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8
계약서를 받자마자 상실은 아무도 없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준비해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옷가지를 걸친 소년의 형상이 검게 물들더니, 사십 즈음의 남자로 변화한다. 어느 모로 보나 인상에 남지 않는, 많고 많은 사람들 중 하나로 보였다.
자신의 행색을 살펴보고는 점찍어 두었던 변호사 사무실로 향한다. 동길이 겁먹어서 좋게 썼을 수도 있지만, 혹시나 모르는 일이다. 그 와중에도 자신의 잇속을 챙겼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렇기에 확인이 필요했다.
돈이 들기는 하지만 계약서를 확인할 돈쯤이야 넘쳤고, 만약에 독소조항이 들어있다면 변호사의 자문을 받아, 다시 동길과 대면하면 될 일이다. 인간과의 교섭에서라면 무슨 상황에서라도 우위에 설 자신이 있으니, 입맛대로 수정하기란 어린애 손목 비틀기나 다름없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직원이 웃는 낯으로 맞이한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계약서 내용을 확인하려 하는데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자리를 권한 직원이 차를 내어왔다. 곧 변호사로 보이는 남자가 직업적인 미소를 지으며 맞은편에 앉는다.
“반갑습니다, 변호사 이 철용입니다.”
그가 명함을 내밀었지만, 상실은 받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계약서를 내밀었다. 철용이 머쓱하게 그것을 받아든다.
“조카가 받은 계약섭니다. 문제가 있는지 봐주세요.”
“허, 그 사람들이 이런 걸 누출시키진 않을 텐데.”
연예기획사의 명칭이 적힌 내용을 보며 철용이 혀를 찼다. 무슨 수로 빼냈는지가 궁금해 물어보려니, 상대는 가늘게 뜬 눈으로 무심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뭔가를 물어볼 분위기가 아닌지라 계약서를 읽던 변호사의 시선이 모호해졌다.
그가 알기로 연예기획사와의 계약은 대부분 영입대상자가 압도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유명한 사람이라면 모를까,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신인이라면 당연한 조치다.
키우고, 홍보하고, 스타로 발돋움 할 때까지의 모든 비용을 회사에서 감당해야하니 그렇지 않고서야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꼭 뜬다는 보장도 없으니, 남들이 보기에 노예계약이라 칭하는 것들도 사장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계약서에는 그런 독소조항이 없었다. 어느 모로 봐도, 공평한 계약서였다. 어떤 면에서는 회사가 계약자의 편의를 봐주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는 혹시나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서 계약자의 이름을 다시 살폈다. 하지만 역시나 이 상실이란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다.
“혹시 조카분이 이번에 데뷔하시는 겁니까?”
“예, 문제 있습니까?”
“아뇨, 조건이 너무 좋아서요. 굳이 따지자면 문제가 없는 게 문제랄까요.”
그 말에 상실이 계약서를 빼앗듯 되돌려 받았다. 문제가 없으니, 더 이상 대화할 필요도 없다. 이제 마지막 일만 남은 셈이다.
“자문비용은 어떻게 됩니까.”
그러자 변호사가 슬며시 웃었다.
시험이 끝난 주말의 도서관은 조용하다. 있는 이들이라곤 대학생이나 취업 준비생뿐이다. 그 중 유이한 고등학생인 상실과 지현은 눈에 뜨일 수밖에 없다. 둘 모두 쉬이 보기 힘든 외모였으니 종종 시선이 닿음은 당연했지만, 그 중에서도 지현의 복장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길게 늘어진 상의에 핫팬츠, 스니커즈를 갖춰 입은 소녀의 모습은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오늘은 놀고야 말 것이란 야심으로 가득해 있었는데, 도달한 장소는 결국 케케묵은 도서관이라니. 그녀가 묵묵히 문제집을 풀고 있는 상실에게 눈을 흘기자, 소년이 힐끗 쳐다본다.
“뭐?”
“아니.”
눈을 마주치니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았기에 소녀는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신 속으로 연방 한탄을 늘어놓았다. 이 좋은 날에, 시험도 끝난 청춘남여가 기껏 도서관에 묶여 있어야 하다니. 저 녀석은 남자도 아니다. 목석도 이런 목석이 또 있을까.
“여기, 이거.”
속도 모르고 모르는 문제를 물어오는 그에게 한바탕 뭐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러기엔 역시나 무서웠다. 요즘에야 잠잠하지만 아직도 협박조로 가르치라고 압박하던 때의 상실이 떠오른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순순히 문제를 풀이해주었다. 그나마 아직까지는 가르치는데 무리가 없었다. 대신 앞으로가 문제다. 도대체 얼마나 공부를 하는 건지, 진도를 따라오는 속도가 무시무시할 정도다. 이만큼 하려면 잠을 포기하지 않는 한은 무리라 여겨졌지만, 상실이 조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 건지 캐묻고 싶은 심정이다.
덩달아 지현도 죽어라 공부를 하고 있으니, 이대로 가면 일 학년이 끝나기도 전에 이 학년 과정의 반을 끝낼 판이었다.
잠시 뒤, 지현의 요청으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한 그들이 벤치로 나왔다. 소녀가 도서관 내에서는 시끄러울 수 있기에 묻지 못했던 것을 캐묻기 시작했다.
“그거 어떻게 됐어?”
“잘 됐어.”
만족스럽지 못한 답이다. 지현이 원하는 말은 어찌어찌해서 어디와 어떻게 계약을 하게 되었고,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이 될 것이다 정도였다. 가능하면 그 과정을 세세하게 듣고 싶은 마음이다. 허나 상실이 먼저 나서서 말할 인간은 아님을 알기에 아쉬운 쪽이 우물을 팔수밖에.
“어디랑 했는데? 케이유? 케이유가 유명하잖아.”
“에스지.”
“왜?”
“조건이 맞아.”
잔뜩 궁금해서 묻는 것에 비해, 상실의 답변은 심드렁했다. 이런 생산성 없는 대화를 할 시간에 문제 하나라도 더 보는 게 도움이 될 터였다. 그렇다고 지현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은 말상대를 해줬다.
“조건이 어떤데?”
“좋아.”
“…….”
누가 봐도 귀찮은 티가 역력한 답에 지현은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이런 대화가 계속 반복되자니 짜증이 확 몰려온다. 정말이지 생각 같아선 터트리고 싶었다. 물론 그걸 받아줄 상실이 아니기에 속으로 쌓여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만 있었다.
결국 저녁시간이 될 때까지 성에 차는 대화도 하지 못하고, 죽어라 공부만 하다가 도서관을 나서게 된 지현은 잔뜩 삐져서 말도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반면 상실은 원하던 일을 다 했기에 홀가분하게 돌아가려했다. 그러다 도중에 악의어린 시선을 느꼈다. 어느 곳인가 돌아보았으나 이미 대상은 그 자리에 없었다. 잘못 느낀 건가 생각했지만, 그럴 리 없다.
사람이었을 적에야 아무도 없는 곳에서 누군가의 시선을 받는 듯한 착각이 종종 들었지만, 현재 시선을 느낀다면 정말 누군가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엄마를 습격했던 미친놈을 놓치기 전이라면 뭐가 어쨌건 집으로 돌아가거나 끼니를 찾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사소한 것에도 신경이 쓰였다. 거슬리는 건 죄다 잡아 뿌리를 뽑지 않고는 성에 안찬다.
어디 있나 주변을 살핀다. 허나 훔쳐보던 대상을 놓친 지금은 도무지 찾을 방도가 없었다. 포기하고 돌아갈까 생각하던 순간 어딘지 익숙한 악의의 냄새가 풍겨왔다.
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은 그의 몸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 작가의말
요즘 워웍에 재미를 붙였는데요, 중급 컴이랑 하면 신인데, 사람이랑 하면 병신이 되어버리더군요. 어렵습니다, 어려워요.
여튼 너무 글을 쉬어서 양심에 찔리는지라, 오늘 한 편 더 갑니다. 시간은 랜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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