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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타소니아


[에타소니아] 나와크라 왕국과 토케 공작령의 최근 역사

하이나르 왕자

하이나르 대왕은 선왕 오르단 왕이 환갑이 넘어 뒤늦게 얻은 귀염둥이 셋째 아들이었다. 1왕자 모르두른은 왕이 19살 왕자일 때에 낳았고, 2왕자 로나른은 왕으로 즉위한 21살에 낳았으니, 이 셋째가 얼마나 예뻤을까 상상을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두 형은 왕의 정복을 따라 다니며 많은 경험을 쌓고 공을 세웠지만, 군대를 운용하는 재능도 없었고 개인의 무용도 출중하지 못 했다. 그들의 휘하 장수들이 세운 공을 왕자라는 이름으로 부대장으로 쉽게 얻었을 뿐이었다. 신하들도 이를 모를리가 없었다.

반면 하이나르 왕자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미 명석했고, 선왕의 신하들도 모두 이 아들이 첫째가 아닌 것을 안타까워할 정도였다. 군사적 재능과 개인적 무용, 그리고 신하들의 생각을 읽고 원하는 것들을 주고 받았고, 재능을 파악해 적절한 곳에 추천을 하며 왕의 예쁨을 독차지했다.

두 왕자의 반란

왕은 점점 나이가 들어갔지만, 왕의 건강은 나빠지는 기색도 없었고 퇴위를 하겠다는 의지도 없어보였다. 모르두른과 로나른은 이미 왕자로써 시간을 보낸지도 30년이 되자, 아버지를 무력으로 폐위하고 왕이 되겠다는 헛된 생각을 시작했다. 두 왕자는 각자 영지의 병력들을 끌어 모아 일으켰지만, 왕은 이들의 계획을 짐작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두 왕자들은 그 욕심에 비해 능력이 따라주지 못 했을 뿐더러, 인복도 그렇게 훌륭하지 못 했다. 왕자가 병력을 모으고 반란을 준비한다는 이야기는 왕자들 휘하 부하들이 앞을 다투어 왕에게 보고했고, 그들이 행동에 옮기자마자 며칠이 되지 않아 왕성의 병력들이 반란군의 앞에 도착했다. 거리와 전령이 도달할 시간을 생각한다면, 이미 왕자들이 계획을 가슴에 품자마자 즉시 왕에게 알려졌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두 아들이 진압되는 도중에 죽지만을 않기를 빌었고, 그의 바람처럼 다행히 둘 모두 큰 부상 없이 생포되었다. 둘째 로나른은 묶인 채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처절하게 선처를 빌었다. 모르두른은 그런 동생의 뒤에서 여전히 억울하다는 눈을 하고 입술을 씹으며 동생이 비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의 결정은 사형이었을 수도 있다, 반란수괴는 사형이 당연했다. 하지만 어찌 아비가 자식을 제 입으로 죽이는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왕의 자비로운 명령에 따라, 두 왕자는 영지를 박탈 당하고 감옥에서 남은 인생을 보내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 사건 후로, 후계자는 아직 6살 밖에 안 된 하이나르 왕자로 변경되었다. 감옥에 갖혀 잘못된 결정을 후회하던 두 형들은 마지못해 이 결정을 받아들였다.

하이나르 대왕의 즉위

오르단 왕은 반란 이후 십 년 동안 감옥의 두 자식을 생각하며 밤마다 눈물을 흘렸다. 왕의 주변에서 아무리 온갖 주색을 추천하여도 슬픔을 지우지는 못 했다.

하이나르 왕자가 점차 성년이 되어가면서, 오르단 왕은 두 형에 대해서 결정을 해야 했다. 영민한 왕자 스스로가 왕이 되면 알아서 처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부담을 어린 아들에게 지우고 싶지 않았다. 왕은 두 아들을 감옥에서 처형해야 하는지, 추방해야 하는지, 그의 주변에 세력이 쌓여 동생의 왕위를 위태롭게 하지 않을지 걱정을 했다.

하지만 왕은 그런 생각을 실행하지 못하고 머뭇거렸고, 왕자는 성년이 되었다. 이제 섭정으로 왕국이 혼란해지지 않겠다고, 걱정을 놓았기 때문일까. 왕은 왕자가 사냥을 떠나 있는 동안 조용히 숨을 내려 놓았다.

하이나르 대왕은 그렇게 즉위했다. 대단한 장례식을 치르지도 않았고, 대단한 대관식을 거행하지도 않았다. 북부 대륙의 예법이 그렇게 호사하지도 않았지만, 딱히 그렇게 소박하지도 않았음에도, 신하들과 백성들의 기대에 딱 들어 맞게 즉위했다.

그리고는 두 형을 사면했다. 왕자로 복위를 시키지는 않았다. 두 형제는 십 년의 감옥 생활을 지내는 동안 모든 것을 포기한 터였다. 두 왕자의 아내들도 이미 죽었고, 아들들은 평민이 되어 힘든 삶을 꾸리고 있었다. 아무도 이 두 형제 주변에 들러붙어 음모를 꾸밀 생각을 하지 못 했다. 할 수도 없었다. 이 둘은 왕자일 때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하게, 막 왕이 된 막내 동생에게 비굴한 눈빛으로 목숨만을 구걸했을 뿐이었다.

정복

갓 성인이 된 왕은 아무리 그 영민함을 진작에 알렸다고 해도, 봉신들의 도전을 받게 마련이다. 열여섯이 막 된 아이가 눈 앞에 왕관을 쓰고 앉아 있고, 그 밑에서 조아리는 봉신의 입장에서, 새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왕은 즉위 후 빠르게 신하들을 관리했다. 유약한 봉신들은 다가가 친근함으로 대했고, 약점을 알고 있는 봉신들은 그 약점을 후벼 팠다. 봉신들의 아들을 볼모로 잡기도 하고, 딸은 동맹 구실로 사용하지 못 하게 멀리 있는 혼처를 추천해 보내버렸다. 군사력이 강한 봉신들은 교묘하게 내분을 조장해, 뒷문이 두려워 병력을 일으키지 못 하게 만들었다.

그런 공작으로 왕권을 안정한지 2년 째 되는 해, 왕은 왕국 내 힘 있는 봉신의 딸과 결혼을 했다. 당연하게도 동맹의 목적이었지, 그 딸이 아름답거나 똑똑하거나 매력있거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공녀는 이 어린 왕이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냐며 아비와 말 다툼을 하고는 악에 받쳐 결혼식을 올렸다. 사실 공녀에게는 사랑하는 이와 숨겨진 아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아무 것도 주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왕의 목적은 동맹과 왕권의 지원자일 뿐이고, 왕비와 후손은 우선 순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왕권은 빠르게 안정되었다. 봉신들은 이 젊은 왕의 국정을 운영하는 재능을 인정하며 충성을 유지했고, 왕자는 결혼 5년이 지나서야 태어났다.

아르노 왕자

왕자는 이미 5세에 주변국들의 언어들까지 빠르게 배워 구사했고, 사람들의 본의를 파악하는데 재주가 있었으며, 궁 내 신하들과 하인들의 심리를 조종했다. 부모나 신하들 모두 아르노 왕자는 부왕보다 뛰어난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해 마지 않았다. 아버지의 재능에 못지 않다고 칭송이 자자했으며, 혹자는 아르노 왕자가 왕보다 훨씬 뛰어난 현군이 될 것이라고 했다.

왕자의 출생은 왕에게 축복 받거나 하지 못 했지만, 성장해가는 왕자를 보면서 왕은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외교적 재능도 훌륭했고, 칼을 쓰는 법, 말을 타는 법 뿐만 아니라 군대를 통솔하는 전략에도 뛰어난 재주를 드러냈다. 장수와 부대를 운용하는 인형 놀이, 전계에도 뛰어남을 보여 왕궁 내에 그와 병력 운용을 겨뤄 이길 수 있는 사람 조차 없었다.

왕국의 확장 방향

나와크라는 영토의 많은 부분이 개척이 어려운 불모지였다. 북쪽으로는 냉지가 닿아 있고, 아래쪽으로는 불모지가 뻗어 있어, 농사를 짓고 식량을 만들어낼 수 있는 영토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크라의 지배자들은 기회가 닿을 때마다 남쪽의 비옥한 에타소니아로 확장을 노리고 있었다.

마침, 에타소니아에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첫째로는, 아르노 왕자의 출생 즈음에 즉위한 에타소니아의 왕 로스라르 3세는 뛰어난 외모에 비해 멍청이였던 것이다. 에타소니아 변경의 백작이자 장군이던 하인릭이 왕을 속이고, 공작령 영지들을 찬탈해 직접 왕이 된 사건을 보면서, 하이나르 왕은 가능성을 엿보았다.

둘째로는, 저 하인릭이 왕이되는 것을 보면서 '바보왕'의 다른 봉신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왕 밑에서는 나도 독립을 해 왕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상상을 하는 신하들이 있다면, 왕은 어떻게 관리하고 눌러낼 수 있을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꼬드겨 충성을 유지하게 만들든, 협박을 하든, 무력으로 박살을 내 찍어 누르든 여러 방법이 있지만, 저 '바보왕'이 할 수 있는 것들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결국 예상대로 각 공작들이 속속 독립을 선언했다. 토케 대공이 먼저 독립을 선언했고, 페라르네, 네와그네도 뒤따라 독립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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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타소니아 | 나와크라 왕국과 토케 공작령의 최근 역사 2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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