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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씨를 지피는 아궁이

일기


[일기] 다각따각다가닥

요즘 손목이 아파온다. 구부정하니 굽힌 허리하며 어찌 놓는지 모를 손의 자세에 뻑뻑한 멤브레인 키보드의 타건감 등등 총체적인 상황이 내 손가락과 손목 관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서 였을까? 다른 거야 그러려니 해 왔지만 키보드 만큼은 하루라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본래 쓰던 물건은 마구 쳐대는 타자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꾹꾹 힘을 주어야만 눌리도록 늙어버렸고, 그를 대신해 들여온 녀석은 가벼운 키감만을 바랐을 뿐인데 반 년도 채 쓰기 전에 빠직빠직 죽겠다는 소릴 토한다. 그 장단에 내 손가락도 같이 삐걱삐걱. 하루가 다르게 골병드는 손을 보고 있자니 이대로 가다간 얼마 못 버티고 병원을 가게 되진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다 문득 기계식 키보드를 떠올렸다.

한 번 써보면 멤브레인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느니, 도끼와 전기톱의 차이라는 둥, 손가락이 한 결 편해진다는 이야기들에 혹해서 통장을 살폈다. 처량한 잔액에 신품의 욕심을 버리고 누구 놀고 있는 중고가 있지 않을까 문의 글을 올렸다가 이내 지웠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만에 하나 얼굴 붉힐 일이 있다면 물의가 될 수 있고, 들여 온 녀석이 내 손에 맞지 않는다면 그 또한 문제가 될 터. 한참 고민하다가 직접 눌러보고 살 수 있다는 매장으로 향했다.

같은 자판인데 큰 차이가 있을까 생각하며 제일 싼 걸로 입문하자 마음 먹고 당도한 매장에서 사장에게 묻지도 않고 전시 된 녀석들을 이것 저것 눌러 보았다. 십 단위를 넘어가는 가격표 값을 하는 건지 과연 손에 들러붙는 맛부터가 다르더라.

어느 놈은 손가락을 따라 쫀득하게 달라붙고, 어느 놈은 누른 듯 만 듯 소리도 없이 내려 앉았다 올라온다. 또 어느 놈은 경쾌한 소릴 내며 따각따각 손 끝에 걸리는 느낌이 퍽 좋다. 이놈저놈 타작하다보니 결국 가격표가 높은 놈에게 시선이 가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을까.

가격표는 17.5

녀석을 눌러보다가 옆의 저렴한 것을 누르며 그래, 이정도면 되지. 일단 입문부터 하면 되잖아? 자위해 보지만 아쉬움에 먼저 녀석으로 손이 간다. 매장을 뱅뱅 돌다가 여전히 변함 없는 17.5 앞에 돌아와서 몇 푼 들지 않은 카드를 만지작 거리길 몇 번. 눈 딱 감고 내질렀다.

반딱반딱한 포장을 어루만지다 보니 이번엔 손목 거치대가 눈에 밟힌다. 어차피 손목 아끼겠다고 산 마당에 저것도 있으면 좋을 거 같아 원목으로 된 놈을 빤히 바라보자니 탐심이 절로 솟아오른다. 이미 한 걸음 내딛은 마당이라 이번 고민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비닐에 두 놈을 담아 돌아오는 내내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모른다. 집에 당도해 새로 끼워 넣으니, 가지런히 놓인 모양새가 퍽 보기 좋다. 가볍게 내딛는 손가락을 따라 따각다각따가닥 울어대는 소리가 경쾌하다. 타자가 아니라 건반이라도 치듯 흥이 올라 아무 내용이나 써내려갔다가 줄줄이 지워버렸다. 장인은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더니, 새 연장을 마련했다고 글이 바로 써지는 건 역시 아닌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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