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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혼 님의 서재입니다.

미드 리뷰


[미드 리뷰] 차근차근 시민혁명으로 나아가는 왕좌의 게임

1.

왕좌의 게임 시즌4의 마지막 장면.


아리아 스타크가 거친 대해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모습. 그리고 검은 구름으로 덮혀 있는 하늘과 그 구름 속 숨어 있는 찬란한 햇살.


아직 중세의 암흑이 세상을 덮고 있지만 그 이면엔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는 찬란한 태양이 숨어 있음을 상징하고, 그 찬란한 세상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누가 그것을 열어 젖힐 것인지에 대한 상징이 숨어 있다.


아리아 스타크, 존 스노우, 대너리스, 티리온 라니스터 등등...


몰락 왕족, 서자, 미성년자 여자 아이, 난쟁이 등등. 이들이 시민혁명의 주체로 등장함을 암시한다.



2. 

왕좌의 게임을 살펴보면 ‘개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이를테면 시즌1에서의 아리아 스타크를 예로 들 수 있다.


조신하게 귀족으로서의 신부 수업이나 받다가 신분 좋은 남자한테 시집가서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이 기사가 될 것이라는 아버지의 설득에 하지만 내 아들이 기사가 되더라도 내가 기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아리아. 그러면서 내 아들이 아닌 내가 기사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신의 삶의 주인공이 되려는 욕망이며 이로서 비로서 ‘개인’이라는 개념이 출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선 1876년 개항 이후 140년이 지난 이제와서야 간신히 ‘개인’이 출현하려는 조짐을 보이는데(이것은 최근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 보여지고 있다), 역시나 서구의 인문학이 한국보다 몇 백년 앞서 있음을 느끼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3.

시즌5에서 세르세이 왕비는 정치적으로 뼈아픈 실수를 한다.


꼴도 보기 싫은 며느리를 견제하겠답시고 종교 권력을 끌어들였는데 알고보니 이것들이 종교 근본주의자들.


이 근본주의자들은 처음에는 며느리를 견제하기는 하지만 문제는 왕비도 하도 구린 구석이 많은지라 이들의 표적이 되어 버린다는 거.


이 종교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왕비는 불륜 사실을 폭로당하게 되고 심지어 교회에서 궁궐까지 알몸으로 걸어가는 개망신을 당한다.


아들이 왕비를 구출하려고 하지만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는 종교 권력을 왕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어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는 가운데 결국 왕국 최고의 미녀로 칭송이 자자하던 세르세이 왕비는 알몸으로 조리돌림 당하고 성난 군중들로부터 똥물까지 맞으며 간신히 궁궐까지 걸어가는 치욕을 당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또 주목해 볼 부분이 거산의 등장.


마르텔과의 결투로 큰 부상을 입은 거산은 마치 프랑켄슈타인을 연상하는 모습으로 부활해서 실컷 민중들에게 조림당한 끝에 궁궐에 도착한 왕비를 보호하는데.


이 거산을 부활시킨 인물이 인체실험이라는 금지된 연구를 하다 마에스터 자격이 박탈됐다가 왕비에 의해 다시 등용된 카이번이라는 인물.


결국 과학이라는 것이 새롭게 부상하면서 종교와의 대립을 시작할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세르세이 왕비는 종교를 이용하려다가 결국 배신을 당했지만 결과적으로 과학이 종교를 밀어내고 새로운 세상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물론 그것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4.

시즌4에서 티리온은 좌절을 겪는다. 그리고 동시에 아버지를 석궁으로 쏘아 죽임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열어 젖히려는 의지를 보인다.


이 장면은 영화 사도와 대비가 되기도 한다.


아버지 영조를 죽이려고 칼을 들고 난입했지만 결국 죽이지 못하고 되돌아서는 사도세자.


반면에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고 있는 아버지를 석궁으로 쏘아 죽임으로써 냄새나는 시궁창에 구시대를 모욕적으로 처박아 버리는 티리온.


바로 이 부분이 한국사회와 서구 선진국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876년 개항 후 140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개인’이라는 개념을 어렴풋이 인식하긴 했지만 여전히 서구 선진국에 비해 한계가 있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5.

시즌5에서는 대너리스와 존 스노우가 큰 좌절을 겪게 된다.


대너리스는 정치와 군사에 필수적인 핵심 측근들을 잃으면서 권력 기반이 흔들린다.


통치에 필요한 핵심 측근이자 인재들이 떨어져 나간 상황에서 대중들의 지지도 잃어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결국 이 기회를 노리던 귀족들의 반란으로 큰 위기에 봉착한다.


존 스노우 역시 권력 기반이 흔들리면서 위기를 맞는다.


연이은 야만족들과의 전투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솔선수범을 하다보니 자신의 권력 기반이 되는 측근들을 자기 자신과 함께 가장 위험한 싸움터에 내보내야만 했고 이 과정에서 밑바닥부터 동지애를 다져왔던 그의 동료이자 측근들이 다 죽어버린다.


여기에 인문학적 재능이 뛰어나서 필요할 때 적절한 조언을 해줄 뚱땡이 친구까지 마에스터 교육 받고 싶다고 떠나 버리고 결국 권력 기반이 거의 붕괴되다시피 한 존 스노우는 반대 세력에 칼침을 수십방 맞고 죽는다.(시즌6에서 부활한다는 소문도 있지만 아직 확인된 것은 아니다)


시즌5는 세르세이 왕비, 대너리스, 존 스노우의 좌절을 통해 권력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특히 대너리스가 좌절하는 부분은 제작진들이 마키아벨리에 대한 연구를 심도있게 했음을 보여준다.



6.

시즌5에서는 주요 인물 외에도 흥미로운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산사 스타크의 탈출 장면.


브리엔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결국 산사가 도움을 요청하는 등잔불의 불빛을 못봄으로써 결정적인 순간에 두 사람은 어긋난다.


결국 산사는 자력으로 탈출을 하게 되는데, 이 부분도 봉건적 주종의 덕목인 충에 의해 인간의 자유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직접 행동하는 것으로써 자유의 실현이 달성됨을 암시한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스타니스 바리테온.


이 스타니스 바리테온은 아주 전형적인 봉건적 가부장 질서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우선 그의 딸이 얼굴에 장애를 입고 태어났으며 그로 인해 그의 아내는 끊임없이 죄책감과 자격지심에 시달리며 남편 눈치만 보면서 아무런 죄도 없는 딸을 태어나서는 안될 마귀로 매도하고 비난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딸을 화형까지 시켜가며 자신의 야망을 위한 제물로 삼는 것을 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음속에 감추고만 있었던 딸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물론 스타니스 바리테온도 딸을 제물로 삼은 것이 헛되게도 전쟁에서 패배하여 죽게 되는데.


전반적으로 시즌4와 5에서 죽는 인물들 중 타이윈 라니스터, 스타니스 바리테온 등은 봉건적 가부장 질서의 정점에 있는 인물들인데, 결과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실현을 위해 청산해야 하는 구시대의 권력임을 암시한다.



7.

시즌5까지의 줄거리를 모두 종합해보면 이 드라마는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명확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의 실현. 그것을 위한 시민혁명의 완수.


그리고 구시대의 봉건적 가부장 질서는 계속 죽어나가지만 또 한편으론 시민혁명의 주체인 주인공들도 여전히 고군분투하며 좌절을 맛보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통해 결국 인간의 자유라는 것은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피를 흘림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8.

어쨌거나 이 드라마를 보면 한국 드라마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서양쪽 드라마가 시민혁명이라는 커다란 틀에서 움직인다면 한국드라마는 전반적으로 민중혁명쪽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의 암살이란 영화도 그러했고, 요즘 방영하는 육룡이 나르샤라는 드라마도 민중사관쪽에 편중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민중사관이 옳으냐 그르냐는 별개로 치더라도 앞으로의 대중문화는 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결국 민중 중심에서 시민 중심으로 이행해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한다.


(아직 더 지켜볼 필요는 있겠지만)육룡이 나르샤의 시청률을 보니까 최근 주춤하는 기색이 보이고, 밤을 걷는 선비를 비롯해 상당수 민중 중심의 사극이 실패를 했던 사례를 보더라도 이제 민중사관이 담긴 드라마는 한계에 봉착한 듯 보인다. 



9.

그리고 또 하나 한국의 대중문화는 봉건적 가부장 질서에서도 빨리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봉건적 가부장 질서를 옹호하려는 대표적인 봉건주의자들이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만들어낸 대표적인 논리가 노론음모론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이 결국엔 노론이라는 사악한 세력의 음모라는 것인데, 이 논리를 끝까지 파고들다보면 당시의 최고 권력자인 왕들은 선량한데 그 밑의 교활한 음모를 가진 노론 신하들이 잘못이며, 이들 세력이 구한말의 친일 매국 세력으로까지 계승된다는 황당한 주장과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영조든 정조든 결국 그들의 본질은 봉건 군주일 뿐이다.


산사 스타크가 브리엔이라는 선량한 기사의 봉건적 충성심에 의지해 자신의 자유를 실현시킨 것이 아니듯이, 우리도 정조라는 선량한 봉건 군주에 의해 우리의 자유를 실현시킬 수 없다.


정조가 아무리 선량한 봉건 군주라해도 그는 그 봉건 군주의 한계를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이들 노론음모론을 주장하는 봉건주의자들의 또 하나의 문제는 이러한 봉건주의를 놀랍게도 민중혁명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량한 봉건 군주, 혹은 선량한 독재가가 민중을 선도하고 이끔으로서 완수되는 민중혁명.


이는 결국 북한이 김일성을 신격화했던 그 논리로 그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의 대중문화 속 히어로와 미국의 대중문화 속 히어로는 차이점을 가진다.


어벤져스를 비롯한 많은 헐리웃 영화의 히어로는 주체적인 시민들이 나서서 자신의 생명과 자유를 방어하는 자유의지로 가득찬 민병대의 개념이지만, 한국영화의 히어로는 민중혁명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거의 미륵이나 예수와 동급의 메시아 개념이다.


이렇게 보자면 봉건사회를 전혀 탈피하지 못했고 탈피할 의지도 노력도 없었던 1945년 해방된 한반도의 대중들을 놓고 봤을 때 김일성의 등장은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사 이야기는 이쯤에서 각설하고 다시 한국의 대중문화의 향방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렇다. 


나의 자유는 결국 나 자신이 실현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시민의 첫걸음이다.


시민에겐 선량한 아버지, 선량한 권력자, 선량한 독재자 등등이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시민에겐 정조라는 선량한 봉건 군주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앞으로 도래할 한국사회에는 봉건적 왕이나 권력자가 설 자리가 없고, 심지어 민중도 설 자리가 없다. 민중 역시 우리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견제해야 하는 대상이다.(대너리스에게 적의를 보이던 민중들의 태도를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이제 사도라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는 아들을 보여줬다. 구시대이자 봉건 가부장 권력의 상징인 아버지를 죽이기를 예사로 하는 서양의 대중문화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긴 하다.


한국인이 여기까지 오는데 무려 140년이 걸렸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죽이려고만 했을 뿐 실제로 죽이는 아들을 보여주는데는 한국사회가 커다란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 한계를 한국사회가 언제쯤 돌파할 수 있을지 앞으로 지켜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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