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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희 님의 서재입니다.

퇴물 살수는 이능으로 살아남는다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판타지

사바희
작품등록일 :
2024.08.17 16:31
최근연재일 :
2024.09.15 12:10
연재수 :
34 회
조회수 :
2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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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
글자수 :
235,814

작성
24.08.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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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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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6쪽

4화-진짜 너무하네

DUMMY



“···선배님과 저 밖에 안 남은 겁니까?”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삼백이십팔 호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한 눈으로 삼백이십팔 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이 살아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다.

어림잡아도 서른 명은 될 법한 살수들이 전멸했다. 그런데 신입사원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할 만큼 어리바리하던 놈이 사지 멀쩡한 상태로 내게 말을 걸고 있으니, 무슨 몰카라도 당하고 있는 것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아니면 녀석이 무협지에서 흔히 나오는 실력을 숨긴 반로환동한 고수이거나.

내가 뻣뻣하게 굳은 채, 반응이 없자, 삼백이십팔 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왔다.


“선배님?”


앳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괘, 괜찮으십니까?”


안도와 걱정이 섞인 물음에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물었다.


“금창약 가진 거 없나?”


복면 아래의 눈을 살짝 크게 뜬 삼백이십팔 호가 자신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대답했다.


“임무에 투입될 때는 자결단 말고는 휴대하면 안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순간, 나는 혓바닥을 굴려 입안을 조심스레 더듬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협지에 등장하는 살수는 대부분 엑스트라다. 엑스트라 중에서도 대사 한마디 쳐보지도 못하고 즉사하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혹여 사로잡혔다고 해도 거의 대사는 하지 못한다.

의뢰자를 밝히지 않기 위해 대부분 입안에 숨겨둔 독단을 깨물고 자살하기 때문이다.

가끔 독단 대신 심령에 금제를 걸어 놓아 게거품을 물고 죽는 일도 있지만, 그런 건 주로 엑스트라를 벗어난 조연급 정도 되는 살수 조직의 간부들에게나 해당되는 경우였다.


‘!!!’


그때, 왼쪽 볼 아래, 어금니가 있어야 할 곳에 이질적인 뭔가가 혀끝에 걸렸다. 땅콩이나 아몬드처럼 딱딱한 질감이었지만, 깨물면 금방 부서질 것 같은 그것은 다른 이보다 높이가 약간 낮아서 어금니를 꽉 무는 동작으로는 위쪽 어금니에 닿지 않았다. 다만 실처럼 느껴지는 뭔가와 연결되어 있어, 혀를 놀려 실을 움직이거나 볼을 잡아당기면 쉽게 깨트릴 수 있는 구조였다.

아까 꿈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려고 꼬집었던 볼이 오른쪽이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매번 무협지를 볼 때마다 궁금했던, 살수들의 독단 숨기는 방법을 몸소 확인하고 나니, 새삼 내가 처한 상황에 욕이 나왔다.


“···시벌.”


내 입에서 흘러나온 욕설에 삼백이십팔 호가 목을 움찔거리다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배님 원래 말을 할 줄 아셨습니까?”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나는 삼백이십팔 호의 불신을 담은 눈빛을 바라보다가 조금 전, 내 대답을 들은 매부리코의 눈에 떠올랐던 이채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이 몸의 주인은 원래 말을 못 했거나, 말을 못 한다고 오해를 받을 정도로 과묵했던 것이다.

삼백이십팔 호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린 나는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리해라.”


매부리코에게 받은 명령을 은근슬쩍 떠넘기려 했지만, 녀석은 난감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저······, 이번이 첫 임무라······.”


전형적인 신입사원의 대답.

회사였으면, 신입사원 OJT라고 생각하고 옛날얘기를 곁들여 가며 방법을 알려줬겠지만, 지금은 녀석보다 내가 더 아는 게 없는 상황.

나는 삼백이십팔 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네 생각에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순간, 삼백이십팔 호의 눈가에 살짝 존경의 빛이 스쳤다.

내 머리로 도통 해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일단 질문부터 던져 보는 것은 다년간의 직장생활을 통해 몸에 익은 습관이었다.

민주적 의견 반영을 가장한 이 고민 떠넘기기가 삼백이십팔 호에게는 경험 없는 자신의 의견까지 물어주는 속 깊은 선배의 배려라 생각했는지, 녀석은 한참이나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을 거듭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음······ 애초에 화골산 같은 고급 약재는 우리처럼 하급 살수들한테는 보급도 안 되고.”


아. 역시 그런 거였나?


“파묻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습니다. 온통 갈대밭이라 땅 파기도 힘들 것 같고.”

“저기는 어때?”


나는 손가락으로 조금 전 도망치려고 고민했던 강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쪽을 바라보던 삼백이십팔 호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강바닥에 가라앉히려면 바위 같은 무거운 거에 묶어야 합니다. 아니면 금방 떠올라 버리죠. 게다가 이 많은 시체를 저기까지 옮기기에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옮기다가 갈대밭에 더 많은 흔적이 남을 거고요.”


오. 이 새끼 봐라?

속으로 살짝 감탄하고 있는 와중에 삼백이십팔 호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태우죠.”

.

.

.

바싹 마른 가을 갈대밭은 불을 놓자마자 무섭게 타올랐다. 이 정도 불길로 시체가 전소할 리는 없을 테지만, 불길이 잡힌 후에 누군가가 발견한다고 해도 신원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잘 타네.”


우리가 불을 놓은 갈대밭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에서 나는 살짝 오줌이 마렵다는 생각을 하며 중얼거렸다.

왜 불을 보면 오줌이 마려운 걸까?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어린 시절, 깡 시골이었던 외갓집에서 동네 형들과 쥐불놀이를 했을 때는 정말 오줌을 지렸던 것 같기도 했다.

그때 생각을 하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걸까?

한참을 불길을 내려다보고 있던 나는 삼백이십팔 호를 돌아보았다. 녀석도 뭔가 사색에 빠졌는지 멍한 눈으로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사된 불길이 일렁이는 녀석의 눈동자를 보며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 거냐?”


잠시 다른 생각을 했는지, 녀석은 고개를 살짝 흔들며 반문했다.


“······네?”

“어디로 갈 거냐고.”

“어디라뇨?”


삼백이십팔 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재차 물었다.


“돌아갈 데가 없느냐?”

“······복귀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물음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반문이 돌아왔다.

나는 녀석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며 물었다.


“살수 생활을 계속하고 싶은 게냐?”

“안 하면요······?”


조심스럽게 묻는 녀석에게 나는 눈웃음을 지어주며 말했다.


“이대로 떠나면 되지 않겠느냐. 오늘 너도 봤겠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파리 같은 살수의 삶보다는 아무도 없는 심산유곡에 들어가 무공을 닦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 말이다.”


내 말에 삼백이십팔 호는 살짝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배님······, 이게 혹시 첫 임무를 나가면 선배들이 한다는 신고식 같은 겁니까?”


뭐? 신고식? 녀석의 말뜻을 몰라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녀석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저도 다 들었습니다. 첫 임무를 마치면 선배들이 이대로 강호에 스며들어 몸을 감추고 살자고 묻는다고요. 뭐. 머릿속에 고독(蠱毒)이 있는 걸 잠시 까먹은 신입들을 골탕 먹이려는 짓궂은 장난이라고 들었습죠.”

“음.”


뭐? 시발, 고독??

정기적으로 해약을 먹지 않으면 발작을 일으켜 광인이 되거나 즉사한다는 그 고독?


“괜히 장난치지 마십시오. 선배님. 한 달도 못 버티고 백치가 될 삶보다는, 죽어도 살수로 성공하고 싶습니다.”


결연한 눈빛의 삼백이십팔 호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나는 애써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은 자세다.”


내 대답에 삼백이십팔 호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 씨발. 기연은커녕 백치가 될 뻔했네. 더러운 살수 새끼들.

그런데 내 머릿속에 진짜 고독이 있다고? 나는 직감했다. 이 고독을 제거하지 않는 한, 이곳에서 나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무슨 방법을 쓰던 간에 일단은 이 고독부터 제거해야 한다.


마음 속으로 굳은 다짐을 한 나는 삼백이십팔 호와 함께 맹렬하게 번져가는 불길을 등지고 자리를 떴다.

시체 타는 냄새를 맡으며 죽치고 앉아 있을 이유도 없었고, 이미 사위가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는 것이 고독의 발작에 대비하는 것이기도 했고. 니미럴.


나는 부상을 핑계로 삼백이십팔 호에게 길잡이를 맡겼다.

갈대밭 주변을 벗어난 후, 삼백이십팔 호는 인적이 없는 야산으로 방향을 잡았다. 현대식 조명이 사라진 밤은 예상보다 훨씬 더 어두웠다.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달빛 만이 유일한 광원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녀석은 능숙하게 숲길을 가로질렀다. 애초에 낮처럼 밝은 밤을 경험해보지 못했을 테니 밤눈이 밝은 것이 녀석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나도 비록 몇 번 발을 헛디딜 뻔했지만, 녀석의 등을 보며 꾸역꾸역 발걸음을 옮겼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집중해서 걷다 보니 줄곧 신경을 자극했던 고통도 오히려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고통이 옅어지자 지금까지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생각들이 하나둘 차례로 떠올랐다.

일단은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문제였다.


분명 나는 꽉 막힌 경부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마지막 기억은 꺼진 스마트폰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빛무리에 눈을 감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곳에서 눈을 뜨게 된 것일까?

정말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니 뭐니 하면서 회귀라도 하게 해달라고 중얼거렸던 그 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 상황 모두가 빌어먹을 악몽인 걸까?

꿈이라고 하기에는 겪고 있는 모든 것들이 너무도 생생했다. 혹시 한숨 자고 나면 다시 경부고속도로 위일지도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던지던 나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이 모든 것들이 자고 나면 깨어날 더러운 꿈이라면 굳이 머리 아프게 고민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꿈이 아닐 경우였다.


갈대밭에서 눈을 뜬 후부터 여기까지 오면서 알게 된 첫 번째 정보는, 이곳이 대낮에 수십 명의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는 살벌한 곳이라는 것이다. 협의니 정의니 하는 개념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이곳이 내가 동경하던 무협이라는 세계인지조차 모호했다.

하긴, 무협이라는 세계관 자체가 일반인들 수십, 수백보다 강한 무림인들이 서로 주먹질하고 칼질하는 것이 기본 설정.

현대인인 나에게 무협은 폭력과 살인이 난무하는 무법천지와 다른 바 없었다.

두 번째는, 빙의인지 전생인지 모르겠지만, 재수 없게도 내가 살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협지에서 가장 인기 없는 직종 중의 하나. 그것만으로도 억울한데, 딱히 내세울 만한 무공도 없는 늙다리 살수.

오늘은 어찌어찌 요행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이런 스펙으로 과연 얼마나 더 이 무법천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할 정도였다.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건, 중년인을 상대했을 때 보였던 붉은 기운이었다. 정체 모를 그 기운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모르긴 몰라도 중년인의 약점이었으리라 짐작 정도는 하고 있지만,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머릿속에는 고독이라는 이름의 악성 기생충이 심겨 있다. 빌어먹을!

암담한 생각에 머릿속을 지배당한 상태로 얼마나 더 걸었을까?


“선배님. 이쯤에서 좀 쉬었다 가시죠.”


심연처럼 이어지던 적막이 삼백이십팔 호의 목소리에 깨어졌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자칫하면 부딪힐 뻔했지만, 나는 뒤를 돌아보는 녀석을 향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러지.”


시계가 없으니 정확하게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사위가 조금씩 밝아 오는 것으로 보아, 밤새 쉬지 않고 산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었다.

기계적으로 계속되던 걸음을 멈추자, 급격히 피로감이 몰려왔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의지해 가까이에 보이는 소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앉자, 삼백이십팔 호도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숨은 녀석 또한 체력의 한계에 도달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여기가 어디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나는 녀석과 같은 살수 조직에 속한 선배. 그런 질문을 던졌다가는 내 정체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녀석과 나는 잠시 아무 말 없이 땀을 닦으며 숨을 고르고 앉아 있었다.

동이 트기 시작했는지, 시야가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은 완만하게 높아지던 경사가 갑작스레 가팔라지는 산의 경계였다.

아무래도 앞으로 이 산을 올라가야 할 것 같았는데, 체력이 고갈된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뒤통수를 나무에 기대며 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훔쳤다. 아직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는 복면이 질퍽한 땀을 소매에 쏟아냈다. 복면 벗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밤새 걸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허!”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삼백이십팔 호가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물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십중팔구 깊은 잠에 빠질 것 같았다.


“아니다.”


내 대답에 아무런 말이 없던 녀석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말했다.


“네. 정신 차리겠습니다. 선배님.”


뭔가를 오해한 게 분명한 것 같았지만, 딱히 따져 물을 힘도 없었기에 나는 고개만 살짝 까딱였다.

잠을 쫓으려는 듯 고개를 몇 번 더 흔들어댄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이번에 다른 선배들이 했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 녀석이 갑자기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빤히 올려다보자 녀석이 굳은 팔다리를 풀며 말을 이었다.


“우리 명부동(冥府洞)이 개동(開洞)한 이래, 평살수로는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십일 호 선배다. 비록 벙어리일 지는 몰라도, 그가 십일장생(十一長生), 활강시(活僵尸)같은 별호로 불리는 데에는 분명 범인(凡人)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속한 살수 조직의 이름이 명부동이었나 보다. 그런데 뭐? 십일장생? 활강시? 그게 내 별호라고?

황당함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굳어 있는데, 삼백이십팔 호가 존경이 떠오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녀석의 말과 행동에서 진심이 느껴졌지만, 나는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이 조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살수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 몸이 가진 무공은 절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십일장생이라는 별호는 분명 내가 십장생만큼 오래 산다는 뜻일 터였고, 살아 있는 강시라는 말 또한 어쨌든 죽지는 않았다는 뜻이었다.

어제 중년인을 상대하며 온몸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용케 살아남은 것이 단순한 우연이나 요행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생각에 빠진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삼백이십팔 호는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는지, 활력이 돌아온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서 목을 축이고 가시죠.”


녀석이 가리키는 방향은 산길 위쪽에 보이는 이끼 낀 바위였다.

마음 같아서는 녀석에게 질문을 던져 나와 명부동, 그리고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더 얻고 싶었지만, 목을 축이자는 녀석의 한 마디에 참고 있었던 갈증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존경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에게 차마 부축해 달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바위 아래에는 산 위에서 흘러내린 물이 고인 작은 웅덩이가 있었다. 예의 바른 삼백이십팔 호는 내게 먼저 마시라며 웅덩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물을 마시려면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복면을 먼저 벗어야 했다. 뒤통수 아래로 묶여 있는 매듭을 풀어 복면을 벗은 나는 웅덩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가 우뚝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크고 작은 흉터가 빼곡하게 박힌 험상궂은 중년 사내가 인상을 찡그린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진짜 너무하네. 시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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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화-선배님? +1 24.08.17 1,387 21 13쪽
3 2화-살수(殺手) +1 24.08.17 1,483 22 17쪽
2 1화-불혹(不惑) +1 24.08.17 1,714 23 18쪽
1 서(序) +1 24.08.17 1,733 23 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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