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화 5
정순은 열한 시가 가까울 무렵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어디 한 군데 안 아픈 곳이 없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몹시 피로하다. 일에 치이고, 손님들에게 치이고, 장사가 안 되어 심사가 좋지 않은 주인장에게 치이니 당연하다.
나이 먹은 여자로서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체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더욱 억척스레 버텨보지만, 손마디나 무릎, 허리는 점점 더 시원찮아진다. 왜 이렇게 사는 게 힘이 든 건지, 아들과 둘이 먹고 살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왜 이다지도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러한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이다. 비록 자리에 누우면 전신이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도, 집에 온 순간만큼은 말끔히 나은 것 같았다.
“엄마 왔다.”
“오셨어요.”
문을 열고 말하기가 무섭게, 상실이 나와 반긴다. 싱글싱글 웃으며 빼앗듯 짐을 가져가고, 오늘 하루의 일이 어땠는지를 묻는다.
“오늘은 어땠어?”
“늘 그렇지, 뭐.”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웃지 않을 도리가 없다.
솔직히 예전에는 아들이 야속하기만 했다. 엄마가 이렇게 고생하는데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엄마가 와도 게임하느라 바빠서 대꾸도 않거나, 말로만 오셨느냐고 인사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것에 비하면, 엄마가 왔다고 쪼르르 나와 인사하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지금은 철이 들었다 여겨졌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내 배에서 나온 자식이 맞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훤칠해졌다.
“공부는 열심히 했어?”
남들 다 가는 학원 한 번 보내주지 못한 어미로서, 공부에 대해 묻는 것도 미안했지만, 한창 공부할 학생을 자식으로 둔 이상 묻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고 요즘에 와서는 이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즐겁다. 아들과 많이 마주하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럼, 열심히 한 정도가 아냐.”
아니나 다를까,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루 종일 공부만 했는걸.”
이게 과장인지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게임도 끊고, 잠도 줄여가며 학업에 열중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엄마, 이거 봐라?”
쪼르르 방으로 달려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정순은 방석을 가져와 앉았다. 덩치는 산 같은 녀석이 하는 짓은 영락없이 애다. 꼭 어릴 때와 같아서 미소가 지어졌다. 요즘엔 일이 고되어도 행복했다. 아들 하나만 보고 살아간다는 것이 암담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아들을 보는 시간이 행복했다. 아들이 있기에 행복하다. 애 아빠도 같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괜찮다.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겠지. 암. 아무렴.
“짠!”
작은 종이를 들고 나선 상실이 자랑스레 그것을 앞으로 내민다. 그 과장 된 행동은 다른 사람이 보았더라면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었으나, 정순에겐 매일 보던 행동에 불과하다.
“뭔데?”
종이를 받아든 그녀는 그것이 성적표임을 깨닫고 놀랐다. 초등학교 때, 그것도 저학년 때를 제외하고는 상실이 순순히 성적표를 가져다 바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울며 겨자 먹기로 마지못해 가져오거나, 가져오지 않았다. 물어보면 되도 않을 변명으로 일관하던 녀석이었는데, 무려 자청해서 성적표를 보이다니.
기대에 가득차서 성적표를 펼친다. 아들이 눈을 빛내며 지켜보는 게 어지간히 자신 있는 것 같았다.
내용을 훑으며 정순은 정말 놀라버렸다. 보지도 못했던 중간고사 때의 끔찍한 점수에 놀라고, 그것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기말고사의 점수에 또 한 번 놀랐다.
평균 팔십이.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던 아들이었는데, 이렇게나 성적을 올리다니. 대견했다. 이만큼이나 점수를 올리려면 얼마나 공부를 했을까? 동시에 코끝이 짠해진다.
미안했다. 아들이 마음먹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보탬이 되어주지 못하는 못난 엄마라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먹고 사느라 바빠서, 무식해서 공부를 도와줄 수 없었음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잘했지? 잘 나왔지?”
신나서 묻는 아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준 그녀는, 주책없이 흐르려는 눈물을 참으며 칭찬해 주려했다.
“아들…….”
잘 했어. 이리 말하고 싶었다. 밝은 목소리로 칭찬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오는 목소리는 울먹거린다. 참고 있던 눈물이 결국 주르륵 흘러내린다.
“엄마?”
당황하는 아들에게 정순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미안하다, 엄마가……미안해. 학원도 못 보내주는 못난 엄마라서 정말 미안해.”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칭찬하고, 격려해 주고 싶었는데, 자격지심에 미안하다는 말부터 나와 버렸다. 정말 미안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가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이 죄스러웠다.
“아니, 괜찮아. 혼자서도 할 수 있는걸.”
아들이 고개를 저었지만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내 자식에겐 뭐라고 해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마음이 어찌 편하겠는가.
어디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쉬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쓸어내고 있자니, 상실이 손을 잡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손등을 쓰다듬는 손길은 차가웠다. 그것이 더 마음 아프다.
한참을 흐느끼고서야 눈물이 멎었다. 그제야 자식 앞에서 못 볼꼴을 보였다는 부끄러움이 생겨난다. 어색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니, 상실이 일어났다.
“엄마, 보여줄 게 더 있어.”
“응?”
붉어진 눈을 크게 뜨는 엄마를 뒤로하고 방에 들어간 상실이 곧바로 나온다. 손에는 또 다른 종이가 들려있었다.
“뭐니, 그건?”
질문에도 불구하고, 상실은 잠자코 서류를 넘겼다. 에스지 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서다. 당장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었었지만 오늘까지 참았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 그것이 꼭 학교 공부에 국한되진 않겠으나, 그가 당장에 보여드릴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었다. 연예인을 하겠다고 학업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증거가 필요했기에 지금까지 보여드리지 않았던 거다. 학업과 돈 모두를 잡을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다.
“계약서야.”
상실이 담담히 말한다.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계약서와 자신을 번갈아 훑는 엄마에게 말을 잇는다.
“부모님이 변호사인 애한테 부탁했는데, 아무 문제없대.”
변호사에게 직접 자문을 구했지만, 믿지 않으시거나 의심하실 것이기에 말을 지어낸다. 여전히 놀라 말이 없는 엄마에게 상실이 웃어보였다.
“엄마, 이제 호강시켜 줄게.”
- 작가의말
악마에 관해 말하고 싶은 사항은 매우 많지만, 작자가 스포일러를 벌이면 되먹지 못한 짓이죠. 고로 나중에 나올 내용으로 미루겠습니다. 다 합당한 설정이 있으니, 걱정 말고 보셨으면 합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효도하세요. 두 번 하세요.
물론 불효자인 저는 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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