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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건영(建榮) 님의 서재입니다.

패국통천가(覇國通天歌)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드라마

건영(建榮)
작품등록일 :
2021.05.12 10:33
최근연재일 :
2021.06.25 10:00
연재수 :
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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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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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
글자수 :
249,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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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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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재회(再會)

DUMMY

폭발로 인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성벽 사이.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그곳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그리고 그곳이 훤히 보이는 누각 위에 몇 사람이 전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럽구나. 응당 선봉에 서서 검을 휘둘러야 마땅하거늘, 할 수 있는 것이 뒤에 숨어 지켜보는 일이라니.”


만보당 당주 홍일소였다.


그가 긴 한숨을 내쉬자 신자호가 즉시 반박했다.


“부끄럽다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들은 그저 당주님께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자호야. 자호야.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결코 창피한 일이 아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사실은 사람이 한낱 짐승과 달리 깊고 높은 격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지. 그리고 그 부끄러움은 타인의 시선보다 자신의 시선에 더욱 민감해야 하는 법이다. 내 오늘은 비록 스스로가 부끄러우나 절차탁마(絶磋琢磨)하여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나아가야 하지 않겠느냐.”


홍일소의 말에 신자호는 즉시 무릅을 꿇었다.


“모두 제 탓입니다. 이 모든 일이 제가 미욱하여 벌어진 일. 받아 마땅한 벌을 아직도 받지 못했으니 소인의 죄를 벌하여 주십시오.”


“세상만사는 언제나 제 뜻을 벗어나는 법인데 어찌 이 모든 것이 너의 탓이란 말이냐. 이 또한 하늘의 뜻이겠지. 따지고 보면 상황이 급하다 하여 그곳을 지키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맡긴 나의 탓이 크다. 너에게 벌을 주려면 응당 내가 먼저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당주! 어찌 그런 말씀을.”


신자호는 머리를 땅에 닿을 듯 더 깊이 숙였다. 충심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몸짓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수습하면 그뿐이다. 더는 괘념치 말거라.”


“충!”


신자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전장을 바라보는 홍일소의 눈은 점점 가늘어지고 있었다.


“수비대의 수준이 꽤나 탄탄하구나. 청양 수비대장이 누구더냐?”


“임충이라 들었습니다.”


대답을 한 것은 홍일소 뒤에 시립해 있던 적성이었다.


“임충? 호오. 만난적 있는 자 였군. 그래. 기억이 난다. 꽤나 혈기왕성한 사내였지. 이젠 그자도 나이를 꽤 먹었겠구나.”


“당주. 곧 금사군이 나올 것입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기대가 되는군. 추팽 그자를 닮았다면 얼마나 허둥지둥하고 있을꼬. 하하. 동쪽은?”


“예. 동쪽의 정찰에 많은 인원을 투입했습니다.”


“그럼 됐다. 그곳에서 소식을 보내오는 즉시 병력을 철수시킨다.”


석상처럼 서 있던 적성이 홍일소에게 다가와 작게 일렀다.


“별동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아서라, 아직은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된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한다. 우린 그저 이곳을 시끄럽게 뒤흔들면 되는 것이야. 그들이라면 지금의 기회를 헛되이 할 리 없지. 지금은 그들을 믿어야 할 것이다.”


“예.”


적성의 대답은 짧고 빨랐다.


주군은 멀리서도 전장을 손바닥 보듯 하는 지자(知者)였으니 자신의 생각따윈 필요치 않다.


적성은 미리 챙겨둔 쟁반을 내밀었고, 홍일소는 약 사발을 집어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수건으로 입을 닦은 홍일소의 눈이 다시 전장으로 향했고, 적성은 그런 그의 옆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깊은 통찰과 날카로운 재지로 자신을 흥분시키는 사내.


오랜 시간 모셨지만 이 사내의 속내는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어지간해서는 감정표현이 없는 적성이 연하게 웃었다.


속을 내비치지 않지만 그 속에 환한 빛이 옅보이는 자신의 주군을 보며.






*






적휘를 데리고 내성을 빠져나가는 수비대 병사들은 예상보다 쉽게 움직이고 있었다.


커다란 폭발이 있은 후 그들을 가로막던 금사군은 연정백을 호위하며 먼저 물러갔다.


그 뒤로는 탄탄대로였다.


내성을 지키는 수비대장 임충은 그곳을 탈출하는데 최적, 최단의 경로를 모조리 꿰차고 있었으니까.


금사군 몇몇이 따라 붙긴 했지만 자신들 또한 수비대 정예였기에 어렵지 않게 따돌릴 수 있었다.


폭발이 발생한 곳은 서쪽. 현재 가장 소란스러운 곳도 서쪽이다.


까닭은 알 길이 없으나 최대한 빨리 반대쪽으로 가야만 탈출 가능성도 높일 터.


임충은 적휘를 데리고 탈출하는 것이 쉽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열 살도 안된 아이를 데리고 탈출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적휘는 결코 짐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달리고 있음에도 따라 붙는데 처지지 않을 뿐더러 적이 나타나 칼부림이라도 일어나는 때에는 귀신같이 최선의 위치로 몸을 옮긴다.


경험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몸놀림이었다. 게다가 너무도 태연한 표정이지 않은가.


‘그런가··· 이토록 어린데··· 아니, 지금보다 어릴 때부터 사선을 넘으며 살아온 것인가.’


순간 적휘의 유년 시절을 그린 임충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아무리 세상이 이 지경이라지만 너무하지 않은가.


그는 기필코 이 어린 아이를, 마땅히 보호 받아야 할 제백의 씨앗을 지켜내리라 다짐했다.


이제 동쪽 외벽이 얼마남지 않았다.


저기 앞에 보이는 소안탑(小雁塔)만 지나가면 된다.


수비대 병사들의 얼굴에 희망이 엿보이기 시작할 때 앞에서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날아왔다.


임충은 간신히 몸을 돌려 피했다.


쐐애애애애액


퍼억


임충의 뒤에서 달리던 병사 하나가 포탄을 맞은 것처럼 날아갔다.


그것은 화살이었다.


화살 한 대에 뛰어가던 자가 반대로 날아간 것이다. 화살을 쏜 자가 얼마나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예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뒤이은 커다란 웃음소리에 임충의 얼굴은 무참히 구겨졌다.


“으하하하핫. 빗나갔구나.”


수도에서 온 거대한 몸뚱이를 자랑하는 장수.


추팽이었다.


그를 따르는 금사군의 수는 열 명. 불리하긴 해도 충분히 해볼만한 숫자였다.


임충은 적휘를 뒤로 한 채 앞으로 달려나갔다.


기합과 함께 맹렬한 기세로 나아가는 검.


허나, 그 검은 추팽의 거대한 검에 부딪쳐 튕겨나왔고 임충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손아귀에서부터 저려오는 통증이 너무도 강렬했던 것이다.


“어때 노인장. 찌릿찌릿 하지? 크하하하. 그러게 나이가 찰 만큼 찼으면 뒷방으로 물러날 것이지 무슨 영광을 누리겠다고. 아, 나이를 너무 먹다보니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건가?”


분했지만 강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수도에서 온 추팽을 처음 마주했을 때, 임충은 저토록 경박하고 무식한 장수를 둔 금사군이 불쌍하다 여겼다.


여전히 그 생각엔 변함이 없으나 형편없는 인격과는 달리 타고난 힘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임충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주변에서 금사군과 맞붙어 싸우고 있는 수비대 병사들을 급히 돌아보았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수장의 모습을 보고 별 볼 일 없을거라 판단했던 금사군은 수비대 정예를 거세게 압박하고 있었다.


수비대 병사들의 눈에 독기가 어려 있었지만 실력으로도 수적으로도 열세를 극복하기 힘들어 보였다.


“저희가 막겠습니다.”


“어서 마마를 데리고 빠져나가십시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변치않는 병사들의 충정에 임충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도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여기에 뼈를 묻을 것이다.


‘생각을 해라. 생각을. 어찌해야 하는가.’


“이 늙은이가 미쳤구만. 싸우다 잡생각을 하면 빨리 뒈져야지!”


추팽의 검이 긴 호선을 그리며 날아들었다. 검을 양손으로 잡아 간신히 막아낸 임충은 하마터면 허리가 꺾일 뻔 하였다.


‘검이란 저리 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추팽의 검은 그저 무식하게 휘두르기 일쑤였기에 빈틈이 많이 존재했다. 허나 그 공격을 한번이라도 허용하게 된다면 죽음을 피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저 곰같은 놈과 맞부딪치면 안된다. 피해야 한다.


단 두번의 부딪침이 있었을 뿐이지만 임충은 사지가 떨려옴을 느꼈다.


나이는 속일 수 없다. 치가 떨릴 정도로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는 자신의 노쇠함을 피부로 느꼈다.


하지만 저 검을 피할 수도 없다. 지금 자신의 뒤에는 반드시 지켜야할 아이가 있으니까.




쿠와앙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흘렀다.


그럼에도 임충은 손에서 검을 놓지 않았다.


팔이 꺾이며 옆구리가 크게 베였다.


힘겹게 일어선 그는 익숙치 않은 왼손으로 검을 다시 들었다.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도 없었다. 임충은 입 안에 가득 찬 피를 뱉어내며 죽음을 각오했다.


그때, 그의 등에 작은 온기가 느껴졌다.


“그만해.”


그의 등에 손을 댄 것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적휘였다.


임충은 고개를 흔들며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마마. 뒤로 물러 서십시오. 이 몸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마를 꼭 지키고 말 것입니다.”


쓰러질 듯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무인으로서의 결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은 단호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적휘 또한 물러서지 않았다.


“그게 아니야. 도칠이 왔어.”


“그게 무슨?”


“많이 다쳤어. 이제 그만해도 돼.”


갑자기 어디선가 짐승의 소리와 같은 괴성이 들려왔다.


그 크고 거친 쇳소리는 잘 단련된 무인들을 움츠리게 할 만큼 강렬한 무언가가 배어 있었다.


그 소리에 검을 휘두르던 금사군이 뒤를 살폈고 임충을 공격하던 추팽의 시선도 돌아갔다.


그곳엔 악귀같은 얼굴을 한 노인이 범과 같은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도칠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노한 호랑이처럼 매서웠고 그의 다리는 지칠 줄 모르는 적토마처럼 날랬다.


벼락같이 달려와 전장에 합류한 그는 단숨에 금사군 두 명을 쓰러뜨렸다.


그 엄청난 기세에 추팽조차 한걸음 물러섰고 사도칠은 즉시 그 틈으로 뛰어들었다.


“소주!”


“도칠!”


적휘가 양팔을 벌렸지만 사도칠에겐 적휘의 몸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소주. 어디 다친 곳은 없으···”


오래 확인할 것도 없었다. 사도칠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짓밟히고 짓이겨졌는지 옷이 엉망으로 찢어져 군데군데 맨살이 드러났다.


드러난 맨살은 성한 곳이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에는 쓸리고 까져 딱지가 앉기 직전이었고 눈 아래 뺨에는 시퍼런 멍이, 입술은 터져서 너덜너덜했고 목덜미엔 칼에 베었는지 가느다란 핏빛 자국이···


사도칠의 숨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할 때 적휘가 입을 열었다.


“늦었어.”


빙그레 웃으며 핀잔을 준다.


알고 있다. 그저 그들끼리의 화법이다.


이 작은 주인에겐 성격 급하고 어리석어 제 주인의 안위를 도외시한 채 자리를 비운 쓸모없는 노복을 탓할 생각따윈 눈꼽만큼도 없다.


그저 반갑다고. 보고싶었다고. 그렇게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사도칠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잘못했소. 노복이 잘못했소이다...”


“알면 됐어.”


조그만 손과 그리 넓지 않은 가슴이 사도칠을 감싸 안았다. 넓은 가슴과 거칠고 투박한 손이 그것을 맞이했다.


사도칠의 눈이 감겼다.


됐다. 만났으면 그걸로 된 것이다. 이제부턴 죽든 살든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을 가로 막는 것들은 모조리 베리라.


안타깝게도 그들이 재회의 기쁨을 나눌 시간은 길게 허락되지 않았다.


유난히 목청이 좋은 추팽의 외침이 그들을 찔러온 것이다.


“뭐야. 이 미친 영감탱이는. 노인네들이 단체로 죽고싶어 환장을 했나.”


사도칠이 웃었다.


그는 적휘의 어깨를 두드렸고 적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몸을 돌린 사도칠의 얼굴은 고약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뒤이어 나온 꺼끌꺼끌한 목소리는 험상궂기 그지없었다.


“어이. 점박이. 죽고 싶으냐?”


너무 어이가 없어 한동안 입을 못다물던 추팽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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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출발(出發) +3 21.06.04 216 11 14쪽
26 약속(約束) +1 21.06.03 234 11 11쪽
25 모방(摹倣) +1 21.06.02 227 10 14쪽
24 망량신의(魍魎神醫) +1 21.06.01 254 8 17쪽
23 비금곡(秘琴谷) +2 21.05.31 248 9 15쪽
22 탈출(脫出) +3 21.05.28 274 9 17쪽
21 노장(老將) +1 21.05.27 283 9 11쪽
» 재회(再會) +1 21.05.26 295 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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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감옥(監獄) +2 21.05.24 333 9 13쪽
17 원한(怨恨) +2 21.05.23 337 9 13쪽
16 사라지다 - 2 +1 21.05.22 336 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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