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심권 님의 서재입니다.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심권
그림/삽화
메이산
작품등록일 :
2022.06.02 01:20
최근연재일 :
2022.12.03 23:30
연재수 :
142 회
조회수 :
9,167
추천수 :
926
글자수 :
790,487

작성
22.08.25 18:30
조회
25
추천
3
글자
13쪽

별의 뒷면

DUMMY

두 사람은 결국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접견실을 나왔다. 파리스가 대놓고 안도하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이 원만한 대화를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파격적인 대화였죠."


그렇게 대답하는 이엘의 얼굴은 핏기가 빠져나가 창백했다. 그는 평소답지 않게 평정심을 잃어버린 듯 입술을 깨물거나 뒷머리를 긁적였다.


"커피라도 한 잔 가져다드릴까요?"

"커피 말고 다른 차가 좋겠네요."

"그래요, 편히 앉아 계시죠."


파리스가 자리를 뜨고, 이엘은 소파에 몸을 던지듯이 주저앉았다. 그는 마치 제 몸속을 흐르는 피가 한껏 차가워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바넬드는 그에게서 거리를 둔 채 어색하게 서 있었다.


"그 인형은 왜 가져오지 않았지?"

"그 인형이 나를 따라오지 않은 거야."


레몬은 보안 장치를 고쳐야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건 거짓말일 터였다. 레몬은 애초부터 아레인스터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자나가 수상하다는 사실을 이엘이 눈치 챘기 때문에.


그 작은 호텔 방으로 돌아갔을 때 레몬이 기다리고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도망쳐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나를 찾아가지는 않을 건가?"

"레몬 말인데, 어떻게 만들어진 인형이라고 생각하지? 그러니까, 무슨 수로 거기에 인간의 영혼 같은 걸 붙잡아 뒀냐는 뜻이야."

"영혼석을 사용한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는데."


바넬드의 추론에 이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가 자신보다 인형에 관해 훨씬 전문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자나는 영혼석을 요구하면서 그렇게 말했지. 원래라면 만들어낼 수 없는 걸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레몬이 영혼석을 사용해서 만들어진 인형이라면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거야."


이미 영혼석을 사용한 결과물을 그 눈으로 직접 확인한 거니까.


"레몬에게 들어가 있는 영혼, 그 주인은 이미 죽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몰라. 자나도 육체가 영혼에서 분리되었을 때 죽지 않고 살아 있었으니까."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지나치게 개방적인 곳에서들 하고 계시네요."


파리스가 두 사람의 앞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포트에서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런 계절에 뜨거운 차라니. 하지만 이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불만을 표하지 않고 제 몫의 찻잔을 들었다.


"뭐, 저를 지나치게 신뢰하신다는 건 잘 알겠는데······."

"그러고 보니, 시칼트라 학장에게 조언을 구할 수는 없나? 인간의 영혼을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어내려 하는 마법사라니. 학장의 입장에서 좌시하기 어려운 사안일 텐데."


왜 그 생각을 진작 하지 못했지? 학장이라면 분명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엘과 달리 바넬드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학장님께 무언가를 여쭤보려면 모든 걸 다 털어놓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학장님은 자나 씨에 관해 이야기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거든요."

"하지만 나에게는 분명 먼저 자나의 이름을 꺼냈는데."


파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엘 씨는 외부인이니까요. 슬쩍 떠보신 거겠죠. 자나 씨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고 생각하긴 하실 겁니다."


하여튼 자나가 의심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고 털어놓으면, 학장의 도움을 받기 어려울 거라는 건가. 뭐가 이렇게 복잡한지. 이엘은 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거참,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그는 홧김에 차 한 잔을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지만 뜨거운 게 들어가니까 오히려 머리가 더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잠깐만."

이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다른 두 남자가 조금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통신기 좀 빌리겠습니다, 파리스 씨."

"그러시죠. 저번처럼 제 방에 있는 걸 쓰시면 되겠네요."


그는 파리스의 방에서 통신기를 들었다. 신호가 가는 동안 괜히 긴장감이 들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 안을 둘러보며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이엘 알체이라?"

"오랜만입니다, 윌 로체스티아 조사관님."


통신기 너머로 상대가 짜증을 내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차, 습관적으로 이름을 처음부터 끝까지 불러 버렸군. 하지만 다행히도 로체는 통신을 끊어 버리지 않았다. 이엘이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한 건 처음이었다. 이게 꽤 중요한 용건일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지?"

"함께 새서림에 있는 인형의 집에 갔던 거, 기억하시죠?"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 그걸 잊어버렸겠나?"


하긴, 그건 채 보름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이엘에게는 그 뒤로 흐른 시간이 거의 영겁처럼 느껴졌지만.


인형의 집에 방문했을 때, 로체는 로비를 한참이고 구경했다. 분명 그때 자나는 말했다. 여기는 세 번째 눈을 가진 사람에게 볼 것이 아주 많은 곳이라고.

이엘은 로체가 거기에서 무엇을 봤는지 알아야 했다.


"그 인형의 집에서 한참이고 로비를 구경하셨죠. 저와 그 인형사는 안쪽으로 들어갔고요. 기억하십니까?"

"마치 내가 팔십 먹은 노인이라도 된 것처럼 하나하나 확인하는군, 자네."

"그때, 거기서 대체 뭘 보셨습니까?"


누군가가 공기를 뚝, 잘라낸 느낌이었다. 분명 직전까지 두 사람은 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화는 여기에서 끊겨 버렸다.


"방금 뭐라고 했지?"

"인형의 집에서 뭘 보셨냐고 물었습니다."

"미안하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 하고 싶지 않군."


이엘은 그만 통신기를 집어던질 뻔했다.


"조사관님, 저는 지금 아주 심각합니다. 그게 사건의 진상과 맞닿아 있는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사건의 진상이라는 건 무슨 뜻이지? 무슨 사건을 말하는 건가, 자네는?"

"그 인형사는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가 그렇게 될 걸 알고 있었습니다."


로체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답답해 미치겠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사월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그 인형의 집에 가서 모든 걸 박살을 내며 캐묻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그는 루토 시칼트라에게 진짜 영혼석을 맡긴 상태였다. 그걸 돌려받기 전에는 안타레스를 떠날 수 없었다.


"우리가 고등 마법 무기 연구소에서 영혼석을 감정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레몬을 제 쪽으로 딸려 보냈죠."


인간의 영혼이 들어가 있는, 그것도 병기 그 자체인 인형을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인형에서 눈을 떼고 있다는 사실조차 불안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너무나도 많은데, 그의 몸은 하나밖에 없다는 게 원망스러웠다.


"무슨 의도로 그 인형을 자네한테 보냈다는 거지?"


그건 아직 불분명한 부분이었지만, 이엘로서는 그게 좋은 의도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야, 그 인형 안에 들어있는 건······.

하지만 차마 그 말만은 할 수 없었다. 그걸 꼭 말해야 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그렇다고 한들, 그 인형을 가져가자고 한 건 나였어. 만약 내가 반대했다면 그 인형사의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을 텐데."


"아뇨, 반드시 계획대로 됐을 겁니다. 제 추측에 의하면 당신이 거기서 무언가를 봤을 테니까요. 그걸 보고 그 인형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건 뭐였습니까?"


아무래도 대답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그렇다면 대답하게 만들 수밖에.


"사월에서 뵙죠."


이엘은 통신을 끊어 버림으로써 한참 동안 이어지던 침묵 역시 끊어 버렸다.


이로써 그가 자나에게 품은 의심에 무게추가 더해졌다. 그는 인간의 영혼을 다루는 마법사면서, 연구소의 참살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가 범인이든 범인이 아니든 사건에 깊이 관계된 사람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었다.


"늦어도 내일은 안타레스를 떠나야겠군요."


파리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토 시칼트라는 영혼석을 보는 데 길면 하루 정도가 걸릴 거라고 했었다. 그 일이 끝나는 대로 여기를 떠야겠다는 게 이엘의 결론이었다.


"아이니 교단에서 곧 사람들이 올 거라고 했는데, 한 번 만나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제가 말입니까? 왜죠?"


아주 잠깐이었지만 파리스의 표정이 바뀌는 걸 이엘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건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걸 꼭 말로 해 줘야 아나.


"사람을 찾고 계신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순례자들은 제국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니, 그만큼 아는 게 많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렇군요."


그럼 이대로 그 사람들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조급해서 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 약물이나 술 같은 걸 잘 아는 사람 있습니까?"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에 그리 좋은 방법 같지는 않은데요."

"농담이죠?"


"안타레스도 꽤 방탕한 도시랍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많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죠. 평범한 약물이라면 저도 어느 정도는 조예가 있습니다만."

"약물에 조예가 있다는 걸 보니, 무료한 시간을 때울 일이 많았나 보네요."


파리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렇지 않게 빠져나가는 솜씨는 과연 일류였다. 이엘은 그의 과거가 그리 얌전하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고 추측했다.


"어쨌든,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저한테 물어보시죠. 어중이떠중이들보다는 나을걸요."

"안타레스가 방탕한 도시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약물을 사용한 유흥이 성행한다는 건가요?"


이엘이 응접실 창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방탕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풍경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무, 풀, 지붕 넓은 시계탑과 잔디밭. 조금 더 가면 그가 루토와 함께 몸을 던졌던 호수도 있을 터였다.


호텔이 있는 도심 쪽도 분위기가 그리 크게 다른 건 아니었다. 유흥가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한 골목만 더 안으로 들어갔으면 다른 풍경이 나왔을까.


"말 그대로죠. 술과 약물, 그리고 환각 마법까지. 다들 그런 건 어디서 배우는 건지. 아레인스터는 그리 행실이 바른 학생들만 다니는 학교가 아니거든요."

"환각 마법이라. 마약을 마법으로 구현한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면 되죠. 온갖 걸 다 볼 수 있거든요. 옛날 생각나네요. 저도 학창 시절에는······."

"말끝 흐릴 거 없이 그냥 얘기하셔도 되는데요."


어쨌든, 방탕한 도시라는 건 안타레스의 이면이었다. 젊고, 뭐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라면 그런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지만.


"하라딘이라는 약물, 들어 보셨습니까?"

"하라딘이라고요?"


오늘 아침 이엘의 방에 도착한 우편물은, 척 보기에도 수상한 흰 가루였다. 그리고 레몬은 분석 끝에 그 가루가 하라딘이라는 마약이라고 말했었다.

"그런 이름으로 기억하는데요."


정확히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적어 둔 거지만. 파리스의 미간에 그늘이 졌다.


"이엘 씨. 제가 환각 마법 같은 걸 가지고 놀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그리 심각한 게 아니었어요. 사실 환각 마법이 학생들 사이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던 건 그게 신체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거든요. 그러니까, 한때 잘 즐기고 과거로 묻어두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마약, 그중에서도 하라딘 같은 건······."


"지금 그걸 가지고 있습니다. 무게를 재 본 건 아니지만 약 200g 정도."


파리스는 이엘을 만난 이래 가장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현관에서 루토 시칼트라와 함께 잠들어 있는 이엘을 깨울 때도 아주 차분한 태도였는데.


"하라딘은 일정 용량 이상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범죄라고요. 의사나 소지 허가를 받은 마법사조차. 안타레스에서도 오래전에 한 번 난리가 난 적이 있었죠. 도대체 그런 위험한 걸 어디다 쓰시려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누군가가 이걸 제 숙소로 보냈습니다. 오늘 아침에 말이죠."

이엘은 그가 쓰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그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란 말인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입을 뗐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잠시만요. 아마 아이니 교단 쪽에서 왔을 겁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제국 사냥꾼은 총을 두 번 쏜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지각 사과 및 연재 관련 공지 22.12.08 77 0 -
142 추심 +1 22.12.03 64 2 12쪽
141 정리정돈 +1 22.12.01 32 2 12쪽
140 결착 22.12.01 25 2 12쪽
139 세 번째 만남 +1 22.11.29 40 2 13쪽
138 남겨진 사람들 +1 22.11.27 23 1 12쪽
137 실종 22.11.25 26 1 12쪽
136 유일한 목격자 22.11.24 32 1 12쪽
135 왕의 귀환 22.11.23 33 1 12쪽
134 빈틈 +1 22.11.20 71 2 12쪽
133 꽃의 공주 22.11.19 30 2 12쪽
132 신의 부산물 22.11.18 35 2 13쪽
131 진짜 이야기 +1 22.11.17 55 2 13쪽
130 책의 무덤 +1 22.11.16 33 3 12쪽
129 복수 22.10.08 42 3 13쪽
128 맹금류와 작은 새 22.10.07 34 3 13쪽
127 이 싸움이 끝나면 22.10.06 31 3 13쪽
126 마법의 헤어드라이어 22.10.05 37 4 12쪽
125 발라딜로와 기묘한 상자 22.10.04 48 4 13쪽
124 정보 교환 22.10.01 27 4 13쪽
123 금연 구역 +1 22.09.30 39 4 13쪽
122 하산 +1 22.09.29 43 4 12쪽
121 불행에 대하여 22.09.28 49 4 13쪽
120 귀농한 사냥꾼의 삶 22.09.27 38 4 12쪽
119 뻐꾸기 사냥 +1 22.09.26 65 4 12쪽
118 북쪽 끝 +1 22.09.23 43 4 13쪽
117 사자와 사도 +1 22.09.22 50 4 12쪽
116 인질극 +1 22.09.21 74 4 12쪽
115 결코 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 것 +1 22.09.20 48 4 12쪽
114 꼬리 잡기 +1 22.09.18 55 4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