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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희 님의 서재입니다.

퇴물 살수는 이능으로 살아남는다

무료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판타지

사바희
작품등록일 :
2024.08.17 16:31
최근연재일 :
2024.09.15 12:10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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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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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
글자수 :
235,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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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7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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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2화-살수(殺手)

DUMMY



살수(殺手).

돈을 받고 전문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직업.

비슷한 말로는 자객, 암살자, 킬러, 어쌔신, 히트맨, 해결사 등이 있는데, 살수라는 표현은 특정 장르에서만 사용된다.

맞다. 살수는 무협지, 무협 소설 등으로 불리는 무협이라는 장르의 세계관에서 나오는 직업을 일컫는 말이다.


나는 무협 소설 매니아였다.

요즘이야 다양한 장르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 내가 중고등학생이었던 시절만 해도 대세는 무협이었다.

불행한 과거를 가진 주인공이 여러 기연을 만나 결국에는 악인들을 물리치고 강호에 평화를 가져온다는 스토리는 어린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잠이 들기 전이면 항상, 나도 주인공처럼 천하제일의 무공을 마음껏 펼치며 미인들을 만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살수라니?


무협 세계에서 살수는 십중팔구 악역이며 엑스트라다.

주로 주인공이나 주인공이 속한 단체를 습격했다가 허무하게 쓸려나가는 것으로 주인공의 무위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가늠케 해주는 전투력 측정기의 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읽었던 수많은 무협 소설 속에서 살수란 그런 존재였다.

가끔 살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주인공을 끝까지 괴롭히는 살수가 등장하는 소설도 있었지만, 손에 꼽을 만큼 적었을 뿐만 아니라, 인기도 별로 없었다.

왜였을까?

무협이라는 장르를 관통하는 정신은 바로 협(俠).

결국, 약한 자들을 돕고 악한 자들을 벌한다는 철학과 내용이 근본인 세계관에서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는 살수는 태생적으로 악당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건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내가 살수라니??


-쐐액!


내가 왜 살수가 되어 갈대밭에 숨어 있었는지를 제대로 고민해 볼 여유도 없이 어디선가 날카로운 파공성이 고막을 찔러왔다.

순간, 뒷골이 저릿해짐과 동시에 나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몸을 날렸다.


-서걱!


서늘한 절삭음에 곁눈질로 뒤를 돌아보았더니, 조금 전까지 내가 서 있던 자리의 갈대가 깨끗이 잘려나가 있었다.

범인은 나와 같은 복장의 흑의인들에게 포위된 채, 장검을 휘두르고 있는 중년 사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 같은 냉막한 인상의 사내는 스무 명이 넘는 인원들의 합공을 상대하면서도 당황하거나 초조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마저 느껴지는 냉소를 입가에 머금은 사내는 장검을 자유자재로 휘둘러 철통같은 방어를 유지하면서도 간간이 허공을 향해 장검을 뿌려대고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무형의 예리하고 섬뜩한 기운이 사방으로 쏘아지고 있었다.

나는 그 기운이 바로 무협지에 나오는 검기(劍氣)일 거라고 짐작했다.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곳의 갈대를 뭉텅이로 잘라버린 것도 바로 그 검기였는데, 내 옆에서 포위망을 만들고 있던 흑의인은 이미 쩍 벌어진 옆구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바닥에 흥건히 고인 피와 핏빛으로 물든 갈대밭. B급 고어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잔인한 광경이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보였지만, 이 빌어먹을 영화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촤학!


이번에는 두꺼운 가죽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내게 등을 보인 채, 사내를 향해 열심히 협봉검을 찔러대고 있던 흑의인이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반으로 쪼개졌다.

사방으로 뿌려지는 시뻘건 선혈에 울컥 구역질부터 올라왔지만, 이런 상황에서 토악질이나 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푸학!


흑의인을 쪼개버린 검기가 갈대밭을 파헤치며 내게로 날아오고 있었다.


“씨버······흡!”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다가 역류하는 토사물을 집어삼킨 나는 이번에도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검기에 맞은 바닥이 뒤집히며 갈대와 흙먼지가 하늘로 비산했지만, 나는 주변을 제대로 돌아볼 겨를도 없이 연거푸 바닥을 굴렀다.


-촤학! 촤학! 파학!


사내가 쏘아낸 검기는 하나가 아니었다.

내가 개구리처럼 펄쩍펄쩍 뛰며 몸을 구르는 동안, 사내의 검기에 흑의인 셋이 사이좋게 치명상을 입고 바닥을 뒹굴었다.


“흥! 어설픈 수작을!”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사내의 외침과 함께 검기 공격이 잠시 주춤해졌기에 바닥에 엎드린 채 고개를 들었더니, 사내를 덮쳐가는 그물이 보였다.

오! 숨겨둔 한 수가 있었군.

매듭마다 날카로운 비수가 박혀 있는 그물은 살수들의 전문 작업 도구이자, 목표물의 저항이 예상보다 강할 때만 등장하는 비장의 한 수.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오려는 찰나.


-서걱!


허공을 십자로 그어버린 사내의 장검이 그물은 물론이고 그물을 들고 있던 흑의인들마저 반으로 갈라버렸다.

장검을 옆으로 휘둘러 선혈을 털어낸 사내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모두 개밥을 만들어 주마!”


사내의 서슬 퍼런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소매 아래에 숨겨 놓았던 비도를 던졌다. 딱히 사내에게 위협이 될 리는 없었지만, 기세가 오른 사내의 발을 묶어 두기에는 충분했다.

약속이나 한 듯이 다른 흑의인들도 사내에게 비도를 던졌기 때문이다.


“쥐새끼들이!”


욕지거리를 내뱉은 사내가 이번에도 장검을 휘둘러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비도 세례를 튕겨내는 동안 또다시 흑의인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내게는 그들이 모닥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보였다.

내가 살 수 있는 길은 당장에라도 이곳에서 도망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한 순간.


“하압!”


기합을 내지른 사내가 장검을 중단으로 겨눈 채, 제자리에서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그와 동시에 사내를 중심으로 무언가가 사방으로 쏘아지는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 얼굴은 어느새 피가 고여 있는 바닥에 닿아 있었다.


-샤악!


섬뜩한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후두두둑!


사내가 뿌린 검기에 사람 허리 높이까지 자란 갈대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갈대 사이에는 흑의인들의 팔다리도 섞여 있었다.

가볍게는 사지가 잘려나가고, 심하게는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는 와중에도 흑의인들은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혹독한 살수 훈련을 받았는지를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나 또한 저들처럼 토막 난 시체가 되어 바닥을 뒹굴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저 괴물 같은 중년인을 상대하느니, 갈대밭을 가로질러 저 멀리 보이는 강물로 뛰어드는 편이 훨씬 더 살아날 확률이 높을 터였다.

다행히도 나고 자란 곳이 바닷가였기에 수영을 못해 물에 빠져 죽을 걱정은 없으니까.


문제는 강까지의 거리가 꽤 멀다는 것이었다. 어림잡아도 사오백 미터는 되는 거리. 그에 반해 중년인과의 거리는 채 이십 미터도 되지 않는다.

강까지 달리는 도중에 사내가 따라붙으면 꼼짝없이 뒤통수에 구멍이 뚫릴 상황.

문제는 사내 뿐만이 아니었다.

살수가 제 한 목숨 살겠다고 살행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더욱 비참하게 죽는 것이 무협의 클리셰.

내가 뒤돌아 달리는 순간, 사내 대신 내가 흑의인들의 비도 세례를 받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눈알을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남아 있는 흑의인은 이제 열댓 명. 너덧 명은 사내의 전후좌우에서 펜싱 검을 찔러넣고 있었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포위망을 유지한 채, 비도를 들고 사내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매복 중이던 인원이 얼추 서른 남짓이었으니, 벌써 전력의 반이 사라진 상황. 아무리 엑스트라라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썰려 나가는 건 좀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애초에 이 정도 인원으로 저자를 제압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정 상무가 부장이었던 시절, 임원 진급 한 번 해보겠다고 누가 봐도 불가능한 기한을 정해놓고 전 부서원들을 들들 볶았던 프로젝트가 머리를 스쳤다. 정기환 씨발놈.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지금은 일단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


사내와 흑의인들의 위치, 강까지의 거리를 재차 가늠하는 와중에 또다시 섬뜩한 파육음이 울려퍼졌다.


-푸학!


분수처럼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흑의인 뒤로 피를 뒤집어쓴 사내의 얼굴이 들어왔다.


‘응?’


여유만만한 표정은 그대로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묘하게 굳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이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내의 전신을 훑었다.

그리고 내가 느낀 그 이질감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사내의 왼쪽 가슴 부분에 있었다.

정확하게는 왼쪽 갈비뼈가 있는 곳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부분에 콩알만 한 붉은 기운이 보였다. 꼭 누군가가 빨간색 레이저포인터로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 사내가 그물을 잘라낼 때만 해도 없었던 것이었다.

저게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기세는 더 사나워져 있었지만, 처음 보여줬던 압도적인 위압감은 조금 옅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잘 하면 강물에 뛰어들지 않고도 살아날 방법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빠르게 주변을 돌아보던 나는 이제는 한 뼘 정도밖에 남지 않은 갈대밭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흑의인에게 다가갔다.

내 주변에 있던 놈들은 적게는 두 토막, 많게는 네댓 토막이 난 채로 뒹굴고 있었지만, 이놈은 유일하게 형체를 온전히 갖춘 채, 거친 호흡을 반복하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놈을 불렀더니 내 예상대로 한국어가 아닌 중국어를 닮은 이자들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갔다.


“야! 너!”

“네, 네!”


어리바리한 대답을 듣자마자, 나는 이놈이 꿩 때문에 호들갑을 떨었던 그 삼백이십팔 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도 몇 자루 남았나?”

“네?”

“비도 몇 자루 남았냐고!”

“네, 네 자루 남았습니다.”


소매 아래에 달린 가죽끈에 묶여 있던 비도는 원래 여섯 자루였다.

삼백이십팔 호는 처음에 사내에게 일제히 비도를 날린 후에 계속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복면 아래로 보이는 흐리멍덩한 눈동자를 보니 어떻게 지금까지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는지가 신기할 정도였기에, 나는 녀석의 멱살을 잡고 뺨을 세게 후려쳤다.


-퍽!


복면 때문에 찰진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삼백이십팔 호의 눈에는 초점이 잡혀 있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

“넵!”


녀석의 대답에 기합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손가락을 들어 중년 사내를 가리켰다.


“저 새끼 못 죽이면 나도 너도 오늘 여기서 뒈지는 거야.”

“네, 넵!”


나는 내 소매에 꽂혀 있던 비도 두 자루를 녀석에게 건넸다.


“내가 신호를 하면 저놈한테 비도를 날린다. 위치는 왼쪽 갈비뼈. 대충 젖꼭지에서 한 뼘 정도 아래를 노려.”

“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삼백이십팔 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녀석의 멱살을 다시 움켜쥔 나는 이제 막 소년의 티를 벗은 복면 아래의 눈을 노려보며 나직이 뇌까렸다.


“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


나는 잽싸게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멱살을 놓고는 조각난 흑의인들이 널브러져 있는 피 웅덩이를 향해 달려갔다.

진한 피 냄새에 욕지기가 치밀어올라 나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려 숨을 참았다.

나는 끈적해지기 시작한 핏물을 헤집으며 토막 난 흑의인들의 팔을 줍기 시작했다.

내가 필요한 것은 팔뚝마다 묶여 있는 비도.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팔뚝 네 개를 수습한 나는 다섯 자루의 비도를 손에 넣자마자 아직 잘려나가지 않은 갈대 덤불 아래에 납작 엎드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제 제대로 서 있는 흑의인의 숫자는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반면에 중년 사내의 기세는 조금도 꺾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내게는 사내에게 일어난 변화가 똑똑히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콩알만 했던 옆구리의 붉은 점이 이제는 주먹만큼 커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삼백이십팔 호가 숨어 있는 갈대숲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녀석은 정신을 차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삼백이십팔 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있는 힘껏 중년 사내를 향해 비도를 던졌다.


-쐐액!


내가 던진 비도는 흑의인 하나의 옆구리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며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그의 입장에서는 근접 공격을 펼치고 있는 흑의인의 옆구리에서 불쑥 날아온 것처럼 보일 터였다. 어쩌면 비도 한 자루로 사내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쾌재를 부르려던 순간.


-따앙!


사내의 장검이 비도를 튕겨내고.


“허튼 수작을!”


버럭 소리를 지른 사내가 나를 향해 검기를 날리려는 찰나.


-슉!


또 다른 비도 한 자루가 허공을 갈랐다. 삼백이십팔 호가 던진 것이었다.


-푹!


예상과 다르게 들려오는 파육음에 눈을 동그랗게 뜬 순간.

사내 앞에 있던 흑의인 하나가 비스듬히 쓰러졌다. 등에는 삼백이십팔 호가 던진 비도가 꽂혀 있었다.

시벌!

비도도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삼백이십팔 호를 향해 눈을 부라리려는데,


-슈학!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나운 검기가 나를 덮쳐왔다.

삼백이십팔 호를 향한 빡침과 괜한 짓을 해서 명을 재촉한 것 아닌가라는 후회가 동시에 밀려왔지만, 내 몸은 이미 몸을 돌돌 만 한 마리 쥐며느리가 되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검기에 살짝 등짝을 스쳤지만, 다행히도 잘려나간 것은 무복 뿐이었다. 등짝이 살짝 욱신거리는 정도는 충분히 참을만 했다.

이번에도 본능적인 움직임이 나를 살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또다시 비도를 던졌다.


-슈슛!


이번에는 두 자루를 연달아 던진 나는 바로 쥐며느리에 빙의하여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이것이 바로 학습 효과다.


-따당!


비도 두 자루가 사내의 검에 튕겨나갔지만, 검기는 날아오지 않았다.

사내는 정신을 차린 삼백이십팔 호가 던진 비도를 처리하느라 나를 노릴 여유가 없었다.


-따다다다당!


삼백이십팔 호의 비도술은 위협적인 수준이 아니었지만, 남아 있는 다섯 자루를 연속해서 던진 데다가 내가 시킨대로 사내의 왼쪽 옆구리를 노린 것이 주효했다.

비록 다섯 자루의 비도를 모두 막아냈지만, 사내는 무척이나 곤혹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깊게 패인 미간과 거칠어진 숨소리. 불쾌한 고통을 참는 사람의 전형적인 표정을 떠올린 사내는 보법이 흐트러지며, 살짝 휘청였다.

주먹만 하던 붉은 기운은 이제 그의 옆구리 전체로 퍼져 있었다.


삼백이십팔 호와 나를 제외하고 이제 남은 흑의인은 셋이 전부였지만, 그들도 사내가 보인 변화를 눈치챘는지, 협봉검에 실린 검초가 매서워지고 있었다.

그들 또한 이 기회에 사내를 죽이지 못하면 자기들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협봉검 세 자루가 사내의 요혈을 찔러가는 와중에 나는 사내의 뒤쪽으로 달리며 남은 비도를 던졌다. 물론 표적은 사내의 왼쪽 상반신.

흑의인들의 공격을 막아가던 사내는 이번만큼은 비도를 튕겨내지 못하고 몸을 비틀어 비도를 피했지만, 마지막에 날린 비도가 어깨를 긁고 지나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피잇!


처음으로 사내의 몸에서 핏물이 튀어올랐을 때.

그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왔다.


“벌레같은 살수 놈들이!”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빡침이 고스란히 실린 외침에 나도 모르게 목이 움츠려드려는 찰나.

사내의 전신에서 가공할 기파가 터져나왔다.


-콰아아!


순간, 그에게 달려들던 흑의인들이 온몸에서 선혈을 뿜으며 튕겨져 나갔고.

나는 갈대밭 사이를 데굴데굴 구르며 밀려나갔다.

이미 쥐며느리 신공을 펼친 상태였지만, 전신을 칼로 낭자당하는 듯한 격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아득히 멀어지려는 정신을 붙들어 맨 나는 양손으로 갈대 뿌리를 붙잡고서야 간신히 멈춰섰다.

고개를 들어 사내를 쳐다보려는데, 목에서 뼈마디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어딘가 심각하게 고장난 것 같았지만, 일단은 상황 파악이 먼저였다.

바닥을 구르며 갈대밭 사이에 만들어 놓은 공간 너머에 사내의 모습이 있었다.

이쪽에서 보이는 건 등뿐이었지만, 장검을 바닥에 꽂은 장검에 의지한 채,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의 등은 격하게 들썩이고 있었다. 그리고 예의 그 붉은 기운이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었다.

저 기운이 무엇이건 간에, 저자를 쓰러트릴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문제는 내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두 손으로 바닥을 밀어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팔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진흙 바닥에 얼굴을 반쯤 처박았을 때.

사내의 뒤쪽 바닥이 반으로 갈라지더니 시커먼 인영 하나가 귀신처럼 솟아올랐다.


“허어?”


한숨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가 나도 모르게 목구멍 사이를 비집고 나왔을 때.

검은 인영의 손에 들린 협봉검이 소리도 없이 사내의 등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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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화-선배님? +1 24.08.17 1,387 21 13쪽
» 2화-살수(殺手) +1 24.08.17 1,483 22 17쪽
2 1화-불혹(不惑) +1 24.08.17 1,714 23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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