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고철거인 님의 서재입니다.

히로익멘션 : 이즈의 모험가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고철거인
그림/삽화
가락송이
작품등록일 :
2022.05.12 17:09
최근연재일 :
2022.09.19 21:17
연재수 :
55 회
조회수 :
4,575
추천수 :
453
글자수 :
321,744

작성
22.08.20 20:06
조회
58
추천
2
글자
21쪽

#9. 버려진 요새 (4)

DUMMY

마법! 강력한 마법의 힘이 요동쳤다.


도망치는 마법사를 뒤쫓던 크로커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위기감을 느꼈다. 파르디잔의 어깨 너머에서 무려 세 명의 숙련된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완성될 주문의 파괴력을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크로커스는 아주 잠깐의 시간동안 무엇을 해야 좋을지 끊임없이 망설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지 못하게 방해해야 할까? 아니면 주변에 있는 기둥 뒤로 숨어 다시는 잡기 힘들 기회를 노려야 할까? 양쪽 모두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멈추지 마, 계속 따라 붙어!" 등 뒤에서 제미니가 소리쳤다. 동료의 자신만만한 외침을 들은 크로커스는 반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는 마법에 대한 두려움도 잊은 채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지하대로 안으로 퍼져나간 바로 뒤, 부자연스런 침묵이 내려 앉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마법사들은 어항 속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읊조리던 마법의 주문은 힘을 잃고 정적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크로커스는 제미니의 때맞춘 도움이 만들어낸 결과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계속 달렸다. 마침 그림자 속에서 빠져나온 가베라도 다른 쪽에서 마법사들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법사들을 두 사람이 협공하는 절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마법사들 중 하나가 이를 악물더니 허리띠에 꽂혀있던 여러 개의 두루마리 중 하나를 꺼내 재빨리 펼쳤다. 안에 적힌 내용을 눈으로 빠르게 훑어낸 조나스가 몇 가지 기이한 동작을 취하자 두루마리에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두루마리의 정체를 알아 본 제미니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것은 마법의 두루마리였으며 안에 담겨 있는 마법을 사용하게 해주는 마법의 도구였다. 마법의 빛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두루마리는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빠르게 타들어갔다.


두루마리 전체가 먼지로 변하는데 까지 걸린 시간은 그야말로 찰나에 가까웠고 타다 남은 작은 부스러기만이 바닥에 떨어졌다. 두루마리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 담겨있던 마법은 효과를 발휘했다. 소리가 돌아왔다.


"악! 저들 중에도 마법사가 있어요!" 돕스의 마법사들 중 가장 경험이 부족한 아이크가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크! 그럴 시간에 주문이나 빨리 외워요!" 데산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두루마리에 담겨 있던 마법 해제의 주문은 제미니가 건 침묵 주문의 효과를 없애 버렸지만 마법사들이 준비해 두었던 각종 보호 주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지금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크로커스가 위급한 상황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파르디잔을 향해 달렸던 것과는 달리 가베라는 조나스를 목표로 삼았다. 제미니의 주문에 걸린 직후 그가 보여주었던 과감하고 빠른 결단력이 가장 큰 위험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돕스의 마법사들 중 이 자리에 없는 우블케 다음으로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였다.


가베라가 단도로 조나스의 급소를 찌르기 직전 새로운 주문이 완성되었다. 그의 단도는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파르디잔 역시 아슬아슬하게 방어를 위한 주문을 완성시켰다. 크로커스가 힘껏 내리친 장검을 마법사는 양팔을 들어 막아내었다. 그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경악스럽게도 피부엔 작은 생채기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곱게 죽진 못할 거다, 빌어먹을 하얀 머리! 절대로!"


고통과 증오로 저주를 퍼붓는 파르디잔의 표정은 마법의 영향으로 인해 더욱 기괴하고 험상궂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피부는 두껍고 딱딱하며 주름 잡힌 무언가로 변해 있었다. 마치 사람처럼 생기고 말까지 하는 나무 괴물을 보는 것만 같았다. 크로커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흠칫거리며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어느새 달려온 제미니가 약간 떨어진 곳에서 주문을 외웠다. 그는 평소처럼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빠르게 주문을 완성시켰다. 마법이 효력을 발휘하려던 그 순간 두 개의 빛 덩어리가 날아와 제미니의 마법과 부딪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른 마법에 영향을 받아 상쇄되어버린 것이다.


제미니가 자신을 방해한 마법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두 명의 마법사가 잇달아 새로운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데산나는 다른 곳에 있는 생명체를 불러내는 소환 주문을, 아이크는 정신에 영향을 주는 환영 계통의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제미니는 이를 갈며 서둘러 의식을 마법의 원천에 연결시켰다.


주문을 모두 외운 데산나가 동물 모양의 작은 나무 인형 세 개를 주머니에서 꺼내더니 허공을 향해 흩뿌렸다. 마법의 힘이 깃든 동물 인형들은 점점 크기를 불려나가더니 여러 마리의 회색곰(Grizzly)으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나무 인형을 매개체로 삼아 흉포한 맹수들을 불러낸 것이다. 소환 주문으로 인해 마법사에게 지배를 받게 된 회색곰들은 크로커스와 그의 동료들을 향해 강한 적개심을 느꼈다. 분노한 맹수들이 사납게 울부짖으며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크의 주문은 일행을 무시무시한 환영 속에 빠뜨렸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생명체가 사방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었던 크로커스와 가베라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커다란 회색곰 여러 마리가 바닥을 쿵쿵 울리며 다가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파르디잔과 조나스가 혼란에 빠진 두 사람을 향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들을 즉사시킬 수도 있는 치명적인 주문이었다.


"흥, 아까는 날 잘도 방해 했겠다? 계속 멋대로 설치게 놔둘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제미니가 말했다.


그는 아이크의 환영 마법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징그럽게 생긴 벌레를 닮은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기어오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허상을 뚜렷하게 골라내었다. 마법사로서의 실력은 제미니가 훨씬 위였다.


두 가지 주문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완성되었다.


첫 번째 주문이 먼저 데산나가 소환한 회색곰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가베라를 향해 앞발을 치켜들었던 회색곰의 바로 코앞에서 마법의 빛이 번쩍이더니 곰들이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조금 전과는 반대로 곰들의 몹집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고 조금 더 지나자 동물 모양의 인형만이 땅바닥 위를 굴러다녔다. 소환 해제의 주문이 동물들을 원래 살고 있던 곳으로 돌려보냈다.


두 번째 주문은 동료들을 위한 것이었다. 무척 고운 금빛의 가루가 제미니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였다. 제미니는 마법의 가루를 향해 입으로 살짝 바람을 불었다. 어둠 속에서 춤을 추던 금빛 광채는 두 갈래로 나뉘어 각각 크로커스와 가베라의 눈꺼풀 사이로 스며들었다.


굵은 먼지 알갱이가 눈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두 사람은 눈을 쉴 새 없이 깜짝거려 댔지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눈 주변이 화끈거리나 싶더니 시야가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아이크가 만들어낸 환상 또한 사라졌다. 효력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그 어떤 환상도 그들을 현혹시킬 수 없게 만들어주는 주문이었다.


환영 마법의 영향에서 벗어난 크로커스와 가베라는 서둘러 옆으로 몸을 날렸다. 파르디잔과 조나스, 두 마법사가 완성시킨 회심의 주문은 허무하게도 허공을 가르고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중 주문? 그건 불가능해!" 데산나가 경악해 소리쳤다.


그녀는 전혀 다른 두 개의 마법 주문을 동시에 성공시킬 수 있을 정도의 마법사가 이즈에 있다는 소문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스승인 켈보림 마저도 완벽히 통제 한다 장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가까웠다. 두 종류의 주문을 동시에 외우다 마법이 실패하는 건 예사였으며 자칫 잘못하면 이질적인 마법의 힘이 섞여서 크나큰 참사가 벌어질 위험성도 있었다.


"불가능하다고 누가 그래?" 두 종류의 마법을 연달아 파훼시킨 제미니가 어깨를 뻐기며 으스대었다.


하지만 그 역시 실제 두 개의 주문을 동시에 외운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속임수로 두 개의 주문이 동시에 완성된 것처럼 보였을 뿐, 실상은 타고난 재능을 발휘 해 주문이 완료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극단적으로 짧게 줄였던 것에 불과했다. 자신을 방해한 것에 대한 치기어린 앙갚음이었으나 상대의 경계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데산나와 아이크는 암묵적으로 같은 의견을 내렸다. 두 마법사는 다른 추격자들은 무시하고 오로지 제미니에게만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데산나와 아이크가 제미니를 목표로 주문을 외웠다. 곧바로 대응에 들어간 제미니는 그 와중에도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이봐! 다들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야?"


제미니와 돕스의 두 마법사는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며 상대방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결판은 쉽사리 날 것 같지가 않았다.


다른 쪽에선 조금 비슷하면서도 다른 양상으로 싸움이 전개가 되었다. 크로커스와 가베라는 마법사와의 거리가 벌어지지 않도록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반대로 파르디잔과 조나스는 강력한 주문을 외울 시간을 벌기 위해 두 사람을 떼어 내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두 사람의 무기로는 보호 마법을 뚫을 수 없었으나 마법사들이 가끔씩 뿜어내는 마법들도 위력이 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단도 하나가 허공에서 가로 막히는 순간 다른 방향에서 또 하나의 단도가 번개처럼 찔러 들어왔다. 마법으로 만든 투명한 갑옷이 점점 약해지고 있단 걸 느낀 조나스는 새로운 마법의 갑옷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비록 기초적인 보호 마법이었지만 벌써 세 번째였다. 그는 조바심을 버리고 방어를 굳건히 하기로 마음먹었다.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두 자루의 단도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는 적당한 때를 기다리면서 조용히 힘을 모았다.


반면 파르디잔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마구잡이로 마법을 난사 해대고 있었다. 완성 시간이 짧은 기초 마법은 위력이 약해 상대가 막아내거나 피하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강한 주문을 외우려 하면 하얀 머리가 여지없이 장검을 휘둘러 방해를 해왔다.


공격을 막아내느라 로브의 소매는 너덜너덜하게 변해 버린 지 오래였고 단단하게 바뀐 피부도 조금씩 깎여 나갔다. 더구나 그 고통! 창칼을 막아내는 마법도 고통을 없애주지는 않았다. 새로운 주문을 외우려는 사이 하얀 머리가 휘두른 장검이 결국 로브의 옆구리에 구멍을 뚫었다. 그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입을 악다문 파르디잔의 눈빛이 심상찮게 번들거렸다. 그는 온전한 주문을 외우는 대신 일부러 불안정한 마법의 힘을 잔뜩 모아 단번에 터뜨려 버렸다. 강력한 힘이 크로커스를 뒤로 날려 버렸다. 크로커스만이 아니었다. 피아를 가리지 않는 난폭한 힘이 모두를 덮쳤다.


다른 마법사들이 준비 중이던 마법까지도 영향을 받고 엉뚱한 곳으로 튀어 나갔다. 그 중 하나가 지하대로의 기둥에 숨겨져 있던 함정을 건드리고 말았다.


그들 모두 바닥에 내팽개쳐진 충격으로 꼼짝 못하고 있을 때 우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굉장히 불길한 그 소음으로 인해 모두들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지하대로 전체가 거세게 흔들렸다. 요새의 석문이 열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진동이었다. 먼저 기둥 중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진동은 더욱 심해졌고 무게를 받치던 기둥이 사라지자 천장에 금이 가며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렸다. 지형이 불안해지면서 또 다른 기둥이 무너졌다. 그리고 더욱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떨어졌다.


"피해!" 크로커스가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천장에서 떨어지는 바위만이 위협거리는 아니었다. 부러져나간 기둥들이 주변 곳곳에서 그들을 덮쳤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바닥마저 갈라져 버렸다. 어디에도 피할 구석은 없어 보였다.


가장 운이 없었던 건 아이크였다. 커다란 바위 덩어리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고 어느 누구도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조나스는 떨어지는 바위를 피해 달아나던 중 무너지는 기둥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마법 주문을 외워 기둥이 무너지는 속도를 지연시켰다. 물질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마법이 그의 특기 분야인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을 뿐 그는 여전히 위험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그는 도움을 구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던 중 파르디잔과 눈이 마주쳤다. "파르디잔! 나 좀 도와주게!" 조나스가 간절히 외쳤다.


조나스를 냉랭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파르디잔은 그대로 등을 돌리더니 안전한 장소로 달아나 버렸다.


분노한 조나스가 저주를 퍼부었지만 지하대로가 무너지는 소음 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가 마지막 순간 보았던 것은 바로 파르디잔의 싸늘하게 뒤틀린 입매와 비웃음에 가득 찬 눈동자였다.




※※※※※※※※※




돕스의 마법사들 중 지하대로를 무사히 빠져나온 건 데산나와 파르디잔 뿐이었다. 안전한 곳에서 숨을 돌리던 그녀는 파르디잔에게 다른 이들의 행방을 물어 보았다.


"아이크와 조나스는 어디에 있죠? 어떻게 된 거에요?"


"글쎄, 난 모르겠는걸." 파르디잔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을 본 데산나는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당신, 설마······."


데산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자 파르디잔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난 말 그대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저 조나스가 운이 없었던 것뿐이지. 그 자를 구하겠다고 나까지 죽을 수는 없잖아. 아이크는 보질 못해서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데산나는 그가 시치미를 떼는 거라 생각했다.


"미친 건가요? 적들이 코앞에 있는 마당에 같은 편을 돕지는 못할망정 죽게 만든다는 게 제정신으로 할 짓이에요?" 데산나가 날카로운 어조로 추궁했다.


"이봐, 진정하라고. 우리가 무사히 빠져나온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어. 얼음공작의 사냥개들은 전부 바위에 깔려 죽었을 거야." 파르디잔이 낙천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달라질 게 있나? 설마 우리가 맺은 계약을 잊은 건 아니겠지?"


"계약이라고요? 고작 그런 걸로······."


"이게 다 무슨 난리지? 계약은 또 뭐고? "


데산나와 파르디잔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얼굴을 찡그린 우블케가 통로 안쪽에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우블케,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에요? 이즈의 추격자들이 여기까지 쫓아 왔단 말이에요!" 데산나는 슬쩍 화제를 돌리기 위해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는 지하대로에서 있었던 일들을 우블케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그래서 조나스와 아이크가 죽었다고? 일이 아주 고약하게 돌아가는군." 상황을 파악한 우블케는 혀를 차며 투덜거렸을 뿐,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블케, 이제 어쩔 거요? 스승님께서 말한 유물을 찾기는 한 거요?" 파르디잔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평소였다면 대답을 하지 않거나 적당히 얼버무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고생 끝에 유물을 찾아내어 마음이 들뜬 데다 이즈의 추격자들을 상대할 생각으로 정신이 팔려 있던 우블케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검은 수정을 꺼내며 우쭐거렸다.


"그래, 너희들이 아무 쓸모도 없이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찾아 내었지. 바로 내가!"


"그거 참 다행이로군." 파르디잔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하며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았다. 그의 눈빛은 지하대로에서 마법을 폭주시킬 때와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우블케가 이상한 낌새를 차리기도 전에 파르디잔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단검이 우블케의 로브를 뚫고 살 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데산나는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단검에 찔린 상처로부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큰 충격을 받은 듯 두 눈을 크게 뜬 우블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파르디잔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달리 신뢰나 친근감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남몰래 음모를 꾸미고 모함해서 끌어내리는 게 바로 그들의 방식이었다. 이렇게 야만적인 방법으로 기습을 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증인을 눈앞에 두고서!


"쓸모도 없는 놈에게 당한 기분이 어떻지?" 파르디잔이 우블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는 상처를 부여잡고 비척거리다 땅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파르디잔이 우블케의 손에서 검은 수정을 빼앗았다. 너무 깊고 치명적인 상처가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할 수가 없었다.


"고작 이런 걸 찾으려고 그 고생을 했다니." 한 차례 검은 수정을 살핀 파르디잔이 중얼거렸다. 유물은 약간의 마법적 힘만을 띠고 있었을 뿐 특별함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으려나. 나머지는 스승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파르디잔은 고개를 돌려 데산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갑작스런 상황에 놀라기라도 했는지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예상보다 싱겁게 끝나긴 했다만 난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야. 돕스에 돌아가서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충분한 대가를 받을 수 있을거다." 파르디잔이 만족스럽게 웃어 보였다. 그는 모든 상황이 의도한 대로 되었다고 여겼다.


"그럴지도 모르죠." 데산나가 말했다.


"그런데 어쩌죠, 파르디잔?" 그녀의 얼굴에는 난처하다는 기색이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난 당신의 계획을 돕겠다고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뭐?" 파르디잔이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데산나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자 우블케와 파르디잔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불타는 검은 태양을 쥐고 있는 뼈로 된 손. 그들도 잘 알고 있는 어느 신의 상징이 새겨진 부적이었다.


그녀가 짧은 주문을 읊자 부적에서 그림자보다도 더욱 짙은 검은 빛이 뿜어져 나와 주변의 모든 빛을 빨아 들였다. 점차 크기를 불려 나간 검은 빛은 불가사의하게도 안개처럼 굼실대더니 곧 커다란 손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 손이 파르디잔을 움켜쥐었다.


허공으로 들어 올려진 파르디잔은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격이 다른 검은 손의 힘에 비하면 그가 다루는 마법은 애들 장난처럼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짓눌린 나머지 벌벌 떨기만 했다.


검은 손이 그의 숨통을 조이고 있었다.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파르디잔의 입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고개가 모로 꺾인 그의 눈에서 빛이 빠르게 꺼져가고 있었다.


데산나가 부적을 회수하자 검은 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온몸의 뼈가 바스러진 마법사의 시체는 맥없이 쓰러졌다.


"사, 살려줘." 우블케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했다.


데산나는 바닥에 떨어진 검은 수정을 주워들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난 당신을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고마워, 데산나.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할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우블케는 고통을 무릅쓰고 데산나를 향해 굽실거렸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기대는 배신당했다.


"그 대신이라고나 할까요? 내가 이 요새를 빠져나가는 동안 이즈의 추격자들을 막아줘야 겠어요. 당신 정도의 실력이라면 할 수 있겠죠?" 데산나가 살포시 웃었다. 그동안 자주 접해왔던 그 미소였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푸른 빛 덩어리가 떠올라 우블케의 주변을 환히 밝혔다. 어두컴컴한 지하 속에선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눈에 띌 만큼 크고 밝은 빛이었다.


"당신 덕분에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렸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우블케."


마지막 인사를 건넨 데산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통로 너머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안 돼!" 우블케가 비명을 질렀다. 분노와 공포, 절망······. 여러가지 감정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는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발작을 일으켰지만 데산나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홀로 남겨지고 말았다. 드워프의 손길이 닿았던 지하 동굴은 텅 비어있었고 흐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바람은 약간의 돌가루만을 실어 날랐다. 잘 다듬어진 돌의 매끄러운 감촉과 깨진 돌의 거칠고 뾰족한 느낌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우블케는 버려졌다.




이 글이 누군가의 취향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작가의말

분량이 애매해서 두 편으로 나눌까 하다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도 했고 그냥 한 편으로 올립니다.

즐겁게 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 작성자
    Lv.44 뾰족이언니
    작성일
    22.08.20 22:37
    No. 1

    불타는 검은 태양을 쥐고 있는 뼈로 된 손←인상깊게 읽었습니다. ^^)>
    '마법 주문진 외우는 부분을 넣으면 더 흥미로울 것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작가님^^)감사히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ㅊ.ㅊ)!!"굿밤되셔요~^^)>"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3 고철거인
    작성일
    22.08.21 00:57
    No. 2

    뼈손이는 설정상으로는 진작부터 존재하고 있었긴 한데 아직 이름도 못지어준데다
    상징도 그럴듯해 보이는 걸 급하게 집어넣느라 골치가 아팠습니다 ㅎ;;;;;
    결국 어디선가 봤을 법한 것들을 이것저것 섞은 듯한 모양새가 되었어요 ㅎㅎ;;

    마법 주문은 마지막 부분, 연속 통수씬에서 한 번 넣을까 하다가 그냥 생략해버렸는데요
    아무 뜻도 없는 글자들 그럴싸하게 나열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습니다;;;
    아니면 혹시 다른 부분 말하신 건가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44 뾰족이언니
    작성일
    22.08.21 03:49
    No. 3

    제가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ㅎㅎ그 뼈를 꺼내 들고 부터의 내용인데...뼈가 아니구요... ㅎㅎㅎ
    예를 들자면..."불타는 검은 태양의 신이여~ 불의 힘을 빌려 당신의 전지 전능한 힘으로..."중얼(대충)중얼"...)↩︎'그녀가 주문을 읊자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3 고철거인
    작성일
    22.08.21 13:59
    No. 4

    아 그렇군요 ㅎ;;;; 부끄럽게도 착각을...;;ㅜ
    소설 외적인 설명이긴 하지만 설정 상 그 마법사는 해당 신의 신도나 사제가 아니고
    누군가가 빌려준 물건으로 힘을 발휘한 거라
    능동적으로 신의 힘을 쓰는 게 아닌
    짧은 키워드만 가지고 마법 물품을 사용한 걸로 생각하면서 써봤습니다 ㅎ;;

    뾰족이언니님 덕분에 제가 미처 생각 못했던 부분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매번 친절히 답변 달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54 남해검객
    작성일
    22.08.22 16:33
    No. 5

    우블케! 드워프 창고라도 뒤져라 시원힌 맥주가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3 고철거인
    작성일
    22.08.22 20:45
    No. 6

    안타깝게도 이사갈 때 다 챙겨갔답니다 ㅜ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히로익멘션 : 이즈의 모험가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1부 완, 휴재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22.09.20 45 0 -
공지 연재 주기 관련 +2 22.08.08 37 0 -
공지 첫 후원 감사드립니다 22.08.08 47 0 -
공지 이제야 도입부가 끝났습니다. +2 22.06.14 64 0 -
55 #1부 종장 +6 22.09.19 50 1 10쪽
54 #10. 우블케 (3) +4 22.09.14 44 1 21쪽
53 #10. 우블케 (2) +6 22.09.06 47 1 13쪽
52 #10. 우블케 (1) +8 22.08.27 30 3 11쪽
» #9. 버려진 요새 (4) +6 22.08.20 59 2 21쪽
50 #9. 버려진 요새 (3) +8 22.08.15 37 3 13쪽
49 #9. 버려진 요새 (2) +8 22.08.08 46 4 13쪽
48 #9. 버려진 요새 (1) +6 22.07.29 71 3 14쪽
47 #8. 검은 황야 (4) +8 22.07.25 57 2 20쪽
46 #8. 검은 황야 (3) +6 22.07.22 43 2 13쪽
45 #8. 검은 황야 (2) +6 22.07.19 49 3 11쪽
44 #8. 검은 황야 (1) +4 22.07.18 52 2 10쪽
43 #7. 추적 (6) +10 22.07.15 59 6 16쪽
42 #7. 추적 (5) 22.07.13 49 2 12쪽
41 #7. 추적 (4) +4 22.07.11 42 5 11쪽
40 #7. 추적 (3) 22.07.08 56 3 13쪽
39 #7. 추적 (2) +2 22.07.06 53 5 14쪽
38 #7. 추적 (1) 22.07.01 43 4 10쪽
37 #6. 광산 문제 (6) +2 22.06.29 25 5 20쪽
36 #6. 광산 문제 (5) +2 22.06.28 74 4 12쪽
35 #6. 광산 문제 (4) 22.06.25 46 4 14쪽
34 #6. 광산 문제 (3) +2 22.06.22 43 5 14쪽
33 #6. 광산 문제 (2) 22.06.19 35 3 11쪽
32 #6. 광산 문제 (1) +2 22.06.16 54 3 14쪽
31 #5. 재판 (3) +4 22.06.14 58 3 19쪽
30 #5. 재판 (2) +2 22.06.09 41 3 11쪽
29 #5. 재판 (1) +4 22.06.08 74 3 14쪽
28 #4. 가베라 (5) +2 22.06.05 49 3 16쪽
27 #4. 가베라 (4) +2 22.06.04 45 4 11쪽
26 #4. 가베라 (3) +4 22.06.03 58 5 12쪽
25 #4. 가베라 (2) +4 22.06.02 62 4 16쪽
24 #4. 가베라 (1) +2 22.06.01 54 5 13쪽
23 #3. 오롤로죠 자이츠 (7) +2 22.05.30 64 6 13쪽
22 #3. 오롤로죠 자이츠 (6) +8 22.05.29 65 7 10쪽
21 #3. 오롤로죠 자이츠 (5) +4 22.05.28 76 7 13쪽
20 #3. 오롤로죠 자이츠 (4) +5 22.05.27 49 6 13쪽
19 #3. 오롤로죠 자이츠 (3) +8 22.05.26 101 9 13쪽
18 #3. 오롤로죠 자이츠 (2) +4 22.05.25 73 8 12쪽
17 #3. 오롤로죠 자이츠 (1) +4 22.05.24 90 10 11쪽
16 #2. 제미니 겔드 (9) +7 22.05.23 106 12 15쪽
15 #2. 제미니 겔드 (8) +7 22.05.22 72 11 11쪽
14 #2. 제미니 겔드 (7) +4 22.05.21 76 13 11쪽
13 #2. 제미니 겔드 (6) +10 22.05.20 97 10 15쪽
12 #2. 제미니 겔드 (5) +8 22.05.20 113 12 10쪽
11 #2. 제미니 겔드 (4) +14 22.05.19 111 12 11쪽
10 #2. 제미니 겔드 (3) +10 22.05.19 107 14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