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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를 지피는 아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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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감금 당함

새벽에 친구가 여행을 떠났다. 바닷가를 간다며 온갖 짐을 바리바리 싸짊어지곤 사라졌고, 나는 글을 끼적이다가 잠들었다. 다시 깨어 씻으려 화장실에 들어갔더니 뒤에서 쿵 소리가 들렸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일을 마무리하고 나가려는데, 아뿔사. 문이 열리지 않았다. 친구가 짐을 옮기느라 기울어있던 망할 자전거가 쓰러진 것이다.

핸드폰도 놓고 왔고, 화장실에 있는 것들 중 탈출하는데 도움이 될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작은 창문이라도 있었다면 어떻게 비벼도 볼 법 했는데, 좁아터진 집구석이라 화장실엔 당연 창문도 없었다. 떠난 친구가 돌아오는 건 이틀 뒤. 나는 당장이 급했다. 문짝을 몇 번 밀어도 보고, 어깨로 쿵쿵 부딪혀도 봤지만 드러누운 자전거가 일어나긴 요원해보였다.

문을 부술까? 누가 들을 때까지 소리를 지를까? 고민하다가 변기에 앉아 담배를 태웠다. 한 오 분 앉아있으니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던 욕지기가 좀 가라앉았다. 그래, 이 망할 자식이 자전거를 현관 앞에 들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어. 사람하나 겨우 지날 공간에 놓인 쇳덩이가 어찌나 거추장스러웠는데.
친구 욕을 주워섬기고서야 화장실 바로 옆에 인터폰이 있음을 깨달았다. 좁게 열린 문 틈으로 손을 뻗으니 간신히 닿았다. 살결이 빨갛게 쓸리는 걸 감내하며 아둥바둥 누르고 또 누르다가 다시 변기에 앉았다. 뭔가 눌렀으니 신호가 오겠거니 담배를 입에 물었고, 약발이 떨어지자 나는 창살 밖의 과자를 향해 손 뻗는 원숭이처럼 다시 인터폰에 닿으려 안간힘을 썼다.
삐리리 삐리리
기어코 벨소리가 들렸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인터폰 너머에서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주세요, 화장실에 갇혔어요. 자전거가 쓰러져서 화장실에서 나갈 수가 없어요. 나는 얼간입니다, 도와주십쇼란 말을 풀어내자 당황하던 경비 아저씨가 호수를 물었다. 통화를 끝내고 나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안도감과 짜증, 쪽팔림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당도한 경비아저씨에게 비밀번호를 읊고서야 난 거지 같은 화장실에서 탈출 할 수 있었다. 아저씨는 내 쪽팔림을 짐작이라도 했는지 음료수라도 따라드려야 하나 고민하던 내게 아무 말도 않고 떠나갔다. 그리고 나는 감사하다는 글을 남긴 메모지와 근처 편의점에서 산 음료수를 관리사무소 앞에 놓고 돌아왔다. 얼굴을 보기 부끄러운 게 아니라, 못 본 거다. 일이 바쁘신 모양인지 관리사무소엔 아무도 없었다.
일은 해결 되었고, 나는 어이 없는 기억을 간직한 채 탈출에 성공했다. 아아, 일단은 저 망할 자전거부터 치워버리자. 아니, 그 전에 친구 놈과 이 망할 경험을 공유해야겠다. 분명 이 놈은 나보다 멍청할 것이니 두 시간은 갇혀있겠지.

댓글 2

  • 001. Lv.90 진리의근원

    16.05.18 23:50

    웃어서 죄송합니다. 소설-나는 영혼을 팔았다-을 볼 때 여자분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 002. Personacon 큰불

    16.05.19 00:33

    그런 흉악한 글을 여자가 쓸 리는 없을 거 같네요.
    웃으신 건 괜찮습니다. 저도 웃겨요. 당시엔 나름 심각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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