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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1화

청나라 가경제 때에 일어난 대반란(1796 ~ 1805)이다. 삼대의 봄이라 하여 1세기 넘게 번영하던 청나라의 전성기가 끝났음을 암시한 사건.





백련교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난이라 하여 백련교도의 난이라 한다.




반란의 주요무대는 후베이 성(湖北)·쓰촨 성(四川)·산시 성(陜西)의 3성(省)이 접경을 이룬 크고 넓은 산악 지대였다. 이 지대는 청조 이래 화난·광둥 등 인구가 조밀한 지방으로부터의 이주자가 많고, 일시적으로는 옥수수를 비롯한 잡곡 생산과 목재·광산업이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후일 청조의 행정·재정 지배가 시행되고, 시비(施肥) 기술의 미발달에 따른 토지 생산력의 고갈도 현저해졌으므로 궁핍화된 민중 사이에 불온한 움직임이 뚜렷해졌다. 행정체계의 '둔화현상'태평성세를 구가하는 기간동안 황제에게 집중된 권력은 역으로 관료들의 창의성을 억제했으며 누대에 걸치면서 선발되는 관료들 역시 과거시험으로 인해 평균 연령층이 노년화된데다 일단 과거를 거쳐 급제된 이들은 대부분 민생과 대외정책에 있어 현실미봉책에 급급했고 무사안일주의에 빠졌으니, 청조말엽의 행정체계의 비능률과 침체현상에 더더욱 가속화를 촉진했다고 볼 수 있다. 당대 지식인인 공자진의 비유처럼 "옴에 걸린 사람을 근본적으로 치유하려 하지는 않고 당장 긁지 못하게 하기 위해 침상에 묶어놓은 것"으로 표현한 것은 청조 말엽의 세태를 정확히 꼬집은 표현이었다. '사회전반'에 걸친 사치풍조와 부패의 만연이었다. 사치를 조장하는 풍조는 건륭제에 이르러 극에 달했는데, 황제를 포함한 황족, 고관대작과 부농, 부호에 이르기까지 사치를 일삼았으며, 이와 더불어 관료들에 대한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단적인 예로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군기대신의 자리에 24년을 재직한 화신의 경우 그의 사후 몰수한 가산의 추정액이 당시 정부의 12년치 세입액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백련교가 빈농과 반부랑자적(半浮浪者的) 노동자 사이에 퍼져 1796년 후베이 서북부의 봉기를 발단으로 하여 각지에서 반권력(反權力) 폭동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통일적인 조직, 목표, 지도자가 결여되어 있었으나, 교묘한 게릴라전으로 청조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당시 청조는 묘족 반란이 일어나 팔기군을 보내 진압중이어서 초기에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에 진압을 시도했지만 이미 세력은 커져있었고 고전하게 된다. 게다가 막대한 은을 소모하면서 주둔지가 있는 곳의 물가는 폭등했다.




결국 청은 주민들을 소개하고 성을 쌓아 그곳으로 수용하여 반군과 주민들을 분리시킨 끝에 겨우 진압하게 된다. 더군다나, 반란 진압의 공로자는 청조의 정규군이 아니고 오히려 지방의 유력가들이 소집한 의용병인 ‘향용(鄕勇)’이었다.결국 청조는 반란 진압에 막대한 전비(戰費)와 10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하고 심각한 재정 위기가 초래되었다.




아편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보려면 17세기~18세기의 영국 상황을 보자




인도네시아의 향신료 패권을 두고 네덜란드에 경쟁했지만 패배한 영국동인도 회사는 어쩔 수 없이 인도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757년 프랑스 동인도 회사와의 인도에서 패권을 두고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하고 뱅골 지방을 얻으면서 언제든지 중국이나 인도차이나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영국은 그곳에 면직물을 수입하는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는데 백년전쟁부터 이미 수백 년 동안 영국의 주요 산업이었던 모직물 산업이 큰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영국은 산업혁명이라는 자구책으로 돌파해 가며 '해 가지지 않는 나라'를 향한 사회, 경제적 개혁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인도 진출에 성공한 영국의 다음 목표는 동시대에 최전성기를 맞은 청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통상을 확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지 3세는 1792년 동인도 회사를 통해 광동성 총독에게 서신을 보내 사절단의 방문 의사를 밝혔고 건륭제는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하여 사절단을 보낸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여 그들을 태운 선단인 북경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천진에 정박할 수 있도록 정박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당시 서양 상인들은 광동성 연안의 항로 이외에는 항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천진으로의 입항을 허가한 이 조치는 황제가 영국의 방문을 얼마나 기뻐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1792년에 조지 메카트니를 정사로 하는 사절단이. 
포츠머스에서 출항한 지 10개월 만인 1793년 7월 천진을 통하여 북경에 도착하였습니다 사절단의 규모는. 
과학자 수학자 의사 선교사 예술가 상인 등 수행원 약 80여 명과 항해를 책임지는 수병 약 95명 정도였고 증기기관 방적기 대포 시계 지구본 계측기 서적 모직물 등 최첨단 제품들이 건륭제의 선물로 준비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청은 영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영국이 스스로 신하를 자처하고 조공을 바치러 오는 것으로 생각할 뿐 그들은 자신들에게 통상을 요구하러 온  목적은 전혀 알지 못하였죠 청 조정에서는 흠차 대신 증서가 그들을 맞이하였는데. 
그는 메카트니에게 황제 배알시 해야 할 예의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이미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던 해상강국 영국은 그런 의뢰를 받아들일 수 없었죠 건륭제는 그 소식을 듣고 기분이 상했지만 사절단이 도착한 상황에서 그들을 돌려보낼 경우 황제의 도량이 좁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을 우려하여 의전과 관련한 을 지시하였고. 
결국 사절단이 권룡제에게 영국 국왕을 배알할때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살짝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합의되었습니다. 
드디어 건륭. 58년인 1793년 8월 13일 건륭제의 83번째 생일에 사절단은 마침내 피서산장 만수원에서 건륭제를 마련하였습니다. 
메카트니는 건륭제에게 조지 3세의 친서를 전하고 가지고 온 예물을 바쳤으며 건륭제는 정교하게 조각한 사문석으로 담리하였죠 친서를 펼치고 있는 자가 메카트니인데 그의 자신감 있는 눈빛과 옆에 있는 사신들의 표정이 사뭇 표독스럽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중국을 관찰한 사절단이 귀국 후 조지 3세 중국의 실상을 보고하였습니다 황제와 메카트니의 그림을 한 장 더 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이 그림 역시 조지 메카트니와 건륭제의 미팅을 그린 그림으로 사절단의 공식 화가 윌리엄 알렉산그림입니다. 메카트니 오른쪽에 보이는 소년이 황제 아련 시 중국 말을 하여 건륭제를 놀라게 했다는 8살의 조지 토마스 스턴턴이며 그는 훗날 영국 최초의 중국 전문가가 되죠. 
참고로 스턴터는 10개월간의 항해 기간 동안 중국어를 배웠다.
메카트니는 연애가 끝난 후 관리들에게 국교를 맺고자 하는 방문 목적을 이야기하였으나 건륭제는 총회하는 신나 화신을 통하여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하지만 맥카트니는 국교를 맺지 못하더라도 통상 조약은가능하다고 생각하여 6가지 요구를 하였는데 그 6개 조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영파 주산 천진 등에서 교역하게 해줄 것 러시아처럼 북경에 양관을 설치해 줄 것 주산 부근의 섬 한 곳을 영국 상인의 거주 또는 화물 보관소로 이용하게 해줄 것 광주 부근의 일부를 영국인에게 할양하여 영국인의 자유 왕래를 보장할 것 오문에서 광주로 가는 영국 화물은 면세 또는특별히 고려하여 오무의 양행을 설치하고 너희들에게 윤택한 생활을 누리게 한 것이다 지금 너희들의 요구는 천조의 법도에 어긋나기 때문에 절대로 윤호할 수 없다. 
결국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지 못한 같은 이는 이듬해 3월 영국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사이에 청나라의 정치 경제 군사 등의 사정을 낱낱이 기록해 두었다. 
특히 군산은 아직도 창칼을 휘두를 뿐만 아니라 화승총 대포 등의 무기도 날고 조작할 뿐이며 특히 백성 모두가 예를 중시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문명대국인 줄만 알았던 청나라가 사실은 사기와 거짓말이 난무하고 사는 모습도 초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메카트니는 귀국하여 조지 3세에게 이런 청나라의 허상을 정확히 보고하였고 혼날 메카트니는 청나라를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유능하고 방심하지 않는 항해사가 키를 잡으면 무사히 항의할 수 있지만 무능한 자가 키를잡으면 서서히 필요하다. 해안에 부디 산산조각나는 낡은 거대한 전함과 같다 중국의 황제가 누구냐에 따라 오른 길을 갈 수도 또는 그릇된 길을 가다 난파할 수도 있음을 뜻하는 말이다. 
아울러 이 시기부터 영 영국 정부는 동방의 대국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언젠가는 식민지로 개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됩니다 실제로 메카트니의 방문. 
약 반세기 후인 도강 20년에 영국과 청나라의 제일 1차 아편 전쟁이 발발한 것을 감안한다면 아편 전쟁의 원인은 이때부터 배태되었다고 볼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는 아편 전쟁의 제1차적인 원인을 건룡제와 베카틴의 만남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그 여파로 하여 중국과 가장 친했던 조선 또한 동시에 망국의 길을 걷게 되었다. 
건륭제는 외형적으로는 막강한 국력을 가지고 영토를 넓히며 태평성세를 이어준 황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을 중시하지 않고 보수적인 육아 사상에 젖어 쇄국을 하며 중국을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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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일상 | 1화 21-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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