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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를 지피는 아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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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술 먹으면 개

얼마 전의 일이다. 다시 또 친구를 팔아먹는 거 같지만, 온종일 키보드나 뚱땅거리고 어지간한 약속은 반려하는지라 평안하다 못해 재미없는 내 일상의 괴상한 일은 모두 이놈에서 비롯하니 별 수 없는 일이다.

여튼 이 친구는 그날 아침에 또 집을 나섰다. 그때는 등산. 그러려니 보내고 앉았다 누웠다 시간을 보내니 어느덧 새벽. 세 시쯤 되어서 초인종이 울렸다. 술이 떡이 되었겠거니 인터폰을 들여다보았더니 보이는 건 웬 경찰.

ㅇㅇㅇ씨 집이죠?

뭔가 글러먹었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순순히 수긍하고 따라나서자, 젊은 경찰은 위층으로 나를 안내했다.

친구 분이 술이 많이 취하셨더라고요.

어색하게 웃는 얼굴에서 상황의 곤란함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위층에 도착하니, 그곳에 세 사람이 있었다. 또 다른 경찰과 바로 윗집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 신발을 벗고 바닥에 누운 내 친구. 토사물과 알콜에 찌든 악취가 코를 찔러왔다.

아, 엿 됐구나. 멍하니 복도에 드러누운 멍청이를 보는데, 두 경찰이 꾸벅 인사하며 떠나갔다. 두 민중의 지팡이들은 다행이라고 시시덕거리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는데, 그중 대부분은 욕이었다. 술에 떡이 된 친구에 대한 것이 그 중 칠 할. 나머지는 도울 생각도 않고 도망치는 짭새들에 대한 것. 이건 비하가 아니다. 진짜 경찰이 맞다면 고작 한 층 아래로 옮겨주는 수고쯤은 할 수 있잖은가. 엘리베이터도 있는데.

도와드릴까요?

경찰이 떠나간 뒤에도 남은 집주인은 안절부절 못하며 내게 물었다. 대단히 고마웠지만 나로서도 낯짝이 있었는지라 정중히 사양하고 친구를 일으키려 했는데, 그제야 저들이 도망친 이유를 알았다.

유아로 퇴행이라도 한 모양이었는지 이 망할 자식은 손을 잡으면 손을 놓으라며 주먹을 휘둘렀고, 발을 잡으면 욕설을 퍼부으며 발버둥 쳤다. 생각 같아선 쌍욕을 퍼부으며 몇 대 줘 패고 싶었다만 목격자가 있으니 참을 수밖에.

잠깐 고민하다가 살인자가 시체를 옮기듯 두 다리를 꽉 잡고 질질 끌었다. 옷이 벗겨져 등이 쓸렸지만 내가 알 게 뭐란 말인가. 그 고마운 윗집 주민은 내가 손이 모자라 남겨둔 신발을 들고 따라와 줬고, 엘리베이터에 주정뱅이를 싣고서야 민망한 낯으로 감사와 작별을 고할 수 있었다. 그러고 다시 집 앞까지 이 얼간이를 끌고 왔는데, 현관이 좁았다. 안 그래도 좁아터진 집에 여전히 집에 들여놓은 자전거까지. 잠깐 맥이 빠져서 그냥 놔두고 있다가 잘도 주무시고 계시는 멍청이의 얼굴을 보니 열불이 뻗쳤다.

폰을 들어서 찰칵. 각도를 틀어서 다시 한 컷. 원거리에서 다시 찰칵. 멍청이의 역사에 대한 확고한 증거물을 만들고 짐을 빼내어 주정뱅이를 집으로 옮기는데, 그 왜 있잖은가. 집에 들어가는 문턱과, 신발을 벗는 바닥 사이의 십 센티 가량의 턱 말이다.

문턱을 넘으며 예상대로 욕이 나왔고, 일어날 생각도 없는 이 망할 자식이 다치지 않게 마룻바닥에 올리며 또 욕을 먹었다.

마주 욕하면 싸울지도 몰랐기에 좋게 타일러 집으로 들였더니만 혼자 뭐라고 웅얼거리며 잠든다. 술을 마시면 개라더니, 여기 그 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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