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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171
추천수 :
926
글자수 :
790,487

작성
22.08.26 18:30
조회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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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2쪽

낯선 도시에서

DUMMY

나는 처음 보는 풍경에 완전히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사월을 떠난 이후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으니, 나를 마냥 고향밖에 모르는 어린애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안타레스의 뒤쪽 세계는 사람을 거침없이 잡아끌었다.


"여기는 해가 뜨지 않는 것 같아."

"사시사철 흐리니까. 게다가 하늘이 저렇게 빽빽하게 가려져 있는걸."


젠은 나와 달리 느긋한 얼굴이었다. 주변이 이 꼴인데 저렇게 태평한 표정이라고. 어렸을 때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서나 상상한 환락가가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어두침침한 하늘, 그 하늘을 덮어 버린 수많은 전선과 구름다리. 저 구름다리야말로 여기의 가장 특이한 부분이었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난 수많은 건물을 공중의 나무다리들이 연결하고 있었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건물 사이를 오갈 때 굳이 땅을 밟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리는 널빤지를 엉성하게 이어 놓은 모양새였다.


"저 다리는 왜 있는 걸까?"

"안타레스에는 비가 많이 와. 비가 아주 많이 오면 낮은 건물들은 물에 잠겨 버려."

"오, 그렇구나. 지상의 길을 이용할 수 없을 때 쓰는 건가."

"대충 만들어 둔 거겠지. 비싼 재료를 쓰기도 애매하니까. 썩으면 버리고 말이야."


그렇다고는 해도 기묘한 풍경이었다. 낡은 건물들의 외벽에는 온갖 네온사인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내가 알아볼 수도 없는 그림이나 기호 따위였다. 무슨 뜻인지 짐작조차 안 가.


"여기 뭘 찾으러 온 거라고 했지?"

"아리나딘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아리나딘?"


살면서 처음 듣는다. 젠은 내 표정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거 어째, 너한테는 아무런 기대도 안 했다는 듯한 반응인데.


"신 이름이야. 그 신을 믿는 교단 이름이기도 하고."

"처음 들어. 무슨 신인데?"

"아리나딘은 혼돈 그 자체라고 하지."


걷다 보니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거나 술병을 입에 물고 있는 사람을 종종 마주쳤다. 하나같이 나른하게 술이나 약에 취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골목 안의 공기는 유독 뿌옇네. 담배 연기 때문일까.


"그래서, 여기 신을 찾으러 온 건 아닐 거 아냐."

"그건 그렇지. 그리고 확실하게 말해두겠는데, 난 아리나딘이 실제로 존재하는 신이라고 믿지 않아."


당연한 건가? 젠은 아이니 신의 신관이니까.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해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보다 혼돈 그 자체라. 무슨 뜻일까? 내가 보기에는 이 골목의 풍경도 혼돈 그 자체인데.


"아리나딘을 믿는 사람들은 혼돈을 불러오기 위해 뭐든지 한다고 알려졌지. 하지만 원래 아리나딘은 그렇게 교세가 센 교단이 아니야. 뭐든지 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시골 마을의 공터에 불을 지르거나 하는 정도고."


"그 정도는 나도 하겠는데."

"그래, 그래서 아리나딘의 신자들은 허풍쟁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정작 커다란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까."

"원래는 그랬다는 건 이제 아니라는 거네."


젠이 내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가리켰다. 리오나의 검은 눈에 띄지 않게 천으로 말아 둔 상태였다. 고작 이런 조치를 취한다고 성물이 가지고 있는 힘이 가려질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보통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데는 이거면 충분했다.


그 증거로 여기 사람들은 딱히 내 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검 손잡이에 손수건이 하나 묶여 있었지. 거기서 특이한 냄새를 맡았어."

"꽃향기라고 했잖아. 아카시아였나?"


아카시아는 내게 그리 익숙한 꽃이 아니었다. 향수 냄새로나 몇 번 맡아봤을까. 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카시아는 아리나딘의 꽃이야. 그 이유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뭐라더라, 초대 교주가 좋아하던 꽃이 아카시아라고 했나. 하여튼 별 같잖은 추측들이 난무하더군."


"그래서 그 사람을 죽인 범인이 아리나딘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한 가지 근거가 더 있어. 코나가 시신을 살펴보고 나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응. 약 냄새가 난다고 했었지."

"약물도 아리나딘의 신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지."


하여튼 젠이 아리나딘의 신자들을 범인이라고 의심한다는 건 알았다. 그러면 젠은 그 범인을 우리가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건 수사기관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는 건 아는데,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그리 좋지 않은 일을 저질렀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그 사람들에 관해 조사할 필요가 있어?"


나는 솔직히 아레인스터 쪽에 더 가 보고 싶었단 말이야. 다른 순례자들이 아실카 시칼트라를 만나는 동안, 나와 젠만 뒷골목을 조사하기로 한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골목 어딘가에서 시끄러운 전자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네 말이 맞지. 우리가 반드시 아리나딘의 뒤를 밟을 필요는 없어. 그냥 시체를 발견했다고 신고하고 우리 갈 길을 가도 돼."

"그러면?"


"개인적으로 알고 싶은 게 있어. 뭐 대충 출생의 비밀 같은 거."

"너랑 관계있는 일이야?"

"응."


이 골목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건지, 한참을 걸었는데도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 걷다 지친 내가 재촉하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젠이 뚝 걸음을 멈췄다.


"저기다."

"저게 뭔데?"


젠의 손가락이 생소한 기호를 가리켰다. 버들가지처럼 생긴 문양을 원이 둘러싸고 있는 붉은 네온사인. 우리는 그 밑에 그려진 붉은 화살표를 따라 비좁은 골목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여기가 사람이 지나가라고 만든 길이야?"

"글쎄, 어깨가 넓은 사람들은 몸을 옆으로 돌려서 걷겠지."


옷을 더럽히기 딱 좋은 너비의 골목이었다. 몇 걸음을 걸으니, 흠집이 잔뜩 난 두꺼운 철문이 눈에 들어왔다. 철문 옆에는 특이하게도 거울이 붙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웬 거울?"


나와 젠은 빈말로도 그리 깔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차림이었다. 게다가 등이며 어깨에 척 보기에도 무기 같은 걸 메고 있으니. 왜 이런 곳에서조차 사람들이 거의 말을 붙이지 않았는지 알 만도 하네. 우리는 마치 용병처럼 보였다.


젠은 문을 두 번 두드리고는 응답을 기다렸다.


"내가 아이니 신전에 버려진 아이라고 말했었지?"

"응."


"그때 내가 들어 있던 바구니는 아카시아꽃으로 뒤덮여 있었대."

"호오."


"우연일지도 모르지. 마침 그때 내 부모나 나를 버린 사람의 주변에 아카시아가 잔뜩 피어 있었던 건지도 몰라. 하지만······."

"혹시나 모를 단서를 잡고 싶다는 거야?"


"한심한 일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시선을 슬쩍 올리자 젠과 눈이 마주쳤다. 젠은 오른쪽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있었다. 얼빠진 얼굴 하기는.


"넌 너 자신에 관해서 모르는 게 있는 거잖아. 물론 나도 나에 관해 모르는 게 있지. 하지만 나는 내 부모가 누군지,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내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 정도는 안단 말이야. 그런 걸 모른다면 알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으음."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


문 안쪽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젠이 다시 문을 두 번 두드렸다. 안에 아무도 없는 거 아냐? 그러고 보니 나는 여기가 뭘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흥신소 같은 곳이야. 안타레스에 꽤 유능한 사람이 있다는 정보를 들은 적이 있어. 아마 여기일 거야."


"저 밖에 그려진 기호를 보고 찾아 들어온 거야?"

"그래. 실제로 여기 있는 사람을 만나본 건 아니야."


하지만 아무 답이 없는데. 안에 사람이 없는 건 아닐까? 아니면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주지 않기로 한 건지도 모른다.


젠은 가만히 기다리다가 다시 문을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철문이 벌컥 열렸다.


"우와, 나 조금 쫄 거 같은데."

"너도 겁이라는 게 있어?"

"왜, 없을 거 같아서?"


우리는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등 뒤의 철문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이대로 잠겨 버린 건 아니겠지? 나는 하마터면 문 쪽으로 달려가 손잡이를 흔들어 볼 뻔했다.


실내는 창고처럼 보였다. 조명이 거의 켜져 있지 않아 어두웠고, 매캐할 정도로 담배 냄새가 났다. 담배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숨을 쉬기가 힘들겠는데.


"아이니의 자녀들이군요."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 나는 고개를 치켜 들었다. 놀랍게도 낡은 천장에 그네가 매달려 있었다. 녹슨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한 그네 위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당신이 푸른 불꽃입니까?"

"먼저, 푸른 불꽃이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죠?"


그네 위에 앉아 있는 건 젊은 남자의 실루엣이었다. 소맷자락과 바짓단이 넓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이 입을 법한 옷 같지는 않았다.


"아침의 숲을 지날 때 만났던 파수꾼에게 들었습니다."

"아침의 숲에 있던 파수꾼이라, 새벽 네 시의 종소리가 어떻다고 말하던가요?"

"지옥의 물구덩이에서 올라와 죽은 사람을 다시 깨우는 소리라고 하더군요."


이건 암호 같은 건가? 남자는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그네에서 뛰어내렸다. 높이가 꽤 되어 보이는데, 발목이나 무릎에 아무런 영향도 없어 보였다.


"뭐. 좋습니다. 내가 푸른 불꽃이라면, 당신은 나한테 뭘 맡길 거죠?"

"제 검을 맡기죠."


젠이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뽑은 걸 보는 건 처음인데. 나는 무기를 볼 줄 모르지만, 꽤 잘 만든 물건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야, 젠이 저렇게나 막 다루는데 검집에도 흠집 하나 없었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고개를 저었다.


"그쪽의 소녀가 제 마음을 끌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데요."


뭘 말하는 거지? 짚이는 게 하나가 아니라서 순발력 있게 대처할 수가 없어. 생각해 보니, 나는 지금 걸어 다니는 무기고나 다름없었다. 한쪽 허리에는 성물을, 다른 한쪽 허리에는 마법 총을 차고 있었으니까.


"이런 좋은 물건을 이렇게 무방비하게 내보이면 안 되죠."


그가 어느새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분명 몇 걸음 떨어져 있었는데, 언제 여기까지 온 거지? 게다가, 안이 보이지 않도록 천으로 감싸 놓았는데도 이게 총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 총을 내놓는 건 어떨까요? 어지간한 건 다 맞춰줄 수 있을 텐데."

"안 됩니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젠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젠은 위협적인 기색을 느꼈는지 내 쪽으로 한껏 다가서 있었다.


"당신은 푸른 불꽃이 아니군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침의 숲에는 파수꾼이 없어. 거기에서는 해가 지지 않으니까."


젠이 창고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여기는 아무리 봐도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된 공간이군.


남자가 바닥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젠이 혀를 차며 내 몸을 팔로 막아 세웠다.


"검을 뽑아,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니까."

"이걸 뽑으라고?"

"그래, 자세한 건 나중에 생각하자고."


불과 얼마 전에 젠에게 싸움을 잘하느냐고 물어봤었지. 그걸 내 눈으로 직접 볼 기회가 이렇게 빨리 생길 줄이야. 가능하면 영영 생기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한숨을 쉬며 허리춤에 꽂아 놓았던 소검을 뽑았다. 대강 감아 놓은 천을 걷어내는데, 뒤쪽에서 덜컥, 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렸다가 무언가와 눈이 마주쳤다.


인간처럼 생겼지만,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


"인형······인가?"

"정신 똑바로 차려."


그 말과 함께 젠이 검을 치켜들었다. 금속성의 물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인간이라기에는 인간 같지 않은 것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걸 베어도 되는 걸까? 베지 말아야 할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에, 젠의 검이 녀석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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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실종 22.11.25 26 1 12쪽
136 유일한 목격자 22.11.24 32 1 12쪽
135 왕의 귀환 22.11.23 33 1 12쪽
134 빈틈 +1 22.11.20 71 2 12쪽
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132 신의 부산물 22.11.18 35 2 13쪽
131 진짜 이야기 +1 22.11.17 55 2 13쪽
130 책의 무덤 +1 22.11.16 33 3 12쪽
129 복수 22.10.08 42 3 13쪽
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4 3 13쪽
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1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8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39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3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8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5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3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0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4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48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5 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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