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성현(晟鉉)님의 서재

단편 원고


[단편 원고] [느와르] 아이리스

아이리스(가제) : 붓꽃 문신을 한 여인

성현(晟鉉) 지음

 

프롤로그

카라카스의 무희

 

잠에서 깬 레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썬팅한 유리창 사이로 햇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멀거니 바라보던 그녀는 몸을 뒤척였다. 해가 뜬 시각에 눈을 뜨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듣기 싫은 잔소리를 피하려는 듯, 새어 들어오는 햇살로부터 등을 돌린 그녀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비어있는 보드카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저걸 다 마셨나.”

 

자리에서 일어난 레나가 얇은 이불을 팽개치자 젊은 여성의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굴곡 잡힌 몸매는 유명 패션지의 모델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섹시하고 맵시 있었고, 오른쪽 날갯죽지에 그려진 붓꽃 문신은 신비로운 매력을 더했다.

 

우기가 찾아오는 5월의 카라카스는 덥고 습했다. 천장에는 낡은 실링팬이 삐거덕거리며 돌고 있었고 아마 그만큼 나이를 먹었으리라 예상되는 낡아빠진 에어컨은 뜨거운 공기를 토해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레나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올리며 단발머리를 쓸어 올리며 침대를 벗어났다. 소음이 시끄러운 편이었지만 그나마 멀쩡하게 돌아가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병을 꺼내 목을 축이던 그녀는 문득 탁자 위에 놓여있는 짧은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반쯤 취해서 제멋대로 휘갈긴 글씨였지만 틀림없는 자신의 글씨였다.

 

『일거리: 앤드류에게 연락할 것.

 

서부 카라카스의 슬럼가 출신 주제에 로또라도 맞은 건지 동부 지역에 둥지를 튼 젊은 메스티소 앤드류 마커스. 레나는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고 핸드폰을 샤워실 선반에 올려놓았다. 성실한 메스티소 청년은 늘 두 번의 송신음이 울린 뒤에 전화를 받았다.

 

「좋은 아침! 레나!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차가운 물이 이마를 타고 흘렀고, 레나의 목소리 역시 그에 비견될 만큼 냉막하기 그지없었다.

 

빌어먹을 아침. 메스티소 껄렁이.”

 

「어라? 목소리 완전히 가셨네. 또 밤새 술펐죠? 식사는 하셨어요?

 

앤드류의 활력 넘치는 아침 인사에 레나는 전화를 건 용건도 잊고 선선히 대답했다.

 

아직.”

 

「그럼 리코로 넘어와요. 아침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하죠.

 

리코? 나트 블룸이 아니라? 살아있는 표적지 사이에서 아침을 보내면 점심은 지옥에서 먹게 될 걸.”

 

쏟아지는 차가운 물은 레나의 목덜미를 타고 흐르며 전신을 냉기로 휘감았다. 얼어붙는 기분은 마치 뇌를 꺼내다가 세척하는 것 같았기에 그녀는 앤드류의 이야기 몇 마디를 놓치고 말았다.

 

「ㅡ 갱들은 이번 사건 때문에 정신줄 놓고 있어서 우리한테 관심도 없어요. 아직 못 봤어요? 매스컴 제대로 탔는데?

 

내 방 TV9mm 파라블럼 탄이랑 진하게 키스하고 요단강 건넌지 오래야.”

 

「그럼 더더욱 리코에서 만날 필요가 있겠네요. 30분 후에 만나죠.

 

젊은 메스티소의 능청스러운 대답을 끝으로 레나의 집에는 또 다시 고요함이 찾아왔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실링팬의 낡은 회전음과 냉장고의 소음을 듣게 된 그녀는 샤워실 바닥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잠에서 깨면 차가운 물로 온몸을 적시는 짧은 시간. 오직 이 순간만이 그녀에게 안식을 주는 것이었다.

 

하루가 시작 되었다. 내일 아침까지 이어질 또 다른 하루가 찾아온 것이었다.

 

 

평일의 사바나 그란데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주말이 되면 인생의 아름다움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들이 수많은 관광객들과 카라카스 시민들의 발을 붙들고 여흥의 한때를 보내는 축제의 장이지만 노동의 시간이 찾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하고 조용한 거리로 바뀌는 곳이었다.

 

그곳에 리코가 있었다.

 

노란 색 간판과 통유리로 장식된 작은 음식점. 깔끔하고 아담한 느낌 때문에 앤드류가 자주 찾는 가게이기도 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간 레나는 가게 한구석에 앉아 늘 그렇듯 아레파를 우물거리고 있는 앤드류를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와요. 레나.”

 

주문부터.”

 

앤드류에게 눈인사를 건넨 레나는 가게를 가로질러 조금의 고민도 없이 산꼬초를 주문하며 엄청 맵게 해달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 거리에서 매운 산꼬초를 즐기는 사람은 흔치 않았기 때문에 점원은 레나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미인이라기에는 썩 빼어난 외모는 아니지만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눈동자가 매력적인 레나는 집을 나설 때면 늘 검은색 핫팬츠와 흰 셔츠를 입고 약간 품이 넓은 가죽 재킷을 즐겨 입었다. 품이 넓다는 뜻은 안에 뭔가를 숨겼다는 말이 될 테니 점원은 늘 레나의 정체를 궁금해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레나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주문을 마친 그녀가 앤드류에게 돌아왔을 때, 그는 가지고 있던 신문을 레나에게 건넸다.

 

“3면 헤드라인이요. 그 사건 때문에 아침부터 동부가 시끌벅적 하거든요. TV에서도 난리네요.”

 

폭발 사고?”

 

신문 3면에는 화재 사고가 난 이후의 검게 그을린 현장 사진을 중심으로 폭발, 주점, 대학생 희생자, 13명 사망 등등 자극적인 낱말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만 레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신문을 탁자에 던졌다.

 

이 나라 사람들이 대통령 모가지 따는 것말고 관심 있는 사건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세 블록 안에 살인나지 않은 거리를 찾는 게 힘든 동네야. 폭발 사고가 뭐 대수라고.”

 

대수가 아니니까 저런 사건이 뉴스에 걸린 거겠죠?”

 

그게 무슨 말이야?”

 

이번 사건에 마두로 대통령의 측근이 개입되어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들리는 말로는 희생자 가운데 정부 측 고위 관료의 자제가 섞여있다는 말도 있고요. 그리고 사고가 발생한 알타미라 인근은 반정부 데모가 몇 차례나 벌어지기도 한 지역이기도하죠.”

 

고위 관료의 자제가 희생자에 섞여있다는 말은 아무래도 신빙성이 떨어지는데.”

 

왜요?”

 

정말로 고위 관료의 자제가 희생자에 포함되어 있다면 너도 알만한 뜨내기 정보가 밑바닥에 나돌 수 있을까? 사실이라면 은폐하려고 할 게 분명하고, 거짓이라면 그런 위험한 이야기가 함부로 굴러다니지 않겠지.”

 

확실히 그렇긴 하죠.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이야기가 나돌고 있어요. 누군가가 물을 흐리고 있다는 이야기겠죠.”

 

그게 누군데?”

 

앤드류는 말미에 목소리를 낮추며 몇 마디를 덧붙였다.

 

에스판토소의 보스 하비에르가 유력해요.”

 

마약광 하비에르?”

 

그건 확실해요. 자세한건 나트 블룸의 마스터에게 물어보세요.”

 

두 사람의 은밀한 대화는 점원이 날라온 산꼬초 때문에 잠시 지체되었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국물요리에는 감자와 옥수수, 돼지고기가 조화롭게 익혀져있었다. 레나는 국물을 떠먹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되뇌었다.

 

알타미라에서 폭발 사고. 희생자 가운데 정부 고관의 자제가 섞여있음. 그런데 사건에 동부의 마약광이 발을 넣고 있다고? 다트 던져서 나오는 단어들끼리 끼워 맞추기라도 한거야? 이해 안가는 것들 투성이네. 그런데 일거리라고 했잖아? 누구 의뢰지?”

 

신원 불명이지만 나트 블룸의 보증이 있어요.”

 

보수는?”

 

“5. 미국 달러.”

 

레나는 눈초리를 씰룩거렸다.

 

호오. 내일이 없는 것들이 잔뜩 달려들겠는데. 의뢰 내용은?”

 

사건의 진범을 찾을 것.”

 

진범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저건 사고 아니었어?”

 

거기까지는 나도 몰라요. 매스컴에 보도된 내용은 술집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지만, 아무래도 저 같은 뜨내기 정보상은 못 만지는 진짜가 숨겨져있는 것 같아요. 자세한건 나트 블룸에서 확인하세요.”

 

이야기를 끝으로 앤드류는 신문을 그녀에게 건네주고 리코를 떠났다. 딸랑. 딸랑. 여닫이문이 닫히며 방울 소리가 나는 중에도 레나는 신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산꼬초를 음미하면서 다시 3면을 펼친 그녀는 기사 중간 중간에 누군가가 펜으로 체크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대쉬(-)를 포함한 12자리의 숫자 암호. 나트 블룸의 금고 이용번호였다.

 

TV 뉴스에서 보도하는 메르세데스 지구의 주점 화재 사고 방송을 바라보던 레나는 그릇을 비우고 리코를 빠져나와 주차해둔 레플리카 바이크의 시동을 걸었다. 종마의 울음 같은 엔진이 울리는 것을 느끼며 발을 챈 그녀는 곧 동부와 서부의 경계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나트 블룸(Nacht Blume).

 

범죄의 도시 카라카스의 동부와 서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지역에 그곳이 있었다. 검은 꽃이라 불리는 술집에는 남미의 프리 킬러와 해결사들이 죄다 몰리는 우범 지역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에 슬럼가의 강도들이나 갱들도 함부로 규율을 어기고 난장을 벌이다간 벌집이 되는 곳이었다.

 

묵직한 돈다발, 화끈한 독주, 극락에 보내주는 코카인, 육감적인 여인의 나체. 내일이 없는 자들이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한 그곳에 도착한 레나는 먼 거리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에게 가죽 재킷 안쪽에 차고 다니는 두 자루의 쿠크리 나이프를 건네줬다.

 

총은?”

 

없어. 비번이거든.”

 

나트 블룸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가드에게 무기를 보여주고 안에서 되찾는 것이 원칙이었다. 양손을 펴 보이며 무장 해제를 어필하던 레나는 문득 가드의 눈길이 자신의 허리로 내려가는 것을 보며 눈초리를 치켜 올렸다. 그리고 가드의 벨트를 붙잡았다.

 

뭐야?”

 

감상 끝났냐?”

 

빠각!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나는 가드의 벨트를 잡아당기면서 구둣발을 들어 무릎을 내리 찍었다. “아아악!” 남자가 토해내는 단말마의 비명을 소스로 다리를 걸어 중심을 무너뜨린 그녀는 그대로 가드의 낭심을 밟으며 발목에서 글록 26을 꺼내 남자의 입에 쑤셔 박았다. 이가 몇 개는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레나가 낮은 목소리를 흘렸다.

 

물었잖아? 감상 끝났냐고. 변태 자식아.”

 

레나! 적당히 해.”

 

뒤에서 들려오는 느긋한 목소리는 귀에 익은 것이었다. 남자의 입에서 총을 뽑아낸 레나는 총구를 흔들어 보이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맥시 보이넘. 요새 가드 충원한다더니 심사는 개판으로 보는 모양이지? 다음부터는 계약서에 손님 엉덩이 흘끔거리면 자지를 뜯어버릴 거라는 항목을 넣어.”

 

어어. 명심하지. 초짜니까 좀 봐줘.”

 

레나에게 밟혀있던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고 단번에 그를 일으켜 세운 맥시는 가드에게 쿠크리 나이프를 받아들고 레나에게도 손짓을 했다.

 

그래도 무기를 제때 내주지 않은 건 문제가 되지.”

 

발정난 씹새에게서 나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였다고. 주려고 했었어.”

 

그녀의 글록 권총을 받은 맥시는 허리춤에 걸려있던 싸구려 가죽 주머니에 레나의 총과 칼을 집어넣고 지하로 내려가는 개구멍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예의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으음. 그럼.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지만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라구. 레나 프레스톨.”

 

맥시 보이넘에게 손 인사를 보낸 레나는 홀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디퓨저의 진한 향기를 맡으며 나트 블룸에 들어섰다.


댓글 0

  • 댓글이 없습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글목록
번호 제목 작성일
» 단편 원고 | [느와르] 아이리스 17-10-16

비밀번호 입력
@genre @title
> @subjec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