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자운곡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꼬리로 말하기


꼬리로 말하기

 

 

  내게도 꼬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는 사람을 보면 꼬리를 흔들며 다가가는 털 강아지처럼, 얀 꼬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말하기가 왜 그리도 힘드는지요? 마음먹고 오해를 풀려고 나섰는데, 그 오해를 풀기가 왜 그리 힘드는지요?

 

  전철 안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났을 때, 나는 바보 같기만 했습니다. 무슨 말을 할까 고르고 고르다가, 겨우 어색한 웃음을 섞어 "잘 지내지?"  "응."  단답식으로 한마디씩 주고받았을 뿐입니다. 그녀를 만난 반가움을 백 분의 일도 말하지 못했는데, 어느새 내릴 역이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아아, 그때 내게 꼬리가 있었더라면 나는 분명 바람이 일도록, 그녀 치마가 풍선처럼 부풀어오르도록  하얀 꼬리를 흔들어 댔을 겁니다.

 

  생각해보면 꼬리를 흔들어 줄 사람은 한둘이 아닙니다. 나를 '빡빡 아저씨'라고 놀리는 가게 뒷집 장난꾸러기 녀석에게도, 엄마에게 혼나고 서럽게 우는 옆집 다미에게도, 고교 진학을 하지 못한 조카 친구 종현이에게도, 길가다 만나게 되는 목발을 짚은 사람들에게도, 화상으로 얼굴에 커다란 흉터가 남은 사람에게도 그때그때 꼬리를 흔들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순이 되어서도 수줍음이 남아, 마른 코를 훌쩍거리는 동네 아주머니에게도 미소와 함께 꼬리를 흔들어 주고, 말 없는 내 성격 탓에 자기를 좋지 않게 여긴다고 오해하는 동창 녀석에게도 보란듯이 꼬리를 흔들어 주고 싶습니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내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사람을 만나, 오줌을 지리도록 그리운 사람을 만나, 부채질하듯 흔들어댈 꼬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꼬리를 믿고, 아직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 그녀에게 먼지가 날리도록 달려가고 싶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내편이 되어 줄 것 같은 그녀 곁에서 초저녁부터 날이 샐 때까지 하얀 꼬리를 마냥 흔들어대고 싶습니다.

 

  망설이다 가슴에만 담아두었던 그 많은 말들……. 말보다, 생각보다 한 발 앞서 꼬리로 말하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모든 사랑은 강아지 꼬리처럼 단순구조이고 싶습니다.

 


댓글 0

  •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쓰기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글목록
번호 제목 작성일
25 내 일상 | 필명 '손님온다'로 변경했어요 23-03-28
24 내 일상 | 이게 눈물 날 일이 아닌가 *2 19-10-15
23 내 일상 | 시끄럽지만 더 듣고 싶은 소리 18-02-26
22 내 일상 | 왕파리 17-04-26
21 내 일상 | 3일 간의 만남 17-04-01
20 내 일상 | 랠리 이어가기 17-03-21
19 내 일상 | 할머니와 도자기 17-03-15
18 내 일상 | 이별하다 17-03-11
17 내 일상 | 천사들의 향유 17-03-07
» 내 일상 | 꼬리로 말하기 17-03-02
15 내 일상 | 함부로 힘을 주지 마라 17-02-24
14 내 일상 | 오해의 깊이 17-02-22
13 내 일상 | 자이언트의 행복 찾기 17-02-18
12 내 일상 | 영선이의 비밀 17-02-15
11 내 일상 | 어머니의 열무김치 17-02-09
10 내 일상 | 문득 드는 생각 16-10-21
9 내 일상 | 눈꼽 떼어주기, 그걸 내가 하고 있다 16-06-22
8 내 일상 | 돈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바퀴 잡는 법 16-03-07
7 내 일상 | 잡초를 키우며 15-11-23
6 내 일상 | 함께 15-10-05

비밀번호 입력
@genre @title
> @subjec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