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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내 일상] 저장용 - 그것을 애틋함이라 여기다

그것을 애틋함이라 여기다

 



언젠가 시집을 보다가 익숙한 글귀를 보았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 중에서

 

살면서 썩 많이도 본 글귀였다. 처음에는 외웠고 두 번에는 이해했고 세 번에는 감탄했던 시였다. 네 번째인 지금은 그냥 그랬다.

 

무덤덤하게 장을 넘기는데 이상하게 끝단을 비비적거렸다. 왜 그랬을까.

 

많이 본 거라 분명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도 심드렁하게 내려다볼 뿐인데. 손은 애꿎은 책 끝단만 비비적거리고 지문도 남기지 않을 것을 누군가 볼 책만 상하게 할 따름이니 이상하다.

 

책을 덮자 다음 시가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오로지 생각나는 건 그 장의 그 문단의 그 부분이고 어찌나 비비적거렸는지 끝단이 구겨져 바로 그 장을 펼칠 수 있을 정도다.

 

결국, 생각하며 넘기자. 의식하며 넘기자. 라고 해서야만 넘길 수 있던 이유가 뭘까. 이렇듯 아련한 이유가 뭘까.

 

세상에는 많은 만남이 있고 이별이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하도 많이들 입에 오르고 내리니 공감을 많이 산 명언이라기보단 인생의 진리인 수준처럼.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때. 첫 이별에 많이도 울었고 두 번에는 화가 났었고 세 번에는 씁쓸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냥 그랬다.

 

뒤돌아서는데 마치 많이도 본 시를 읽어 내려가는 것처럼 무덤덤했다. 왜 그랬을까.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 가볍게 보았나. 아니면 그냥 서로에게 많이 질려서, 그러다 끝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 어느 이별보다 끝내고 싶다 여겨서 그런 걸까.

 

결국, 생각하며 잊자. 의식하며 잊자. 라고 해서야만 겨우 잠깐 잊을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이렇듯 아련한 이유가 뭘까.

 

마치 지난번에 본 시집의 그것처럼. 자꾸만 기억 속에서 그 상황을 끝없이 늘리며 되풀이하는 이유는 뭘까. 그 기억 속에서, 그 이별에서 그 찰나를 끝없이 늘리며 그때를 되새기는 건 어째서일까.

 

만남의 마지막 순간에서 발자국을 되돌아보며, 길게 이어진 끝에 뭐가 있을 거라 기대하며 뒤돌아본 이유는 도대체 무어냐. 그 끝에 아무것도 없음에 그토록 숨을 길게 뱉고 눈을 천천히 그 순간을 영원히 하듯이 한 이유.

 

끝단이 구겨진 책을 손에 쥐며 멍하니 누워있는 이유. 이별에 그토록 무덤덤했던 이유. 이 글이 이렇듯 쓰여 내려가는 이유.

 

시에 빗대어진 세상이 마치 지금과 같아서. 그 만남의 끝이 그토록 길게 늘어지고, 이토록 이 글이 쉽게 쓰여 내려가서.

 

잊기 싫어서. 포기하기 싫고, 보내기 싫어서. 하지만 그래야만 해서. 애틋해서. 애틋하고, 애틋해서.

 

글은 쉽게 쓰여선 안 된다. 쉽게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쓰이지 않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 하루라도 빨리. 이 순간이 끝나서. 다음 문장이. 다음 문단이. 꼬리말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끝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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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일
» 내 일상 | 저장용 - 그것을 애틋함이라 여기다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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