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9
근래에 들어 기분이 우울해진 지원은 중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만났다. 고등학교 때 친해진 녀석들이 상실에게 한 번 데인 이후로는 근처에 얼씬도 않아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야, 반갑다.”
정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인사하노라니, 상실에게 당했던 굴욕이 거짓말 같았다. 당장이라도 무릎 꿇리고 윽박지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것이 착각임은 지원 본인이 더 잘 알았다.
“야, 근데 이 동네 괜찮냐? 연쇄살인마가 돌아다닌다며?”
영훈이란 친구의 말에 지원이 손을 내저었다.
“그거 밤에만 나타난대. 그리고 학생은 손대지 않는다던데? 아직까지 그 새끼한테 죽은 학생은 없다잖아.”
“부산에 있다는 놈은 나이에 상관없이 죽인다던데.”
“그건 그 놈이고. 이 동네 놈은 아니래.”
“그래?”
시시덕거리며 번화가를 돌아다니던 그들은 당구장을 갈지, 피시방을 갈지를 놓고 고민했다. 오래지 않아 결론이 내려졌다. 당구장을 가기로.
“내가 싼데 알아.”
지원이 앞장서는데 뒤에서 누군가 물었다.
“인간 상실은 요즘 뭐하고 지내냐?”
비웃음 가득한 말에 주변에서도 와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래, 너 같은 학교라며. 무단결석해서 자살하는 거 아니냐고 문자도 보냈었잖아.”
“학교는 나왔어?”
“아니지, 이거부터 물어봐야지. 그 병신 자살은 안했냐?”
친구들은 낄낄거렸지만 지원의 표정은 그와 대조되었다. 억지로나마 웃으려했지만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이렇게 비웃고 있는 녀석에게 된통 당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사람이 달라졌다는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거다.
“그냥, 그렇지 뭐.”
더는 이 이야기를 않으려 에둘러 말 했지만, 친구들은 대화의 주제를 바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찐따새끼, 얼굴에 여드름 기억하냐?”
“시발, 말하지 마. 상상만 해도 토 나온다.”
하나가 구역질하는 시늉을 하자, 여기저기 과거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가 연이어 흘러나왔다.
“그거 집도 좆나 가난해서 셔틀로도 못 써먹었잖아. 나도 오백 원 주고 과자랑 음료수 사오고, 삼백 원 거슬러오라고 해보고 싶었는데.”
“체형도 완전 이티잖냐. 여자애들도 완전 혐오스러워하고 장난 아니었지.”
친구들의 말이 이어질수록 지원의 안색은 굳어만 갔다. 과거에야 말한 그대로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 반대다. 키가 일 미터 구십은 될 정도로 커버리고, 여드름이 사라진 얼굴은 연예기획사에서 찾아올 정도로 잘생겨졌다. 무엇보다 무서워졌다. 그 시선.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던 무시무시한 두 눈과 도저히 같은 또래라곤 생각되지 않는 힘은 과거의 상실과는 도저히 연결시킬 수 없을 정도다.
상실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심장이 뛴다. 새카만 눈동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두려웠다. 그러다 지원은 문득 자괴감에 휩싸였다.
분명히 그 놈은 병신이었는데. 누구에게 물어도 세상에 둘도 없을 상병신이었는데,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되었지? 어째서 네놈만 그렇게 변해가고, 나는 그대로지? 왜 네가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나는 떨거지처럼 취급되어야 하지?
자괴감은 곧바로 박탈감으로, 박탈감은 증오로 뒤바뀌었다. 빼앗고 싶었다. 상실이 가진 관심을 모두 빼앗고, 지현도 빼앗고, 옛날처럼 비웃고 무릎꿇려놓고는 또 다시 비웃어주고 싶었다.
속에서 검은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느낌에 이를 악물은 소년은 다음 순간 절대 잊을 수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상실과 지현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현은 휑하니 돌아갔고, 홀로 남은 상실은 그에 개의치 않고 어딘가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원이 죽일 듯 노려봤다.
너는 내가 가지고 싶은 걸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구나. 시건방진 새끼. 세상이 우습냐? 내가 같잖아 보여?
“야, 왜 그래?”
안내하다 말고,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는 그에게 친구가 물었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지원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 아냐. 아무것도…….”
그러다 지원이 음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너희 당구보다 더 재밌는 일 안할래?”
“재밌는 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흰 모르겠지만, 상실이 새끼, 여자 친구 생겼다.”
“진짜?”
“우리가 여기 안 산다고 구라치면 안 된다, 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지만 예상그대로다. 요즘 상실의 모습을 모르는 이 녀석들이라면 생각한 그대로 움직여주겠지.
“구경 갈래? 내가 방금 봤는데.”
눈치를 살피던 소년들의 눈에 호기심이 생겨났다.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녀석들도 따라서 끄덕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원이 앞장섰다.
“따라와.”
걸음을 옮기며 그는 머릿속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놔두고 상실을 택한 지현에 대한 감정과,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버린 상실에 대한 증오가 어우러져 머리가 뜨거웠다. 온갖 생각이 휘몰아치다가 끝에 가서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나도 네게서 빼앗아 가겠어. 내가 가지지 못하면 너도 못 가져. 네가 예전과 다르지 않은 녀석이란 걸 보여줄게.
앞으로 있을 일을 떠올리며, 지원은 가학적인 미소를 지었다. 상실에게서 뭔가를 빼앗는다는 사실과 감히 나를 받아주지 않은 것도 모자라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상실에게 목을 매고 있는 지현에게 복수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뭐라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무엇이라도.
- 작가의말
독자를 설레게 하는 빠른 연참.
글이 잘 뽑히면 하나 더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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