을 잡다니······ 혹 학원 내에서도 괴롭힘 비슷한 일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아, 그럴 일은 없겠구나. 그가 남편이니.”


오히려 여태까지 잘도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순간에 갑자기 객사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건만.


‘아니면 언니 앞에서는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을지도.’


그러한 생각을 할 때였다. 훅, 부풀어 오르듯 인디아에게서 살기가 흘러넘쳤다.


놀란 모두는 인디아를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입이 열렸다.



“그 개자식. 감히 리블리지를 향해 더러운 시선을 보냈었지.”

“어······ 그러고 보니 그랬었네요.”


무심코 긍정해버렸다. 그만큼 인디아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신을 징그럽게 쳐다보던―― 명백히 성적인 의미를 담아 품평하던 그의 시선은 결코 기분이 좋진 않았다.


그런데 인디아에게도 좋지 않았나 보다. 더더욱 살기가 들끓는다.


리블리지는 인디아의 팔을 살며시 껴안았다.



“진정하세요, 주교님.”

“하, 하지만 네가 기분 나쁜 꼴을. 그건 반드시 나중에 처분을――”

“――험한 말 쓰시지 말고요. 사실은 착하신 분이. 전 정말 괜찮아요.”

“아, 아니 그래도······”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다 풀렸어요. 지금 주교님께서 대신 화내주셔서요.”

“으음.”

“고마워요, 주교님.”

“뭐어······ 리블리지가 그렇다면 넘어가 주지.”

“우효~ 우리 주교님 누님에겐 엄청나게 약하시네. 우리는 전부 애 취급하면서.”

“시, 시끄러워. 바보 운 군은 좀 조용히 해줄래?”


웃음바다가 된 마차 안.


그리고 리블리지는 보았다.


마침내 케트로와 함께 미소를 짓는 아베라를. 조용히 기도를 올렸던 그녀는 인디아를 매우 따스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인디아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는 눈을 감았다.


마부석에 있던 운도 분위기가 풀린 것을 통해 이를 눈치챘는지 더욱 활기차게 떠들어대며, 마차의 안은 나름 시끌벅적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마차의 목적지였던 베르다드.


모든 생을 통틀어 처음 보는 이곳의 정경은 과연 듣던 대로 깔끔했다.


출입구에서의 검문도 일사천리였다. 벨루디스 측에서 미리 전달했는지, 경비들은 마차에 달린 세인트리안의 깃발을 보고는 별다른 검사도 없이 바로 예를 갖추어 통과시켰다.


그렇게 마차는 곧장 마차장에 멈추어 섰다.


생각보다 잘 풀려나가는 것에 리블리지는 미소 짓고 탈 때와 마찬가지로 뻗어오는 인디아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제일 마지막으로 아베라가 케트로의 손을 잡고 내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두 명의 남녀가 다가왔다.



“성국의 여러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 베르다드 학원의 부 학원장인 세리오 리벨리타스입니다. 이후 잘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인사에 이쪽의 대표인 인디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환영 감사하지. 난 인도의 주교, 인디아 빌 쿠리스리움이라네. 모쪼록 잠시 신세를 지겠네.”

“정중한 답례 감사드립니다. 자, 그럼 따라오십시오. 숙소로 안내하겠습니다.”


과연 베르다드의 부 학원장이다. 전혀 놀람도 없이 곧장 말을 받는다.


그에 비해······ 같이 온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 주교를 상징하는 금색의 영대와 인디아를 번갈아 보기 바빴다. 다가왔을 때부터 줄곧.



“실례했습니다, 주교님. 악의가 있는 건 아닙니다. 부디 용서해주시길.”

“하하. 익숙하다네. 보다시피······ 작으니 말일세. 아무래도 주교처럼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야.”

“정말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랬다. 첫 만남에서도 그랬지만, 인디아의 그 소년 같은 외형은 여전했다. 정확한 나이는 비밀이라지만 수염조차도 나질 않았다.


자신도 처음엔 인디아가 주교인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는데, 만날 일이 거의 없는 외부인이 한눈에 알아차리길 바라는 게 되려 이상하다.


하지만 엄연히 예의에 어긋나는 일. 남자 대신 세리오가 재빨리 사과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남자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같이 머리를 숙였다.



“괜찮네, 괜찮아. 그보다 학원을 안내받고 싶은데······ 마차는 그쪽에 맡기면 되나?”

“예. 원래는 이 자가 맡기로 되어 있었습니다만, 괘념치 않으시다면 그대로 맡아도 되겠습니까?”

“일부러 번거롭게 그럴 필요는 없지. 정말 괜찮으니 마음에 두지 말게. 단――”


인디아가 말을 끌자 둘은 긴장하였다.



“――함께 가도 되겠나?”


예상대로이다. 인디아라면 큰 무리 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딱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상대 쪽은 아니었는지 세리오는 제법 곤란하다는 기색을 흘렸다.



“가시는 거야 문제는 없습니다만······ 관리장은 많은 기마가 맡겨지는 곳입니다.”


냄새가 심할 것이라는 걸 돌려 말하는 것이니라.


인디아는 빙긋 웃었다.



“우릴 태워다준 말이지 않나. 어떻게 지내는지 정도는 봐두고 싶다네. 게다가 이곳의 관리장에는 그 유명한 비젠탈이 있다지 않나. 먼발치에서나마 그 장엄한 모습을 새겨봤으면 싶네.”


주목적은 그것이었나.


그런 착각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한 세리오는 잠시 고민했다.


결론은 금방 나왔다. 그 비젠탈이다. 무시무시한 대마수를 상대로 어찌할 방도가 없다고 계산을 마쳤는지, 자극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과 함께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관리장이라는 곳을 향해 가면 갈수록 리블리지는 작게 감탄하였다. 그리고 도착한 순간 납득하였다.


‘과연 비젠탈이 있는 곳인 만큼 관리인도 평범하진 않네.’


관리인은 언뜻 인상도 그렇고 평범한 사람인 척 연기를 했지만, 자신을 속일 순 없다. 관리인에게서 거의 온몸 가득 찬 마력과 부분, 부분 살짝 압축된 마력을 느꼈다.


저러한 상태라면 후에 자연스럽게 시련도 넘어설 터. 아마 벨루디스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강자일 그를 대마수인 비젠탈의 곁에 배치하는 것 또한 어찌 보면 당연한 절차일 것이다.


그렇게 건네주는 고삐를 받는 관리인의 너머로 군청의 거대한 말이 보였다.



‘저 말이 비젠탈.’


비젠탈에 대한 일화는 워낙 유명하여 성국 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소문 그대로의 외형―― 아니,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압박감이 넘치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저러하니 착각할 리도 없다.


더군다나 관사의 열린 문 너머로 비젠탈이 지성 어린 시선을 똑바로 보내온다. 관리인에게 고삐를 잡힌 말도 뒤늦게 비젠탈의 존재를 알고는 군마 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잔뜩 움찔댔다.



“과연 훌륭하군. 공국의 에인샤론드가 비젠탈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이야기들을 간혹 들었으나, 이렇게 실물을 보니 아직 멀었음을 절로 깨닫게 되네.”

“폐하께서도 주교님의 말씀에 기뻐하시겠지요.”

“그러하시다면 나도 기쁘다네. 하지만 난 폐하와는 별개로 말한 것이야. 대단한 것도 비젠탈, 인마전쟁에서 인류를 지킨 것도 비젠탈이니. 실례지만 벨루디스 폐하가 낄 여지는 없지 않은가.”


그리 말을 한 인디아는 한동안 열린 관사 문 너머에 있는 비젠탈의 모습을 보았다.



“입장상 베르다드에 들르기란 쉽지 않았건만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이군. 좋은 추억이 되었네, 리벨리타스 공. 그리고 지금 들은 무례는 흘려주었으면 감사하겠네.”

“주교님께서 먼저 저희의 무례를 넘어가셨는데, 당연히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방금 막 대화에서 주교님은 비젠탈 공의 칭찬만 했을 뿐입니다.”

“후훗. 감사드리네.”


훈훈한 분위기를 이어 바르잔토라는 이름의 관리인에게도 작별을 고한 인디아는 곧장 세리오에게 말을 걸었다.



“리벨리타스 공.”

“세리오로 괜찮습니다. 분가의 몸인지라 리벨리타스로 불리면 좀 황송합니다.”

“분가도 엄연히 리벨리타스.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단 생각이 든다만······ 당사자의 뜻이 그러하다니. 알겠네, 그럼 세리오 공?”

“예. 말씀하십시오.”

“숙소의 안내는 뒤로 미루어도 되겠나? 그보다는 먼저 학원장께 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이지 않나 싶네.”

“주교님께서 바라신다면 제가 거절할 일은 없습니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재차 감사를 전하는 인디아와 함께 세리오는 길을 안내했다.


학원 내에서는 보기 드문 신관의―― 그것도 주교의 등장에 학생들은 빤히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진짜냐고.


주교라고는 그리 믿기지 않는 외모인 인디아이기에 피어오른 의문이지만 익숙한 일. 평소대로라면 그러려니 넘어갔을 거다.


그런데 이번엔 타이밍이 조금 나빴다.


아니, 그냥 운이 잘못했다. 수행원으로서 뒤를 따르고 있던 운이 끅끅대던 걸 참지 못한 것이었다.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


리블리지에겐 쾌청하게 생긴 인디아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게 절로 그려졌다.


그러나, 그 순간――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화를 낼 틈도 없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너무나도 예리했던―― 하지만 어째선지 계속 듣고만 싶은 그 소리는 순간 인상이 찌푸려지던 인디아의 미간까지도 멈춰 세웠다.



“방금 건······?”

“――검이야.”


무심코 중얼거리니 운이 곧장 받았다. 그런 그의 눈은 설렁설렁 가볍고 장난기가 많은 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살짝 무서웠지만 리블리지는 참고 물었다.



“검이요?”

“맞아, 누님. 방금 그건 검격으로 낸 소리야.”


과연 검으로 저런 소릴 낼 수 있을까도 싶지만, 운은 어디까지고 진지했다.


그리고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바라보고 있는 운을 보노라면 어째서인지 그리운 나날들이 떠오른다.


‘그때의 언니도 저러한 아름다운 울림을 냈었―― 어? 엣, 설마?’


정신이 드니 무작정 인디아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물론 수행원 자격인 신관으로서는 불경한 행위임을 기억한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저곳에 만나고 싶은 그 사람이 있을 테니.



“주교님! 저······”

“알았어.”


살짝 발돋움한 인디아가 상냥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미안하네, 세리오 공. 자꾸 바꾸어서 면목이 없네만 방금 저 소리가 난 곳으로 가보고 싶네.”


이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세리오는 일순 경계심을 내비쳤다.


부 학원장인 그녀의 입장으로는 문젯거리가 발생하는 건 원치 않을 터. 더군다나 성국이 학원에 공식적으로 견학을 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조심하려는 것도 이해는 간다.



“세리오 공을 곤란하게 할 목적은 아니라네. 그저 조용히 보고 싶을 뿐이지.”

“······알겠습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무리를 강요한바, 얌전히 보고 갈 것임을 공에게 맹세하지.”

“말씀 감사드립니다.”


앞장을 서서 걷는 세리오를 따라나서며 인디아는 뒤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그 눈이 말하는 건 한 가지. 문제를 일으키지 말고 얌전히 있을 것.


모두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지만 인디아는 미덥지 않게 느껴졌는지 재차 자신과 아베라에게 알아들었냐고 눈으로 물어왔다. 그걸로도 모자랐나, [전언]이 머릿속에서 울려왔다.



『리블리지, 아베라. 너희 둘 말이야. 그때그때 시기가 있다라는 건 알고 있지? 절대. 반드시 다짜고짜 달려들려고 하지 마. 만약 그런다면 이스피리아를 만나긴커녕, 우리들의 견학 자체가 취소될 수도 있어. 제대로 방문 절차를 잡을 테니까 하고 싶은 말은 그때 가서 해. 조바심은 나겠지만 그전까지는 참아. 알겠지?』


타국의 고위 귀족 자제도 다니는 학원이니 문제를 일으킬 시 견학이 취소되는 거야 당연하겠지.


물론 절대 그럴 순 없다.


심호흡해 심신을 다스린 리블리지는 차분하게 알겠다며 작게 대답하였다. 아베라도 대답은 없었지만 강한 의지가 깃든 눈을 비추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안심한 인디아는 [전언]을 끊고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며 세리오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늘어난 학생들의 시선을 뚫고 5분여를 걸었다. 쏟아졌던 학생들의 시선이 갑자기 뚝 떨어졌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


핑!


마치 활의 시위가 당겨진 듯 날카롭게 베는 소리가 들린다.


오면서도 줄곧 들었던 저 소리가 가깝다. 하지만 보이진 않는다. 정면엔 정말 많은 수의 학생들이 벽처럼 둘려 있기 때문이다. 호기심 어린 눈을 보냈던 학생들도 관심을 거두고는 저 무리에 합류했다. 그래서 갑자기 시선이 사라진 것이다.


도대체 저 앞에 무엇이 있기에 그러는 것일까.


답은 예상이 가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설렘을 갖고 천천히 다가간다.


학생들의 벽은 부 학원장인 세리오가 길을 좀 열어 달라고 부탁하니 쉽게 뚫렸다. 그 과정에서 인디아에게 다시금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쏠렸지만, 큰 문제 없이 무사히 벽의 맨 앞까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리블리지는 이를 꽉 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감정이 날뛴다. 하지만 폐를 끼칠 순 없으니 조금의 방심도 하지 않고 꽉 붙들어 맸다.


대신 눈앞의 장면을 새겨넣었다.


올곧으면서도 단조로운 기본적인 자세이지만 무희의 연무 같은 아름다움을 풍기는 저 검무를.


아니, 그 검무를 펼치고 있는 은발의 소녀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은빛 대검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번쩍이는 섬광이 남고―― 파공성이라 표현하기도 애매한, 가까이 있기에 더욱 소름이 돋는 그 소리가 뒤이어 발생했다.


분명 화려함은 조금도 없다.


검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이 보더라도 기본기로만 이루어진 검무라는 걸 한눈에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수직 베기나 횡 베기, 올려 베기 등 초심자가 할 것들 뿐이기에.


하지만 볼품없진 않았다.


오히려 이를 지켜보고 있는 카를로 운의 눈엔 기억 속에 있는 그 어떤 자들의 검 놀림보다도 아름답다고 여겨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것이야말로 운, 자신이 평생을 추구하고 걸어왔던 길이었으니. 무심코 넋을 잃고 바라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만족했나, 카를로 운.”


말해 무얼 하나. 당연히 만족하다 못해 도리어 너무 만족하여 검무가 끝날 아쉬움만이 증폭될 뿐이다. 대답하는 것조차도 번거롭다.


하지만 무시했음에도 케트로는 화내지 않았다. 애당초 그랬다면 망설이는 자신을 부추겨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새삼 그때 등을 밀어준 케트로에게 감사하다.


그가 아니었다면 막 떠나려던 리블리지들과 함께 오지 못했을 것이고, 이 순간도 놓치고 말았을 테니.


‘같이 따라와 주기까지 하고 선배 안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착하단 말이지.’


다시 한번 속으로 감사를 전한 운.


그러나 잡념은 거기까지였다. 무아지경인 소녀, 이스피리아를 따라 운도 무아지경으로 소녀가 휘두르는 은빛 대검을 쫓았다.


어딘가 그리운 마음을 품고서.











‘그렇군. 왜 갑자기 같이 간다고 했더니만 이걸 보기 위해서였나.’


인재의 발굴과 성장. 이를 담당하는 건 인도의 주교이다. 그렇기에 운과 케트로, 이 둘과 인디아와는 오랜 인연이었다.


햇수로 따지자면 케트로는 약 60년, 운은 30년쯤은 됐을 거다.


그런 인연들인 이 둘이 지금 생전 본 적 없는 표정들을 짓고 있다. 무뚝뚝한 케트로는 깊은 만족감을, 늘어졌던 운은 생동감 넘치는 활력을 말이다.


각자 다른 것을 보고 저러는 듯하지만 일단 보기엔 좋다. 이러나저러나 이 둘도 어찌 보면 자신이 거둬들인 아이들이니. 그런 아이들의 활기찬 모습이니 이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저리 좋아하는데 말을 걸기도 미안하군.’


피식 웃은 인디아는 셋 중 가장 오래전에 거둬들인, 근 90년 가까이 되는 인연인 리블리지를 보았다.


리블리지는 입가가 부르르 떨리면서도 당찬 눈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이 아이도 어느새 이리 강해져 있었구나.’


언제나 보호해야 할 것만 같은 아이였는데······ 어느덧 성장하여 자신의 손에서 멀리 떠난 모양이다. 요즘은 더듬는 연기도 전혀 하질 않고.


그게 대견하면서도 조금은 씁쓸하다.


하지만 리블리지의 새로운 출발이다. 인디아는 가슴팍에 작게 2개의 정십자를 그리고는 딸의 앞길에 축복이 있기를 기도했다.


몰래 기도를 마친 인디아는 세리오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안내를 계속 부탁해도 되겠나?”

“나머지 분들은?”

“이 애들은 이후 정신을 차린다면 여기서 바로 숙소로 안내해주게. 학원장께 인사는 나 하나로 충분하겠지.”


혼자 간다는 것에 제법 놀란 눈을 하였던 세리오는 이내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는 남성 직원에게 말을 전했다.


앞장서는 세리오. 그녀를 따라 세 걸음을 옮길 때였다.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한숨과 함께 어쩐지 입가가 올라감을 느끼며 인디아는 [전언]을 보냈다.



『그리 보고 싶었던 언니인데 더 보고 있지 않아도 돼?』


리블리지에게서 밝은 기색이 전해진다.



『아쉽기야 해요. 하지만 똑바로 일을 마치지 않고 멍때리면 언니한테 혼날걸요?』

『그러냐. 의외로 엄하나 보네.』

『네. 명색이 수행원인데 주교님 혼자 보내기도 뭐하고요.』

『기특하네. 저기 움직일 생각도 없는 쟤네들도 본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뭐어······ 두 분 다 어리니까 이해하고 넘어가죠.』

『후후. 네게서 그런 소릴 듣게 될 줄이야.』

『안 어울리죠?』

『무지하게.』

『역시 주교님은 어색하게 위로 하지 않으시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앞으로 점점 익숙해지실 거니까.』

『그래. 기대하마.』


그렇게 입가에 미소를 그린 인디아는 흡족한 기분을 맛보며 학원장실에 도착했다.


사치스러운 정문에 도착한 순간 감정을 바로 정리한 인디아는 멍하니 올려다보는 리블리지에게 살짝 눈치를 주었다. 그리고 세리오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인가?”

“예. 학원장님은 안에 계십니다.”


대답과 함께 세리오는 문을 열었다.


드러난 학원장실 내부는 낭비가 심해 보이는 정문과는 달리 꽤 검소하게 꾸며져 있었다. 상당량의 마도구도 하나의 실내장식처럼 고풍스럽게 잘 배치해놓았다. 누가 해놨는지는 모르나 제법 센스가 좋다.


청소도 잘해놓아 집무실 책상에 쌓인 서류 말고는 먼지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됐다.


이를 쓱, 훑어보고 있으니 집무실 책상에 앉아 도장을 찍고 있던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맑은 청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그리고 이 마력. 전과 달리 안경을 끼고 있지 않았지만, 이 베르다드의 학원장, 리카드 디안 클로디아노임이 틀림없다.


굳이 확인해봤지만 분명 리카드이다. 몇 번 만나진 않았지만 잘못 볼 리가 없다.


‘그, 근데 이건 도대체······’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다가오는 리카드에게서 엄청난 압박감이 몰아친다.


감각으로는 마치 역전의 영웅을 대하는 느낌. 어지간한 왕들조차도 상대가 안 되리란 기분이다.


이전 이상가의 기질이 강했던 그의 인물상과는 확연히 다르다. 외형만 변함없지, 속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은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봐도 무방할 차이가 느껴진다.


하지만 인간의 기질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법.


그래서 제법 만만히 보고 왔건만, 리카드의 이러한 변모는 완전히 예상 밖의 일이었다.


다행이라면 지금 만나 알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런 리카드를 모른 채 이전처럼 대응했다면 반드시 뼈아픈 꼴을 당했을 것이기에 무심코 간담이 서늘해진다.


마른침을 삼킨 인디아는 리카드에 대한 평가를 몇 단계나 높였다.


자신이 긴장하자 덩달아 리블리지가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게 느껴졌지만, 냉정을 유지한 척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라네, 클로디아노 공.”

“예, 오랜만입니다. 인디아 빌 쿠리스리움 주교.”


‘우와아아······ 짜부라지겠다, 이 자식아! 나 일단 주교라고?? 근데 사자에게 이렇게 대놓고 압박해도 되는 거야? 앙?!’


도대체 뭘 처먹었길래 이따위로 변한 건지. 용케도 웃는 얼굴로 잘도 이런다.


신경줄이 갈려 나갈 것 같은 압력에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은 인디아는 먼저 속내를 드러내기로 했다.


괜한 오해로 시비 걸리긴 아무래도 억울하다.


하지만 대화하기에 앞서, 인디아는 슬쩍 세리오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녀는 제 반신이나 다름없는 분이십니다. 신뢰하셔도 괜찮습니다. 혹여나 이곳에서 한 이야기가 새어나간다면 전부 제가 책임지도록 하죠. ――그쪽이 고의로 퍼뜨리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말이죠.”


눈을 가늘게 한 리카드에게서 압박감이 증대한다. 특히 세리오를 반신이라고 소개할 때는 섬뜩함마저 느끼게 하였다.


자기 사람을 아끼는 리카드이고, 또 이쪽의 의도를 떠볼 요량이었겠지만 적도 아닌데 너무 과하다.


‘반신이라는 건 진짜 의미 그대로일 수도 있겠어. 건들 생각 따윈 애당초 접으라는 건가?’


이전이었다면 원초마법도 못 쓰는 반푼이 주제에 대든다며 분개했겠지만, 지금의 리카드에겐 그딴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역으로 술식마법사인 리카드에게 궁지에 몰렸다는 기분마저도 든다.



“우리라고 할 일이 없어서 그러한 짓을 하겠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이번 우리의 방문은 성국의 의지가 아니니 말이야.”

“호······ 하오면, 개인의 뜻이란 말씀인지요?”

“그 말대로라네. 베르다드의 견학은 순전히 나의 뜻이지. 성국과 관련이 없다네.”


나름 솔직히 속내를 드러내서인지 리카드에게서 발해지는 압박감이 옅어진다.



“손님을 계속 서 있게 했군요. 실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앉아서 마저 이야기를 듣도록 하지요.”

“감사하네.”


드디어 경계심이 조금 풀린 리카드와 마주 앉았다. 그리고 정말 해를 가할 목적도, 성국 차원에서 무언갈 하러 온 것도 아닌 걸 분명히 밝혔다.


확실하게 믿음을 주기 위해 생명의 신, 루시아스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했다.


명색이 성직자이며, 주교인 자신이 신에게 맹세한 것이다. 암만 좋지 않은 인상을 지녔다 하더라도 가벼이 생각하진 않으리라.


역시나 그제야 완전히 의심을 거두게 된 리카드와 세리오가 제법 놀란 눈을 향해온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찾아오신 겁니까?”

“실은 어느 인물을 보러 온 것이라네.”

“······.”

“아아. 아까 맹세하지 않았나. 정말 무엇을 하려는 속셈 따윈 추호도 없네. 말한 그대로 그저 보려고만 온 것이야.”

“겨우 그런 일을 위해 주교가 시간을 내신 겁니까?”

“아니, 나에겐 겨우, 로 치부할 일이 아니네.”


‘자, 어떻게 되려나.’


누굴 만나러 온 것인지 반응을 보건대 리카드와 세리오, 둘 다 눈치챘을 것이다. 이 상황에 누굴 보러온다고 하면 뻔하니 모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모르겠다.


일단 성의를 보일 겸 정확한 목적을 제외한 전부를 솔직히 말하긴 했다. 할 만큼은 했고, 이젠 판결을 기다릴 뿐이다.


정 안 되면 몰래 만날 계획을 세웠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만나서 무얼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무것도. 그저 대화만 나누겠지. 물론 아무런 뜻도 없는 평범한 대화를 말하는 것이네.”


말을 들은 리카드는 고민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차분한 눈을 향해왔다.


다행이랄까, 아쉽게도 몰래 만날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못할 것 같다.


작가의말

나이 순서 : 인디아 > 리블리지 > 케트로 > 운 입니닷!!

네. 그렇습니다!

눈치채셨는지 모르겠지만 리블리지는 100살에 가까운 나이였슴다!!

그리고 인디아는 그보다 더 많슴다.

(매우 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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