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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거인 님의 서재입니다.

히로익멘션 : 이즈의 모험가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고철거인
그림/삽화
가락송이
작품등록일 :
2022.05.12 17:09
최근연재일 :
2022.09.19 21:17
연재수 :
55 회
조회수 :
4,625
추천수 :
453
글자수 :
321,744

작성
22.07.25 21:47
조회
58
추천
2
글자
20쪽

#8. 검은 황야 (4)

DUMMY

망령들의 손에서 빠져나온 가베라는 동료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단검이 아무리 정확히 급소를 꿰뚫어도 형체가 없는 망령들에겐 조금의 타격도 입히질 못했다. 망령들이 음차원으로 돌아가자 이번엔 야만인들이 그를 찾기 위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하지만 그가 야만인들의 접근을 파악하는데 애를 먹었듯 야만인들 역시 작정하고 몸을 숨긴 가베라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는 나무에서 바위로, 다시 바위에서 나무로 그림자 사이를 옮겨 다니며 야만인들의 눈을 속였다.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야만인들은 수색을 포기해버리는 대신 일행이 타고 왔던 말들을 끌고 돌아가 버렸다.


그제서야 모습을 드러낸 가베라는 싸움 중에 소모한 단검부터 급히 챙기려 했지만 턱없이 모자란 숫자에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야만인들이 가져간 게 말들 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가벼워진 무게만큼이나 허전한 마음을 달래가며 야만인들의 뒤를 쫓았다. 야만인들은 야영지에 도착할 때까지도 추적자가 따라 붙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야만인들의 야영지는 원시적인 형태의 마을에 가까웠다. 작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었고 경비병들이 규칙적으로 순찰을 돌았다. 그들이 눈치 채기 전에 울타리를 뛰어넘은 가베라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천막 속으로 재빨리 들어가 버렸다. 모두 새벽동이 트기 전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




의식을 회복한 크로커스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망령들의 음습한 한기가 몸속에 남아있었는지 아직도 팔과 다리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때마침 비쳐오는 아침녘의 따스한 햇살이 잃었던 활력을 되찾게 도와주었다.


그는 피가 원활히 돌 수 있도록 차갑게 식은 손과 발을 계속해서 주물렀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야 마비된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후끈한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망령들에게 빼앗긴 생명의 증거가 한 방울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고 주위를 둘러본 크로커스는 낯선 환경에 당황하고 말았다. 많은 수의 천막이 원형으로 늘어져 있었고 그보다 더욱 많은 수의 야만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야영지의 중앙, 커다란 검은 기둥이 서있는 공터의 구석진 곳에 두 개의 나무 우리가 놓여져 있었는데 그 중 하나에 제미니가 갇혀 있었다. 물론 나머지 하나는 크로커스의 몫이었다.


크로커스는 나무로 된 창살을 마구 흔들면서 제미니를 불렀다. 짐승을 가둘 때 썼을 것으로 짐작되는 나무 우리는 생각이상으로 튼튼했고 그의 힘으로 부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제미니, 정신 차려!"


원래부터 하얀 편이었던 제미니의 얼굴은 심각해 보일 정도로 해쓱하게 변해 있었다. 크로커스는 그가 잘못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보라 빛으로 질린 입술 사이로 조그만 신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망령들에게 빼앗긴 생명력은 치명적일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평범한 사람, 아니 보통의 마법사였다면 붙잡힌 순간 죽어버렸을 지도 몰랐지만 제미니는 끝까지 버텨내었고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다. 움직이는 시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던 그가 두 팔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로브의 소매 자락에 가려진 가느다란 팔뚝이 부들부들 떨렸다.


"빌어먹을 유령 놈들, 다시는 이쪽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차원의 틈새를 막아버려 주겠어." 제미니가 음차원의 망령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그가 허풍을 떠는 거라 생각한 크로커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꼴을 하고서도 성질부리는 건 여전하네." 크로커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젠장, 내가 못할 거 같아?" 겨우 몸을 뒤집은 제미니는 나무 우리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낯빛은 파리했으나 눈빛만큼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두 놈 다 정신을 차렸군."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두 사람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사슴뿔의 야만인이었다. 처음엔 다른 복장을 하고 있어서 알아보지 못했지만 손에 들린 검은 광석 지팡이를 보고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크로커스가 상상했던 것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고 깡마른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으나 눈에선 적개심이 활활 불타올랐다.


"당신이 이들의 지도자요?" 크로커스가 턱을 치켜들면서 말했다.


그의 경험상 이러한 이들은 보통 예의를 비굴함이라 조롱하고, 오만함을 당당함이라 여기며 폭력을 강자가 가져야할 덕목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측이 맞아떨어졌는지 사슴뿔의 야만인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렇다. 내가 자비로운 심장 부족의 왕이자 신의 자손, 검은 돌을 섬기는 사제 카히스다." 카히스가 지팡이를 살짝 흔들자 검은 광석에서 광채가 흘러 나왔다.


"내 이름은 크로커스 하이랜더요. 저쪽은 동료인 제미니 겔드."


크로커스가 손가락으로 창살 너머를 가리켰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닥쳐라 외지인. 네 놈들의 이름 따위엔 아무런 의미도 없어!"


분노한 제미니가 몸을 떨었다. "자비로운 심장이라고? 그 망할 놈의 심장은 쓸데가 없어서 악마들에게 팔아넘기기라도 했나?" 그가 작은 소리로 비꼬았다.


"우리들은 블랙무어를 지나려던 것 뿐 이었소. 당신들이 싸움을 걸지만 않았어도 피를 볼 일은 없었을 거요."


크로커스가 설득하려 하자 카히스는 지팡이로 나무 우리를 두들기며 화를 내었다. 잔뜩 흥분한 그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초록색 눈동자는 근거 없는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닥치라고 했지! 네놈들은 우리의 땅을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신들을 분노케 했다. 그 죄는 목숨으로 갚아야만 한다."


크로커스는 그의 눈동자가 광신도들과 매우 닮아 있다고 느꼈다.


"목숨으로 갚으라니?" 제미니가 물었다.


"태양이 가장 높이 떴을 때, 네 놈들을 검은 돌에 제물로 바쳐 신들의 분노를 달랠 것이다. 도망친 다른 한 놈도 마찬가지 신세가 될거다." 말을 마친 카히스는 몸을 홱 돌리더니 크고 화려한 천막 안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크로커스가 말했다. "가베라는 아직 무사한 모양이군. 다행이야."


제미니가 물었다. "그가 우릴 구하러 올 거라고 생각해? 정오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그의 목소리는 불안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가베라가 이미 도망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미니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크로커스가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몸을 회복하는데 집중하도록 해. 분명 가베라가 탈출할 기회를 만들어 줄 거야."


크로커스는 가베라를 믿었다. 단지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는 조심스런 눈길로 태양의 기울기를 확인해 보았다. 시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




가베라는 주인이 없는 천막 안에서 쓸 만한 물건들을 찾을 수 있었다. 야만인들이 걸친 것과 같은 동물들의 모피와 하얀 물감이었다. 얼굴에 물감을 바르고 모피를 뒤집어쓰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변장이 되었다. 어느 누구도 그를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그는 야만인 부족의 마을을 슬금슬금 돌아다니며 동료들을 찾아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료들은 물론 빼앗긴 말들과 장비까지도 찾아낼 수 있었다. 창고처럼 보이는 천막의 구석에 크로커스의 장검과 제미니의 지팡이, 배낭이 놓여져 있었고 그 외에도 짐승의 가죽과 마른 장작 따위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가베라는 동료들을 구할 계획을 세우기 위해 눈썹 사이를 좁혔다. 문득 가죽 사이에 쌓여 있는 나무토막들이 그의 눈에 띄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 같았고 그는 곧장 실천에 옮겼다.




※※※※※※※※※




정오가 가까워지자 자비로운 심장 부족의 야만인들은 검은 기둥이 서있는 공터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커다란 모닥불 주변을 맴돌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크로커스와 제미니는 그 광경을 꺼림칙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게 대체 무슨 의식인 걸까?" 제미니가 말했다.


부족민들은 그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뜻을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불안감이 자꾸만 커져가고 있었다.


"설마 우릴 잡아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저 모닥불에 산채로 구워지는 건 엄청 끔찍한 경험일 거야."


제미니가 쓸데없는 설명까지 곁들여가면서 호들갑을 떨어대자 참지 못한 크로커스가 인상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젠장, 제발 그 입 좀 다물어!"


"내 상상력이 풍부한 걸 어쩌라고! 상상력은 마법사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란 말이야!"


제미니까지 소리를 지르자 옆에서 지키고 있던 부족민 하나가 들고 있던 창대로 그들의 머리를 두들겼다.


"조용히 해라, 제물!"


그의 공용어 발음은 어설펐지만 크로커스와 제미니를 업신여기는 기색만큼은 아주 뚜렷하게 담겨져 있었다. 춤을 추던 부족민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크로커스와 제미니는 더 이상 나무 우리 속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의식이 시작되기도 전에 부족의 전사들에게 강제로 끌려 나와야 했고, 지금은 양 손을 묶인 채 모닥불 앞에 무릎 꿇려져 있었다. 부족의 모든 야만인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카히스가 천막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간밤의 습격 때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사슴의 뿔이 달린 짐승의 가죽이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고 하얀 뼈로 만든 장신구가 그의 목과 팔, 허리 등에 둘둘 감겨 있었다. 오른손에 쥔 지팡이로 땅을 짚자 부족의 모든 야만인들이 그 자리에 엎드리며 길을 열어 주었다.


모닥불 앞에 선 카히스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외지인들이 또 다시 신성한 땅을 침범하여 위대한 신께서 분노하셨다! 이 자들의 피와 살을 검은 돌에 바쳐 신께 용서를 빌 것이다!"


부족민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죄인을 제단 위에 올려라!" 카히스가 뾰족한 손톱 끝으로 제미니를 가리키자 창을 든 야만인들이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었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제미니가 마구 몸을 비틀며 발버둥 쳤지만 야만인들의 손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는 바락바락 악을 쓰며 야만인들에게 대들었다.


"이 멍청한데 냄새까지 나는 야만인 놈들아! 나 말고 하얀 머리부터 데려가란 말이야!"


"저 망할 놈의 주둥이가 끝까지······." 크로커스가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야만인들이 제미니를 제단 위에 고정시켰다. 제단의 네 모퉁이에 손발이 묶여버린 그는 옴짝달싹 못 한 채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대었다. 뒤이어 제단에 오른 카히스가 비수를 뽑아 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유난히도 번뜩거렸다.


"위대한 신이시여, 나의 간곡한 기도를 들으소서. 여기 불신자의 피와 살을 당신께 바치니 나의 적을 파멸시킬 힘을 갖게 하소서."


흥분 상태에 빠진 카히스의 목소리는 자꾸만 높아져 갔다. 그는 거꾸로 든 비수를 두 손으로 나누어 잡고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시퍼런 칼날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찌르자 제미니는 얼굴을 찡그리며 질끈 눈을 감아 버렸다.


그 때였다. 부족민들 사이에서 갑자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불이야!" 크로커스는 그 비명소리가 어쩐지 귀에 익은 것처럼 들렸다.


마을 곳곳에서 짙은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당황한 부족민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구쳤다.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한 야만인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불길을 잡아 보려 했지만 불이 번지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대부분 천막으로 구성된 이들 부족의 마을은 불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제물을 바치는 의식은 엉망이 되었고 공터는 아수라장으로 변해 버렸다. 카히스가 소리를 지르며 야만인들을 통제하려 했지만 소란은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한 번 번져나간 혼란이 이미 겉잡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얼굴에 물감을 잔뜩 칠한 한 야만인이 소란을 틈타 크로커스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자신을 헤치려드는 거라 생각한 크로커스가 반격을 시도하자 그가 손을 들어 막으며 소리쳤다.


"크로커스, 진정하세요. 저입니다, 가베라!"


"가베라? 어떻게 된 거에요?" 크로커스는 동료의 이상한 차림새에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고 안심이 되었다. 가베라가 포박을 풀어주며 대답했다.


"잠시 변장을 한 것뿐입니다. 이것도 받으세요." 가베라가 크로커스에게 장검을 돌려주었다. "짐과 말들은 이미 찾았습니다. 이제 제미니만 구하면 돼요."


크로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검을 뽑았다. 한 야만인이 그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크로커스가 장검으로 튕겨내고 보니 가베라가 쓰던 투척용 단검이었다. 가베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자는 제가 맡도록 하죠.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데 불구경만한 게 없다곤 해도 서두르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가베라는 야만인을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빌려 줬던 물건을 돌려받을 시간이로군."


"카히스!" 크로커스는 큰소리로 외치며 제단으로 향했다. 비록 천둥벌거숭이 같은 성격의 소유자일지라도 동료를 제물로 바치려한 잔악한 행위가 크로커스를 분노케 했다. 야만인들의 왕이 제단 위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외지인! 네놈들이 결국 이 땅에 저주를 가져왔구나!" 카히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카히스, 네 놈이 섬기는 신의 이름이 대체 무엇이냐?" 크로커스가 물었다.


"뭐라?" 예상치 못한 질문에 카히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크로커스의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어떤 신이기에 사람을 죽여 가면서까지 섬기냔 말이다.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건가?"


"닥쳐라, 불신자! 너 따위가 감히 위대한 신의 섭리를 이해할 성싶더냐?"


"이름을 말해라, 카히스!" 크로커스가 일갈했다.


"위대한 신은 오직 한 분 뿐! 따라서 세속적인 이름 따윈 필요 없나니!" 카히스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이름도 모르는 신을 섬긴다니 궤변이로군. 네가 믿는다는 신이 정말 존재하긴 하나?" 크로커스가 콧방귀를 뀌었다.


분노로 부들대던 카히스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얼굴의 절반 이상이 가려져 있었지만 드러난 부분만으로도 추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미친 듯이 지팡이를 휘둘러 대었다.


크로커스는 과거의 경험을 통해 광신도의 행동을 유도하였다. 이성을 잃은 카히스는 인질의 이점을 스스로 버렸다. 그는 검은 광석을 이용해 강력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다룰 수 있었지만 대신 전사처럼 싸우기를 택했다. 명백한 실수였고 크로커스는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장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나무로 된 지팡이가 깎여 나갔다. 크로커스는 끈질기게 똑같은 부분만을 노렸고 전사로서의 기량이 떨어지는 카히스는 일방적으로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칼날이 또 한 번 지팡이를 베어내는 순간 검은 광석이 떨어져 나갔다.


카히스가 기겁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그는 허둥대며 검은 광석을 집어 들려 했지만 크로커스가 가만히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크로커스의 발길질이 허리를 굽힌 카히스의 턱을 세게 치고 지나갔다. 땅위를 한 바퀴 구른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크로커스가 땅바닥에 떨어진 검은 광석을 주워들었다.


"이것만 없으면 큰 위협은 되지 않겠지." 작게 중얼거린 그는 쓰러진 카히스를 지나쳐 제단 위로 올라갔다. 제미니가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어서 이것 좀 풀어줘!" 그의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크로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로커스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뭐라고 했었지? 나부터 제물로 바치라고 했던가?"


"내가 언제!" 제미니는 그가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그냥 하얀 머리부터 먼저 데려가라고 했던 거뿐이야!"


그의 뻔뻔한 태도에 크로커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망할 놈의 주둥이는 끝까지."


제단 아래에서 야만인들을 막아내던 가베라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서둘러요! 놈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가 쓰러뜨린 숫자보다 훨씬 많은 수의 야만인들이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크로커스가 장검을 휘둘러 제미니의 손발을 고정시킨 밧줄을 잘라 내었다.


제단 위에서 폴짝 뛰어내린 제미니가 소리쳤다. "어서 도망치자!"


뒤를 흘끗 바라본 가베라가 소리를 질렀다. "이쪽으로!"


크로커스와 제미니는 가베라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야만인들을 피해 좁은 천막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 다녀야 했다. 달리는 도중 크로커스가 천막을 고정시킨 밧줄을 잘라 길을 막았고 무너져 내리는 천막 속에 갇힌 한 야만인이 팔을 허우적거리며 고함을 질렀다.


일행은 계속해서 달렸다. 매캐한 연기를 뚫고 반쯤 타버린 천막을 지나쳤을 때 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등에 짐을 실은 말들이 눈 앞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말 위에 올랐지만 야만인들은 쉽게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옆에서 튀어나온 야만인이 고삐를 잡아 당겼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제미니였다. 그는 긴 지팡이 끝을 양손으로 붙잡더니 연달아 내리쳤다. 머리꼭지를 얻어맞은 야만인이 비명을 지르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제미니가 코웃음을 치더니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아까의 복수다!"


마지막 방해물을 떨쳐 낸 일행은 곧장 앞을 향해 말을 달렸다. 야만인들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었지만 평지를 달리기 시작한 말의 속도를 따라 잡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으로 달렸고 얼마 후 블랙무어의 마지막 검은 기둥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황야의 끝에 다다랐을 때 야만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푸른 숲과 맑게 흐르는 강물이 일행을 반겨 주었다. 마침내 블랙무어를 빠져 나온 것이다.




※※※※※※※※※




또 한 곳의 오지를 전전해야만 했던 마법사들은 이번에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쓸 수 있는 모든 마법적 수단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실패가 그들을 풀이 죽게 만들었다. 특히나 이번 탐색 임무의 책임자인 우블케의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블케는 그가 묵고 있는 여관방에서 켈보림의 자료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거의 대부분의 장소를 찾아 봤음에도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밖에 여길 수가 없었다. 아니면 정말로 운이 따라주질 않았거나.


그가 한창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와중에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데산나였다.


"무슨 일이지?" 압박감에 시달리던 우블케는 평소보다도 퉁명스레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데산나는 아랑곳 않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꼭 알아야 할 소식이 있어요."


"젠장, 스승님의 전갈인가? 이번엔 뭐라고 하셨나?" 우블케가 짜증을 삼키며 대답했다. 그는 차라리 탐색을 서두르라는 스승의 호통이기를 바랐다. 이미 수차례나 독촉장을 날렸던 켈보림은 계속된 실패를 참아 넘기기에는 인내심이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돕스에서 온 소식이 아니에요." 데산나가 잠시 뜸을 들였다.


"스승님이 아니라고?"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우블케의 모습에 데산나가 더욱 진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즈의 얼음공작이 눈치를 챈 모양이에요. 그가 보낸 요원들이 우리의 뒤를 쫓고 있다지 뭐에요."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았지?" 경악한 우블케의 질문에 데산나는 적당히 얼버무렸다.


"아래층의 주정뱅이들에게서 들었어요. 오크 부족 전체와 싸우질 않나 정말 요란스럽게 쫓아오고 있더군요."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설명했지만 우블케는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어서 다른 녀석들에게도 소식을 알려! 당장 다음 목적지로 출발한다!"


허둥대는 우블케에게 데산나가 질문을 던졌다. "어디로 갈지 정한 건가요? 이번엔 꼭 맞아야 할 텐데요."


"다음 목적지는······." 우블케의 눈이 활짝 펼쳐놓은 지도 위로 향했다. 남은 장소는 단 두 곳뿐이었고 그는 마지못해 한 쪽을 택해야만 했다.


"이 곳으로 하지." 그가 결정을 내렸다.




이 글이 누군가의 취향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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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44 뾰족이언니
    작성일
    22.07.25 22:35
    No. 1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올리시는 날짜가 언제인지 공지 하시면 더 좋을 거 같아요. ^^)>
    "늦은밤 들렸네요. 굿밤 되세요."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3 고철거인
    작성일
    22.07.25 23:06
    No. 2

    한 편 쓰면 바로바로 올리는 지라
    정확히 언제 올린다고 말하기가 애매합니다;;;
    지금까지를 생각해보면 주로 8시에서 11시 사이쯤에 올리는 경우가 많긴 했는데
    요일까지도 제각각이라서요 ㄷㄷ;;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44 뾰족이언니
    작성일
    22.07.25 23:13
    No. 3

    '응원합니다. 건필하세요. ^^)>'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3 고철거인
    작성일
    22.07.25 23:17
    No. 4

    감사합니다.
    뾰족이언니님도 건필하세요 ㅎㅎ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29 꿀짜장
    작성일
    22.07.26 20:18
    No. 5

    작가님께선 마법도 상상력으로 비유하신게 정답일지 모르겠어요..

    상상력이 이루지 못할 건 없다고 보는 1인이에요

    재미있게 읽었어요 ^^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3 고철거인
    작성일
    22.07.26 23:21
    No. 6

    마법에 대해 묘사한 부분은
    주문 이름만 외치면 불덩이가 튀어 나갔다는 식이 아니라
    제 나름 최대한 자세히 묘사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D&D를 기본으로 다른 매체들도 참고해서 써보고 있어요
    마블 닥터 스트레인지에 나오는 손동작 같은 것들요 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4 남해검객
    작성일
    22.08.16 21:56
    No. 7

    꾹꾹이 하고 갑니다 ^^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3 고철거인
    작성일
    22.08.16 22:05
    No. 8

    언제나 감사 드립니다.
    꾹꾹이 좋아요 ^^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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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10. 우블케 (2) +6 22.09.06 48 1 13쪽
52 #10. 우블케 (1) +8 22.08.27 30 3 11쪽
51 #9. 버려진 요새 (4) +6 22.08.20 59 2 21쪽
50 #9. 버려진 요새 (3) +8 22.08.15 38 3 13쪽
49 #9. 버려진 요새 (2) +8 22.08.08 48 4 13쪽
48 #9. 버려진 요새 (1) +6 22.07.29 73 3 14쪽
» #8. 검은 황야 (4) +8 22.07.25 59 2 20쪽
46 #8. 검은 황야 (3) +6 22.07.22 44 2 13쪽
45 #8. 검은 황야 (2) +6 22.07.19 49 3 11쪽
44 #8. 검은 황야 (1) +4 22.07.18 54 2 10쪽
43 #7. 추적 (6) +10 22.07.15 61 6 16쪽
42 #7. 추적 (5) 22.07.13 50 2 12쪽
41 #7. 추적 (4) +4 22.07.11 43 5 11쪽
40 #7. 추적 (3) 22.07.08 57 3 13쪽
39 #7. 추적 (2) +2 22.07.06 57 5 14쪽
38 #7. 추적 (1) 22.07.01 45 4 10쪽
37 #6. 광산 문제 (6) +2 22.06.29 25 5 20쪽
36 #6. 광산 문제 (5) +2 22.06.28 74 4 12쪽
35 #6. 광산 문제 (4) 22.06.25 46 4 14쪽
34 #6. 광산 문제 (3) +2 22.06.22 43 5 14쪽
33 #6. 광산 문제 (2) 22.06.19 36 3 11쪽
32 #6. 광산 문제 (1) +2 22.06.16 56 3 14쪽
31 #5. 재판 (3) +4 22.06.14 59 3 19쪽
30 #5. 재판 (2) +2 22.06.09 41 3 11쪽
29 #5. 재판 (1) +4 22.06.08 76 3 14쪽
28 #4. 가베라 (5) +2 22.06.05 52 3 16쪽
27 #4. 가베라 (4) +2 22.06.04 46 4 11쪽
26 #4. 가베라 (3) +4 22.06.03 59 5 12쪽
25 #4. 가베라 (2) +4 22.06.02 62 4 16쪽
24 #4. 가베라 (1) +2 22.06.01 55 5 13쪽
23 #3. 오롤로죠 자이츠 (7) +2 22.05.30 66 6 13쪽
22 #3. 오롤로죠 자이츠 (6) +8 22.05.29 65 7 10쪽
21 #3. 오롤로죠 자이츠 (5) +4 22.05.28 76 7 13쪽
20 #3. 오롤로죠 자이츠 (4) +5 22.05.27 49 6 13쪽
19 #3. 오롤로죠 자이츠 (3) +8 22.05.26 104 9 13쪽
18 #3. 오롤로죠 자이츠 (2) +4 22.05.25 73 8 12쪽
17 #3. 오롤로죠 자이츠 (1) +4 22.05.24 91 10 11쪽
16 #2. 제미니 겔드 (9) +7 22.05.23 107 12 15쪽
15 #2. 제미니 겔드 (8) +7 22.05.22 73 11 11쪽
14 #2. 제미니 겔드 (7) +4 22.05.21 77 13 11쪽
13 #2. 제미니 겔드 (6) +10 22.05.20 99 10 15쪽
12 #2. 제미니 겔드 (5) +8 22.05.20 114 12 10쪽
11 #2. 제미니 겔드 (4) +14 22.05.19 112 12 11쪽
10 #2. 제미니 겔드 (3) +10 22.05.19 107 1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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