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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건영(建榮) 님의 서재입니다.

패국통천가(覇國通天歌)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드라마

건영(建榮)
작품등록일 :
2021.05.12 10:33
최근연재일 :
2021.06.25 10:00
연재수 :
42 회
조회수 :
12,438
추천수 :
390
글자수 :
249,672

작성
21.06.0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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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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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약속(約束)

DUMMY

검붉은 피를 보며 적휘도 크게 놀랐다.


진월영이 영복의 어깨살을 한 뭉텅이나 베어냈던 것이다.


멀쩡한 생살을 베어내고도 자신의 실력에 미소를 흘리는 노인의 모습은 가히 미치광이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점점 시간이 흐르자 방려는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미치광이처럼 보이는 노인의 손놀림은 신의라는 소리를 듣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환부를 대하는 진중한 표정, 쾌속하면서도 섬세한 동작으로 수술을 진행하는 노인의 모습은 신의(神醫) 그 자체였다.


피를 닦아내고 술을 부은 후 말린 약재를 올리고 예의 비단천으로 정성껏 환부를 감아 매듭까지 완벽하게 마친 진월영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살을 도려내는 의술의 핵심은 그 속도에 있다. 장기에 손을 댈 때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이따위 살점이나 도려내는 일에도 필수적인 일이다. 오직 빨리 해내야 만이 천지에 산재된 독이 침투할 시간을 없애고 환자의 고통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보았느냐?”


적휘가 대답조차 하지 못했고 진월영은 예의 광기어린 표정으로 낄낄거렸다.


“크크큭. 자, 이제 네 차례다. 저놈이 독에 당한 곳은 이쪽과 같은 어깨를 포함해 허벅다리, 그리고 옆구리에 있다. 환부의 위치로만 따지자면 저놈은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지. 하지만 이대로 방치한다면 살점부터 썩어 들어가 골수에까지 독이 침투하여 죽음에 이를 것이다. 뭣 하는게야. 어서 시작하지 않고.”


마침내 칼을 들고 사도칠의 앞에 선 적휘는 두 눈을 감고 고심을 거듭했다.


진월영의 손놀림을 빠뜨리지 않고 보았지만 또다시 그가 골머리를 앓게 만든 것은 신체의 차이였다.


풍만한 영복과 근육질인 사도칠의 신체는 너무도 달랐다.


손에 쥐어진 작고 차가운 날붙이가 어색하고 껄끄럽기 그지없다.


적휘는 문득 어린 나이를 핑계로 칼 한번 잡지 못하게 했던 사도칠을 원망했다.


그는 두군거리는 마음을 가슴 깊은 곳으로 몰아붙이고 손에 든 칼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가 배어 나왔다.


검붉은 사도칠의 피는 그를 격동시키기 충분했건만 그는 내쉬는 호흡 한번에 흔들리는 마음을 호수물처럼 잔잔하게 다스렸다.


뒤이어 말린 약재를 꼼꼼히 올리고 보물 다루듯 조심스레 환부를 묶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진월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내 일찍이 수많은 인재들을 보았건만, 저런 미친종자는 처음 보는군. 허허.”


진심이었다.


그가 시범을 보였다고는 하나, 지금 적휘가 해내고 있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경력이 충분한 의원들도 따라하기 어려운 것을 한낱 어린 아이가 해내고 있는 것이다.


어깨에 이어 옆구리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차갑고 냉랭했던 진월영의 콧등에 식은땀이 돋았고 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 모습에 방려의 어깨는 절로 들썩였다.


어찌 대견하지 않을까.


허나.


츄츄쥬쥬쥭!


아쉽게도 운은 거기까지였다.


막 칼을 대기 시작한 사도칠의 허벅다리에서 피가 치솟았다.


이전의 출혈과는 그 속도와 양의 차원이 달랐다.


삽시간에 뜨거운 피를 뒤집어 쓴 적휘는 몸은 물론 정신까지 얼어붙었다.


난데없이 덮친 당황과 불안으로 인해 피가 치솟고 있는 환부를 누르지도 못할 정도였다.


본디 운은 기회와 준비의 만남이라 했던가.


가히 천재라 불릴 만한 재능을 드러낼 기회가 생겼지만 그에 대한 준비가 현저히 작았던 것은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하하하하하하핫. 비켜랏!”


경박한 웃음소리가 두려움과 절망 속에 잠식된 적휘의 영혼을 깨웠다.


멍하게 있는 적휘를 거칠게 밀어 젖힌 진월영이 사도칠의 다리를 맞이했다.


그리고 보는 이로 하여금 숨도 쉬지 못할 만큼의 신기를 발휘했다.


그렇다. 그야말로 신기(神技)였다.


진월영은 칼이 아닌 바늘과 실을 들고 작디 작은 핏빛 전장 사이사이를 거침없이 누볐다.


“닦아! 어서!”


그의 윽박에 방려는 깨끗한 천을 들고 그의 이마를 꼼꼼하게 닦고 또 닦았다.


그도 힘이 부치는 상황인지 이마에서 연신 굵은 땀방울이 흘렀던 것이다.


무려 반 시진(1시간)이 지났다.


진월영이 터벅터벅 걸어오자, 아직까지 얼어붙어 있던 적휘가 입을 열었다.


“도칠은······”


잘게 떨리는 낮은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살았다.”


그 한마디에 적휘의 눈에서 한 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월영은 대수술을 진행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평안한 신색이었고, 그의 눈에는 그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함과 자애로움이 서려 있었다.


“꼬맹아. 너는 잘 했느니라. 비록 모방한 것에 불과하나 몇 십 년 의원 짓거리를 하던 놈들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복의 팔과 비교하여 너무도 적절한 크기로 환부를 절제했고 옆구리도 거의 완벽에 가까워 이몸이 놀랄 정도였다. 허벅다리의 절제 크기 또한 상처의 비율로 따지자면 더할 나위 없었다. 다만 그곳은 커다란 혈관이 여럿 존재하는 곳. 피하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지. 운이 없었던 게야. 네놈이 자책할 필요는 없다.”


“하마터면 내가··· 도칠을 죽일 뻔 했다···”


“도련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도련님이 얼마나 애쓰셨는지 얼마나 필사적이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르신은 이제 살았습니다. 더 마음 쓰지 마세요.”


방려는 적휘를 꼬옥 안아주었다.


익숙한 그녀의 향기로 인해 적휘는 세차게 흔들리는 가슴을 조금씩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커다랗게 자리잡은 마음 속 충격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두사람이 온기를 나누고 있을 때, 진월영은 연신 이죽거렸다.


그리고 그들의 몸이 떨어지자마자 참고 있던 말을 꺼냈다.


“자, 꼬맹아. 우린 내기를 했었지? 약속을 지킬 시간이다. 하하하핫.”


그 말에 소름이 끼쳤던 방려는 적휘와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달라붙었다.


“도련님은 안됩니다. 제가 대신하지요.”


“하아. 이런이런. 멍청한 것이 끝까지 방해만 되는구나. 내가 형편없는 네 몸뚱이를 어디다 쓰겠느냐? 비키거라.”


“절대 비킬 수 없습니다.”


“려. 그만해. 일낙천금이라 했어. 약속은 지켜야지.”


적휘의 눈은 어느새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물기 어린 방려의 시선도 그를 흔들진 못했다.


그에 진월영은 손뼉을 치며 반색했다.


“이놈. 몸집은 작아도 벌써 헌헌장부일세. 하하핫. 그럼. 그래야지. 남아일언중천금이지.”


“혹 질문을 해도 되나?”


“뭐냐?”


“내 몸 어디가 필요한가?”


“히히히힛. 그걸 미리 말해주면 재미가 없질 않느냐. 어짜피 몸뚱이를 내놓으려면 네놈도 마비산을 복용해야 하느니라. 잠에서 깨어나면 알기 싫어도 알게될테니 너무 서두르지 말거라. 하핫.”


“가지.”


진월영은 싱글벙글 앞장섰고 적휘는 따라오려는 방려를 어렵사리 제지한 후 태연하게 따라나섰다.


그들은 건물을 나서서 진월영과 처음 대면했던 창고 같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진월영은 들어오자마자 하나밖에 없는 문을 단단히 잠궜다.


괴이한 공간이었다.


벽면에는 수십 개의 유리병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속엔 알 수 없는 물체들이 색색의 액체 속에 담겨 괴이함을 더해주고 있었다.


진월영은 수십 개의 촛불을 밝히고 자신의 손에 놀아나던 노루의 사체를 말끔히 치웠으며 그 자리에 깨끗한 백색 천을 깔아둔 뒤 적휘에게 누울 것을 권했다.


적휘는 요즘 들어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너무 자주 체감한다고 생각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자신이 노루와 같은 위치에서 저 광기어린 영감의 처분만을 기다릴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조금은 겁이 났지만 왜인지 지금와서 약속을 무를 생각따윈 들지 않았다.


그는 기다란 탁자 위에 올라 진월영이 가죽끈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구속하는 것을 천천히 기다렸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마비산을 만드는 중이니. 네놈처럼 어린 놈은 처음이라 이몸도 적절한 용량을 모르거든. 이걸 너무 많이 마시면 실명을 하거나 죽음에 이르기도 하니까 말이야. 하하하핫. 하지만 걱정말거라. 내 적당히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


적휘에겐 ‘적당히’라는 단어가 너무도 무시무시하게 들렸지만 딱히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동떨어진 곳에서 온몸이 칭칭 묶였으니 어쩌겠는가.


적휘는 그저 곱게 두 눈을 감았다.


어느새 제조를 마친 마비산이 그의 입으로 들어왔다.


쓴 맛이 느껴지긴 했으나 그와는 다른 묘한 맛이 그의 감각을 지배했다.


“이놈아. 무섭지도 않느냐?”


“무섭다.”


“낄낄. 그래. 무섭겠지. 무섭지 않으면 그게 사람이겠느냐. 어디가 잘려 나갈지도 모르니 그 무서움은 더 크겠지.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몸이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할테니.”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했다. 한낱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도 불효라 들었다. 내 비록 부모님을 뵙지는 못했지만, 보지도 못하고 불효를 저지르니 어찌 무섭지 않겠나.”


진월영은 차분하게 말을 잇는 적휘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라? 하하하하하핫. 걸물이로세. 진정 올해로 여덟인게냐? 좋구나. 좋아. 하지만 네가 말한 것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위인들이 지껄이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어째서?”


적휘의 진지한 물음에 진월영은 짧게 자른 자신의 머리와 수염을 바싹 깎은 턱을 매만지며 웃었다.


“사람은 왜 옷을 입는가. 부모가 준 고귀한 터럭이 있는데. 왜 낳아준 몸을 자랑스레 펼치지 않고 감추기에 급급한 것이지?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관습일 뿐이지. 머리칼 뿐만 아니라 사람 몸에 있는 터럭들은 그 쓰임새가 전무하다. 동물들처럼 보온의 기능은 커녕 위생적으로도 실패작에 불과하지. 더럽고 관리가 힘들다는 것은 그만큼 온 세상에 즐비한 독소들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고작 머리털 하나가 더러워 이 사람이라는 고등동물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 말의 진의를 알겠느냐?”


진월영은 전과 달리 웃음기를 배제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적휘가 고민할 약간의 시간 또한 기꺼이 기다렸다.


“한낱 머리칼을 자르지 않아 오히려 일찍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더 큰 불효를 행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 정확하다. 여느 돌대가리들과 달라서 가르치는 맛은 있구나. 허허. 요놈 보게. 하하핫.”


“말 다했나?”


“엥?”


“다했으면··· 시작해라. 잠온다···”


진월영은 적휘의 태연스러운 모습에 기가막혀 헛웃음만 지었다.


“크하하핫. 약발이 도는구나. 걱정마라. 이몸이 이 땅의 의술 역사가 바뀔 만한 수술을 해주마. 기대해도 좋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세상이 너를 기다릴테니까. 아하하하핫.”


진월영의 목소리를 아련하게 들으며 적휘의 두 눈이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스르르 감겼다.


아주 예리하고 작은 칼을 들고 광인처럼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진월영의 마지막 모습도 점차 그의 의식에서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떳을 때는 세상의 반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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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출발(出發) +3 21.06.04 216 11 14쪽
» 약속(約束) +1 21.06.03 234 11 11쪽
25 모방(摹倣) +1 21.06.02 227 10 14쪽
24 망량신의(魍魎神醫) +1 21.06.01 254 8 17쪽
23 비금곡(秘琴谷) +2 21.05.31 248 9 15쪽
22 탈출(脫出) +3 21.05.28 274 9 17쪽
21 노장(老將) +1 21.05.27 283 9 11쪽
20 재회(再會) +1 21.05.26 294 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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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감옥(監獄) +2 21.05.24 333 9 13쪽
17 원한(怨恨) +2 21.05.23 336 9 13쪽
16 사라지다 - 2 +1 21.05.22 336 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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