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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거인 님의 서재입니다.

히로익멘션 : 이즈의 모험가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고철거인
그림/삽화
가락송이
작품등록일 :
2022.05.12 17:09
최근연재일 :
2022.09.19 21:17
연재수 :
55 회
조회수 :
4,612
추천수 :
453
글자수 :
321,744

작성
22.06.14 21:09
조회
58
추천
3
글자
19쪽

#5. 재판 (3)

DUMMY

크로커스는 사람 속을 꿰뚫어 보는듯한 눈빛에 몸을 움츠렸다. 빛나는 황금색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금빛이 감도는 눈동자는 통치자로서 갖춰야할 지혜와 위엄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광포한 냉기가 깊숙한 곳에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부드러운 비단옷을 몸에 두르고 살아서 숨 쉬는 그보다 온갖 보석들로 장식된 은빛 옥좌가 더욱 인간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제미니는 크로커스와는 다른 시선으로 오롤로죠를 바라보았다. 재판을 받는 죄인이 아닌 흥미로운 실험체를 마주한 마법사의 눈빛이었다.


"얼음공작이라 불리는 이유가 이거였어?"


오랜 시간 동안 신비롭고 은밀하게 전해지는 힘들에 대해 배우고 익혀왔던 제미니는 오롤로죠의 몸속에 깃들어있는 비자연적인 힘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 근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매우 강력한 힘이었다. 본래라면 대기와 땅속, 바다 속 깊숙한 곳에 흐르고 있어야 할 마법들이 그의 몸속에 한데 뭉쳐있었다. 오롯이 불타는 태양의 열기와 이성을 마비시키는 보름달의 황홀함과 끝 모를 우주 저편의 아득한 별자리를 닮은 마법의 빛이 밝게 타올랐다. 마법에 익숙하거나 민감한 체질이 아니라면 보지도 느끼지도 못할 강렬한 빛이었다.


"아니, 이게 어떻게 얼음이라는 거야?" 제미니가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알현실에 모인 좌중들의 면면을 살핀 오롤로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윌드레드에게로 꽂혀 있었다.


"엘스노어의 대리인 윌프레드. 그대는 저 두 사람이 아르소웬 공의 일가족을 해치고 영지에 방화를 저질렀다고 고발하였다. 틀림이 없는가?"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에 흠칫한 윌프레드였지만 이내 평안을 가장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예, 저 두 죄인이 저지른 일이 틀림없습니다." 노인의 확고한 믿음이 알현실에 울려 퍼졌고 사람들이 동시에 수군거렸다. 그들은 노인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터무니없는 누명이었다. 적어도 크로커스와 제미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거짓말쟁이 늙은이가! 내가 언제 그런 짓을 했다고 눈앞에서 사기를 치는 거야!"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제미니가 길길이 날뛰기 시작하자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정신이 아찔해진 크로커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정숙!" 오롤로죠가 힘을 실어 말했다. 크로커스는 그의 금빛 눈동자가 순간 빛으로 번쩍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통치자의 위엄이 이런 것인가 싶어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제미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오롤로죠의 말 속에 실린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거세게 짓누르고 있었다. 마비나 신체 조종 같은 마법사의 주문과는 달리 뚜렷한 목적과 구체성을 띄지는 않았지만 의심할 여지없는 마법의 한 종류였다. 굳이 따져보자면 원시 마법과 유사한 면이 있었다. 정련되지 않고 본능에 충실한 난폭한 마법의 일면이 엿보였다.


제미니는 오롤로죠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허락하기 전에 함부로 입을 열지 마라." 오롤로죠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내려보자 제미니는 고개만 간신히 끄덕거렸다.


"그대가 직접 확인한 건가?" 오롤로죠가 윌프레드를 보며 다시 물어 보았다.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전하. 하지만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는 모습을 영지의 병사들이 목격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저와 함께 이곳에 와 있습니다."


"알겠다." 고개를 끄덕인 오롤로죠는 고개를 돌려 크로커스와 제미니를 바라보았다.


"스스로 변호 할 말이 있나?"


크로커스는 제미니를 슬쩍 바라보았다. 쥐죽은 듯 서있는 제미니에게 의구심을 품긴 했으나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제미니가 다시 사고를 치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 공작 전하." 크로커스는 말을 끊고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 "송구하지만 저희는 무죄입니다."


다시 한 번 알현실이 웅성거렸다. 눈살을 찌푸린 윌프레드의 주름은 더욱 깊게 파였고 오롤로죠는 여전히 크로커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는 왠지 모르게 오롤로죠가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만 그것이 비웃음인지 헛웃음인지 혹은 다른 무엇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크로커스는 어깨를 펴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에아닌······, 아니 엘스노어의 아가씨를 해친 건 저나 제미니가 아니었습니다. 빈스라는 이름의 사냥꾼이었죠. 그러니 저희는 무죄입니다."


"거짓말입니다!" 윌프레드가 소리쳤다.


"엘스노어의 대리인은 반박할 말이 있는가?"


"분명 빈스라는 이름의 무뢰배가 초주검이 된 상태로 발견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저들이 결백하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윌프레드가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저희가 빈스를 발견했을 때 그자는 목숨만 겨우 붙어있는 상태였습니다. 마치 심한 고문이라도 당한 것 같았지요." 노인이 제미니를 바라보았다.


"그자를 그렇게 만든 것은 마법이었습니다." 알현실 전체가 술렁거렸다. 윌프레드는 계속해서 말했다.


"빈스를 죽이고 그자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울 속셈이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노인은 말을 마치며 좌중을 돌아보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윌프레드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중을 휘어잡는 윌프레드의 솜씨에 크로커스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는 서둘러 외쳤다.


"제가 해명을 해도 되겠습니까?" 오롤로죠가 고개를 끄덕이자 크로커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얼음공작은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의 편을 둘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빈스는 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습니다. 아가씨에게 무례를 범하던 그 자에게 제가 망신을 주었죠.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 광경을 보았고 그 일로 앙심을 품은 빈스는 저를 노리려다가 아가씨를 대신 다치게 한 겁니다." 크로커스는 윌프레드의 흉내를 내며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게다가 제미니는 아가씨를 치료하기 위해 재빠르게 회복의 물약을 사용했습니다. 그것도 두 병이나요. 만약 제미니가 아니었다면 아가씨는 큰일을 당했을지도 몰랐습니다."


그의 호소가 먹혀들었는지 알현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절반은 여전히 그들의 죄를 의심했으나 나머지 절반은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닐 수 없었다. 크로커스는 재판에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는 듯 했다.


"그대의 주장은 잘 들었다만 궁금한 점이 생겼다. 엘스노어의 대리인은 증인이 있다고 했었지?" 오롤로죠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 자를 불러라."


오롤로죠의 한마디에 증인이 재판장에 세워졌다. 그는 윌프레드를 호위하던 기수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날 보았던 일들을 상세히 설명하도록."


오롤로죠가 명령하자 기수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진땀을 흘려야 했다. 그는 더듬거리면서도 기억나는 모든 걸 꺼내 놓았다. 딸이 보이지 않자 영주가 불같이 화를 내던 일 부터 시작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에아닌의 모습, 마지막으로 범인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불을 지르고 달아나는 것 까지 더듬거리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기수의 증언이 끝나자 오롤로죠는 크로커스를 바라보았다.


"너는 스스로가 무죄라 주장했다. 그렇다면 영지에 방화를 저지른 건 누구의 짓인가? 영주인 아르소웬 공의 딸이 너희들과 함께 있었던 이유는 뭔가? 스스로 떳떳하다면 왜 도망친 거지?"


갑작스레 쏟아지는 오롤로죠의 질문에 크로커스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던 그가 돌변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윌프레드 역시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불을 지른 건 제미니였습니다. 마법으로 도망칠 시간을 벌려는 의도였을 뿐이구요." 크로커스는 마지못해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만 답하였다. 하지만 오롤로죠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다른 질문에는 답하지 않겠다는 건가?" 오롤로죠가 말했다.


크로커스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오롤로죠의 질문에 답하려면 에아닌과 제미니의 관계를 설명해야만 했다. 제미니를 도울 목적으로 아버지인 영주의 명을 어기고 한 밤중에 몰래 빠져나오기까지 했던 그녀인 만큼, 사실을 말할 경우 어떤 추문이 따라 붙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윌프레드도 그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는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양측 모두 증언을 하지 않으니 마땅한 판결을 내릴 수가 없다. 따라서 새로운 증인을 부르겠다."


새로운 증인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오롤로죠의 발언에 크로커스는 물론 윌프레드까지도 눈을 부릅떴다. 오롤로죠가 손짓하자 문관이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알현실이 조용해졌다. 크로커스는 오롤로죠의 의도를 알 수 없는 행동에 일분일초가 무척 더디게 흘렀다. 제미니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문관과 함께 새로운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먼저 란베인과 함께 젊은 여기사가 알현실의 문을 통과했다. 베이나라는 이름의 여기사는 란베인과 마찬가지로 파서레아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뒤이어 또 다른 두 사람이 알현실에 걸어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남성과 여성이었고 윌프레드가 놀라 소리쳤다.


"영주님! 아가씨!"


갑작스런 아르소웬과 에아닌의 등장에 크로커스는 번쩍 뜬 눈으로 숨을 삼켰다. 새하얗던 꽃이 붉게 물들었던 그날의 기억이 눈에 선했다. 기분 탓인지 이전보다 안색이 창백해보였지만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의 명에 따라 두 분을 모셔왔습니다."


란베인과 베이나가 오롤로죠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오롤로죠가 짧게 치하했다.


"이즈의 공작 전하를 뵙소이다. 불미스러운 일로 평의회에 참석하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는데 전하의 배려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오."


"엘스노어의 에아닌이 공작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두 부녀가 허리를 숙이자 오롤로죠가 답례로 환영의 인사를 건넸다.


"두 분 모두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소."


"고생은요. 덕분에 마이아스트라의 등에 오르는 호사를 누렸는걸요. 베이나 경이 신경을 많이 써주셨답니다." 에아닌이 한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지었다. 여기사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두 분을, 에아닌 양을 모신 이유가 무언지 알고 있을 거라 믿소.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소?"


오롤로죠가 말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부드럽고 예의바른 말투였다.


오롤로죠의 요청에 에아닌은 차분하게 사건의 전후과정을 풀어나갔다. 아름다운 엘프 소녀의 증언에 사람들의 눈과 귀가 쏠렸다.


크로커스 역시 에아닌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상처가 완전히 나았는지 걱정하느라 바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거짓 증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미니와의 관계를 고려하자면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묘한 껄끄러움에 뒷맛이 개운치가 않았다. 그녀가 증언을 마치길 기다리던 오롤로죠가 짧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증언 감사하오, 에아닌양."


에아닌 역시 고개를 숙였다. 오롤로죠가 선언했다.


"모두들 들은 대로다. 영주의 일가족을 해친 혐의에 관해선 저들은 무죄다."


"하지만 공작 전하!" 윌프레드가 당황해 외쳤지만 오롤로죠의 말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허나 영주의 재산인 영지 내에서 방화를 저질러 손해를 입힌 것 또한 명백한 사실. 그에 대한 처벌이 필요할 터." 오롤로죠는 턱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잠시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거 같군. 아르소웬 공에게 지불할 배상금이 모일 때까지 하인으로 고용해 허드렛일을 시키겠다. 저들의 개인자산은 동결시키고 최소한의 생계수단만 지원한다면 되겠지."


"공작 전하 죄인들을 처벌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용하시겠다니요?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윌프레드가 다시 소리쳤다.


"수십 년 전 쉔가림에 큰 난리가 났을 때 중죄인들을 고용해 군역을 지게 했다고 하더군.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니다." 오롤로죠의 냉철한 시선이 윌프레드에게로 향했다.


미슬론드에서 멀리 떨어진 쉔가림의 사례까지 들먹일 줄 상상도 못했던 윌프레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공중 기병대까지 동원해 자신이 모시는 영주와 그 일족을 비밀리에 불러온 오롤로죠였다. 그의 뜻이 하루아침에 결정된 사안이 아니라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하, 하지만······." 윌프레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떨었다. 이대로 뜻을 굽혀도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때 누군가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익숙한 손길에 고개를 돌리자 침착한 아르소웬의 얼굴이 보였다.


"그만하면 됐네, 윌프레드." 고개를 끄덕인 그는 오롤로죠를 바라보았다.


"공작 전하께서 책임지고 저들에게 책임을 묻겠다고 하셨네." 아르소웬의 차분한 시선이 오롤로죠와 마주 닿았다. 얼핏 닮아 보이지만 전혀 다른 눈빛이었다.


"걱정 마시오. 저자들이 귀공의 영지에 손해를 끼칠 일은 두 번 다시없을 테니." 오롤로죠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속에 담긴 의도를 읽어낸 윌프레드는 더 이상의 반론이 무의미하단 걸 알아 차렸다. 아무리 부당하다 외쳐봐야 재판의 결과는 그의 손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는 허리를 숙였다.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




재판이 끝났다. 두 기사의 인도에 따라 에아닌과 아르소웬이 알현실을 빠져 나갔고 그 뒤를 윌프레드가 따랐다. 그녀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워낙 짧은 순간이었다. 참관인들도 하나 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하자 오롤로죠가 손짓했다. 대동했던 문관과 호위기사는 말없이 시종들을 데리고 모습을 감췄다.


넓디넓은 알현실에 남은 건 크로커스와 제미니, 오롤로죠 단 세 사람뿐이었다. 오롤로죠가 옥좌에서 일어나 계단 아래로 뚜벅뚜벅 걸어 내려왔다.


크로커스는 조심스레 오롤로죠를 쳐다보며 경계했다. 그 때 갑자기 제미니가 소리를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비전 주문도 아니고 신성 주문도 아니었는데 무슨 수로 꼼짝 못하게 한 거지?"


화가 난 건지 궁금한 건지 종잡을 수 없는 태도로 제미니가 소리쳤다. 그가 재판 내내 얌전히 굴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크로커스는 한층 더 경계어린 시선으로 오롤로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 속 한편으론 제미니를 꼼짝 못하게 만들어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닥쳐라. 또 다시 험한 꼴 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오롤로죠가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제미니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고는 작은 소리로 궁시렁거렸다.


오롤로죠는 콧방귀를 끼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툭 집어던졌다. 크로커스는 그것을 알아보고 서둘러 주워들었다. 네젝의 일지였다.


"긴말은 하지 않겠다. 앞으로 너희 둘은 돕스의 머저리들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샅샅이 조사해서 나에게 보고하도록."


크로커스는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고 제미니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내가 그딴 걸 왜 해!"


오롤로죠는 불쾌하단 눈빛으로 제미니를 노려보았다. 제미니의 얼굴이 또 다시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크로커스는 오롤로죠에게서 비롯된 강력한 어떤 힘이 제미니를 향해 쏟아지는 것을 보았다. 거리가 떨어져 있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뚜렷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저희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건지 조금이라도 설명을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너무 갑작스러운데요." 크로커스가 조심스레 물었다.


"답답한 노릇이로군." 오롤로죠가 혀를 찼다. 이런 간단한 문제조차 이해하지 못하냐며 힐난하는 분위기였다.


"네놈들이 얽힌 일에 돕스의 스카페이스가 관련되어 있었다. 스카페이스가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


크로커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바리오 '스카페이스' 드레이슬러. 뭍에 발붙일 일 없는 뱃사람이라도 자주 접할 수 있는 돕스의 다섯 지배자 중 한명이자 위험한 암살자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얼굴에 심한 상처가 있어 항상 가면을 쓰고 다니기 때문에 스카페이스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때마침 나타난 네놈들이 돕스의 지령서를 가지고 있었다. 마법사라고 적혀있는 걸 보니 켈보림의 부하들이겠군. 다섯 머저리 중 두 놈이 동시에 움직였는데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오롤로죠의 설명을 들은 크로커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왜 저희입니까? 공작 전하의 부하들을 시켜서 조사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크로커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오롤로죠의 싸늘한 눈초리가 크로커스를 향했다.


"멍청한데 성질까지 급하군. 이곳 이즈에도 수많은 돕스의 첩자들이 암약 중이다. 그것들의 시선을 끌지 않기 위해서라도 알려지지 않은 얼굴이 필요했다. 마침 너희 두 놈 모두 한가닥 믿는 구석이 있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지."


"저희가 의심되지는 않으십니까? 이 일지를 가지고 있던 게 저인데?" 또 다른 의문점이 생긴 크로커스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왜? 돕스와 내통한 죄로 교수대에 매달아주기라도 원하는 건가?" 오롤로죠의 날카로운 시선에 크로커스는 몸을 움츠렸다. 오롤로죠라면 진짜 그러고도 남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네 놈들이 허튼수작을 부리면 그리 되겠지. 그리고 엘스노어에는 두 번 다시 접근하지 말도록. 아르소웬 공과 그렇게 얘기가 되었으니까."


"알겠습니다." 크로커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놈 역시 마찬가지다 마법사." 오롤로죠는 새파랗게 질려있는 제미니를 향해 쏘아 붙였다.


"마지막으로 네 놈들에게 조력자를 한 명 붙여주도록 하겠다. 부디 실망시키지 말도록. 교수대에 매달리고 싶지 않으면." 그 말을 끝으로 오롤로죠는 알현실을 나가 버렸다.


조력자가 아니라 감시자일 것이다. 크로커스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제미니를 보고 있자니 얼음공작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잠시 후 하인 한 명이 크로커스와 제미니에게 다가왔다. 그는 오롤로죠의 지시에 따라 두 사람을 임시 숙소로 안내하려 했지만 굳어서 꼼짝 못하는 제미니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미니가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와 동시에 고아원에 한 장의 편지가 도착했다. 이스테나가 소리쳤다.


"고아원 책임자인 원장님이 또 출장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거 에요?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거에요?"


가베라는 이번엔 어떤 핑계를 대야할지 알 수가 없어서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멀리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마음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하나로 뭉쳤다.


"얼음공작 개······."


실로 마법 같이 신비로운 일이었다.




이 글이 누군가의 취향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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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44 뾰족이언니
    작성일
    22.07.16 17:33
    No. 1

    무언가 보상을 주었으면...죄인 취급까지 받았는데...허...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3 고철거인
    작성일
    22.07.16 19:44
    No. 2

    제가 예상 못했던 관점이네요
    댓글을 달아주시니 확실히 다르게 생각할 기회가 되는거 같습니다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54 남해검객
    작성일
    22.07.26 20:18
    No. 3

    영화 스카페이스에서 알파치노가 총 쏘던 장면이 떠오르는군요. 죄송^^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3 고철거인
    작성일
    22.07.26 22:48
    No. 4

    알 파치노가 나온 영화는 제가 보지 못했고
    알 카포네의 별명에서 따왔습니다.
    악명 높은 범죄 조직의 두목 이미지에 딱이라고 생각했거든요 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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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8. 검은 황야 (2) +6 22.07.19 49 3 11쪽
44 #8. 검은 황야 (1) +4 22.07.18 54 2 10쪽
43 #7. 추적 (6) +10 22.07.15 61 6 16쪽
42 #7. 추적 (5) 22.07.13 50 2 12쪽
41 #7. 추적 (4) +4 22.07.11 43 5 11쪽
40 #7. 추적 (3) 22.07.08 57 3 13쪽
39 #7. 추적 (2) +2 22.07.06 57 5 14쪽
38 #7. 추적 (1) 22.07.01 45 4 10쪽
37 #6. 광산 문제 (6) +2 22.06.29 25 5 20쪽
36 #6. 광산 문제 (5) +2 22.06.28 74 4 12쪽
35 #6. 광산 문제 (4) 22.06.25 46 4 14쪽
34 #6. 광산 문제 (3) +2 22.06.22 43 5 14쪽
33 #6. 광산 문제 (2) 22.06.19 36 3 11쪽
32 #6. 광산 문제 (1) +2 22.06.16 56 3 14쪽
» #5. 재판 (3) +4 22.06.14 59 3 19쪽
30 #5. 재판 (2) +2 22.06.09 41 3 11쪽
29 #5. 재판 (1) +4 22.06.08 76 3 14쪽
28 #4. 가베라 (5) +2 22.06.05 51 3 16쪽
27 #4. 가베라 (4) +2 22.06.04 45 4 11쪽
26 #4. 가베라 (3) +4 22.06.03 59 5 12쪽
25 #4. 가베라 (2) +4 22.06.02 62 4 16쪽
24 #4. 가베라 (1) +2 22.06.01 54 5 13쪽
23 #3. 오롤로죠 자이츠 (7) +2 22.05.30 65 6 13쪽
22 #3. 오롤로죠 자이츠 (6) +8 22.05.29 65 7 10쪽
21 #3. 오롤로죠 자이츠 (5) +4 22.05.28 76 7 13쪽
20 #3. 오롤로죠 자이츠 (4) +5 22.05.27 49 6 13쪽
19 #3. 오롤로죠 자이츠 (3) +8 22.05.26 103 9 13쪽
18 #3. 오롤로죠 자이츠 (2) +4 22.05.25 73 8 12쪽
17 #3. 오롤로죠 자이츠 (1) +4 22.05.24 91 10 11쪽
16 #2. 제미니 겔드 (9) +7 22.05.23 106 12 15쪽
15 #2. 제미니 겔드 (8) +7 22.05.22 73 11 11쪽
14 #2. 제미니 겔드 (7) +4 22.05.21 76 13 11쪽
13 #2. 제미니 겔드 (6) +10 22.05.20 97 10 15쪽
12 #2. 제미니 겔드 (5) +8 22.05.20 114 12 10쪽
11 #2. 제미니 겔드 (4) +14 22.05.19 112 12 11쪽
10 #2. 제미니 겔드 (3) +10 22.05.19 107 1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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