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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혼 님의 서재입니다.

방송 및 연예 리뷰


[방송 및 연예 리뷰] 응답하라 1988, 이제 한국 아버지들의 야욕은 추억 저편으로...

1.

극중 성동일은 아내 및 자녀들과 제대로 된 상의 없이 빚보증을 섰다가 쫄딱 망해서 온 가족을 반지하 단칸방에서 고생하게 만드는 무능력+무책임+무자비한 아버지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상황이 이러함에도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밖에서 필요도 없는 물건을 사들고 옴으로써 가정 경제에 지대한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오늘날 이런 아버지는 아내와 자녀로부터 당장 퇴출 1순위에 오르겠지만 그 당시엔 흔하디 흔했던 전형적인 한국형 폭군 아버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성덕선이라는 인물은 이렇게 무책임하게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고도 뻔뻔스럽게 자녀들에게 세속적 출세를 달성하라는 폭군의 강압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안하는 일종의 저항 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2.

그러함에도 성동일이라는 전통적인 한국형 폭군 아버지는 때론 희화화되고 때론 동정심을 자아내는 모습으로 추억되고 있다.


군대라는 부조리한 상황까지도 세월이 지나면 추억이 되듯이 전제적 폭압을 일삼았던 윗세대 한국의 아버지들 역시 그런 식으로 추억이 되고 있다.



3.

결국 이 드라마가 전체적으로 말하려는 것은 이거다.


과거는 그랬다. 비록 인간 개개인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수많은 권력들-사회적으로는 군부라는 폭압적 권력이, 가정적으로는 가부장이라는 폭압적 권력이-이 군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뭔가 그립지 않은가.


그리고 어쨌든 그 부조리한 권력들이 다시 부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군부 정권의 최루탄도, 빚보증 잘못 서서 온가족을 고생시키면서도 폭압을 일삼는 아버지도 그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기자...


대신 이제 가정의 의미는 확실히 정립을 하자. 봉건 사회가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고안해낸 장치인 충과 효라는 구시대의 가치관으로 사회와 가정을 정립하지 말자.


가정은 부모의 세속적 출세라는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러니 자녀들을 부모들의 야망 달성을 위해 전쟁터로 내모는 야만적 행위를 중단하라.


부모들이 굳이 자녀들을 전쟁터로 내보내지 않아도 자녀들은 언젠가 때가 되면 자연히 전쟁터로 뛰어 들어야 한다. 본인의 생존을 위해 전쟁터에 뛰어드는 것도 힘겨운 일인데 부모의 몫까지 짊어지워 전쟁터에 내몰지 말아라.


한국부모들, 한국아버지들의 야만적인 야욕은 더 이상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사회에서 가정의 의미가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한국인이 1년 지나 겨우 그 해답을 찾으면서 내놓은 작품이 바로 응답하라 1988이라고 보면 되겠다...



4.

장윤정 엄마가 딸에게 100% 질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자녀에게 설사 반지하 단칸방에서 1년 365일 김치와 콩나물국만 먹여도 낳아주고 키워준 것만으로도 은혜를 베푼 것이니 부모에게 그 은혜를 갚아라 라고 말할 수 있던 시대는 지나갔다.


자녀를 1년 365일 김치에 콩나물국만 먹이고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게 한 부모는 설사 그것이 부모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무능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일이라 할지라도 이제부터는 자녀에게 죄를 짓는 것이다.


세상은 바뀌어서 이제 고작 만4세의 아이인 추사랑에게 훈장님이 와서 부모에게 죄 지은 걸 실토하라고 하듯이 그렇게 죄책감을 강요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부모가 자녀에게 죄 지은 게 없는지 몸조심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그렇기 때문에 장윤정 엄마가 아무리 고생하면서 딸을 키워서 연에인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은혜를 갚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오히려 더 좋은 환경에서 연예인이 되기 위한 코스를 밟지 못하게 한 것에 대해 죄를 묻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세상이 왔다.


좋든 싫든 세상은 그렇게 변하고 있다.



5.

그 당시의 군부 권력은 여성과 자녀의 권리를 야만적으로 짓밟음으로써 폭군 아버지들이 얼마든지 맘 놓고 가정 내에서 전횡을 일삼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한국남성들은 이러한 전횡을 저지를 권력을 부여받는 대신 독재 권력을 지지하였다.


국제시장이란 영화에서 남편과 아내의 말다툼 장면에서 이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수세에 몰린 남편 덕수를 구원해준 것은 애국가였다. 때마침 울려퍼진 애국가 앞에서 부부는 싸움을 중단해야 했고, 쭈삣거리던 아내는 생판 알지도 못하는 중년 남성의 시선을 의식해 입을 닫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해야만 했다.


부부간의 의견 차이는 적절한 논의와 타협을 통해 조율되지 않는다. 오로지 국가라는 권력에 의해 폭력적이고 일방적으로 남편에게 유리하게 결정되고 만다. 아내나 자녀들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되고 만다.


하지만 세상은 변해서 90년대 들어서면서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기 시작했다.


2015년 현재 여성의 권리는 이제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신장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녀의 권리다.


효(孝)라는 봉건적이고 야만적인 가치관으로 독립적이어야 할 개인을 죽을 때까지 부모의 손아귀에 가둬놓고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시대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 사도가 나왔고 이제 응답하라 1988이 나오고 있다.



6.

이제 한국부모들은 야욕을 버려야 한다.


부자가 되고 싶거나 권력을 얻고 싶으면 본인이 노력해야 한다. 자녀들에게 부나 권력을 움켜쥐라고 요구할 수 없다.


특히 낳아주고 길러준 것이 자녀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니 부와 권력을 얻어서 부모에게 그 은혜를 갚으라는 뻔뻔하고 야만적인 말도 더 이상은 할 수 없다.


자녀가 그저 건강하고 밝게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껴야 한다. 자녀가 내가 번 돈으로 밥을 먹고 행복해하면 그것이 부모에게 은혜를 갚는 것이다.


요즘엔 남의 아이 잘못 만지면 바로 성추행으로 잡혀 들어간다.


그나마 내 자녀니까 마음대로 안아주고 뽀뽀도 할 수 있다. 이것만으로도 부모로서 낳아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키워준 것에 대해 자녀에게 보답을 받는 것이다. 그 이상은 바라지도 말아라. 그 이상 바라는 것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7.

그래서 이 드라마에선 부모가 자녀에게 미안하다고 하는 대목이 여러번 나온다.


사실 한국사회의 정서상 속으로는 부모가 자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품고 있을지 몰라도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심지어 가장의 잘못된 판단이나 무능력으로 온가족을 반지하 셋방에서 고생시키는 경우에도 오히려 가장은 당당하고 자식이 죄인으로 전락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선 다르다.


모든 부모들이 다 자녀에게 미안한 감정을 기본적으로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직설적으로 미안하다고 말한다.


심장병 수술을 받은 큰아들에게 건강하게 낳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라미란.

무책임한 빚보증으로 인해 온가족을 반지하 셋방에서 고생시켜서 미안하다는 성동일.

아들의 생년월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택이 아버지 최무성.


아마 부모가 자녀에게 이렇게 미안하다는 말을 많이한 드라마는 한국역사상 거의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야욕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만 자식이란 존재를 필요로 했던, 야만의 극치를 달리던 한국사회가 그래도 세월호 사건 이후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리고 변화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8.

한국에서 가족의 의미는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야 할 것 같다.


세월호 이전에 가정은 철저히 생산기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족의 모든 구성원은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자녀는 자녀 답게 행동함으로써 무언가를 생산하는데 기여하는 것에서만 그 존재 의의가 있었다.


이러한 산업화사회와 봉건사회가 결합된 가족의 의미는 세월호 사건 이후 변했다.


더 이상 생산기지로서 가족을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한국인들은 심각한 회의를 품었다.


그리고 이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세월호 이전이 비정상이었고 세월호 이후가 정상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적용해야 할 것이다.


가족의 존재만으로 행복을 느껴라. 내 가족이 밝고 건강하게 살면 그것이 행복이다. 그 이상은 욕망하지 말라. 반세기 넘게 한국 아버지들을 지배해왔던 그 야욕을 버려라. 더 이상은 그 야욕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이 최근 한국사회가 내린 결론이고, 그 결론을 응답하라 1988이 말해주고 있다.



이 드라마의 최대 수혜자는 아마도 성보라 역을 맡은 류혜영과 김정봉 역을 맡은 안재홍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극중 성보라를 처음 보고 깜짝 놀랐다. 필자의 막내 고모가 대략 비슷한 세대인데 분위기가 너무 똑같아서다.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캐릭터를 너무 잘 만들어놓았다. 배우 본인의 연기 내공에 제작진의 열정이 더해진 결과라고 본다.


그리고 김정봉이라는 캐릭터. 이 캐릭터는 현시대에 적합한 인간상이라고 본다.


과거 90년대 서울의 달이란 드라마에서 한석규와 최민식은 극의 중심추 역할을 했다.


한석규가 당시 고도성장기 한국의 탐욕스러운 개발주의를 상징했다면 최민식은 그 탐욕에 저항하는 서민주의를 상징했다.


둘 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캐릭터였다.


응답하라 1988에서 김정봉 역시 시대상을 반영한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몸이 건강하지 못해서 딱히 뭔가를 해내기도 벅차 보이는 부족한 인물. 하지만 그러면서도 오타쿠처럼 자기만의 세계를 확고히 구축해 취미 생활에 몰입하는 인물.


지금의 젊은 세대의 처지를 그대로 반영해준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희망을 꿈꾼다는 점에서 김정봉 캐릭터는 잘나고 멋진 캐릭터만 늘 승리하는 한국드라마에 질린 젊은 세대에게 희망을 안겨준다.


이런 점에서 류혜영과 안재홍. 이 두 사람은 드라마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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