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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일상] 망상 여행.

 사그락사그락 눈 쌓이는 소리가 참 곱다. 그저 멍하니 앉아 창밖의 흩날리는 눈을 보자니 마음이 평안해진다. 언제부터인가 어른이 되어버린 나 자신을 바라보며, 지금 이 자리를 훌훌 털고 여행을 떠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저 사회의 굴레 아래 털썩 주저앉아 있는 신세일 뿐,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것은 그저 마음뿐이다. 나의 몸은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다. 그 때문에 그저 눈을 감고 상상한다.

 

 상상 속의 나는 편한 청바지에 두툼한 외투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뽀드득거리는 눈을 밟으며 걷는다. 눈이 너무 폭신해 신발을 벗어도 될 것 같지만, 나의 동심 어린 용기일 뿐이다. 이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기차역이 보인다. 작고 허름한, 하지만 곧 열차가 도착할 것 같다. 기차표를 파는 아름다운 목소리의 아가씨와 잠깐 이야기를 나눈다. 그러다가 곧 열차가 도착한다는 말에 헐레벌떡 뛰어간다.

 

 턱까지 차오르는 숨을 점차 고르게 내쉬고, 자리에 앉는다. 창밖의 풍경들을 악보 삼아 이어폰으로 들리는 음악을 흥얼거려본다. 조금 더 작게. 조금 더 아름답게. 창밖의 나무들이 음표가 되고, 구름들이 쉼표가 된다. 기나긴 전선들은 5선이 되고, 나무들이 그 전선들에 걸려있다. 가끔가다 구름을 보면 잠깐 쉬어가도 된다. 창문은 닫혀 있지만, 시원한 바람이 내 마음을 적신다. 잠시 눈을 감고 이 시원한 느낌을 마음껏 만끽해본다.

 

 그러다가 내 자리 옆에 누군가가 앉는다. 빛을 반사하는 새하얀 눈처럼 아름다운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인사를 해버리고,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그 사람의 외모는 눈처럼 아름다웠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따듯한 태양 같다.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날이 참 좋네요., 어디로 가세요? 목적지 없이 떠납니다.! 멋있다. 등의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서로의 삶을 나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햇살을 닮은, 눈을 닮은 그 사람이 그만 떠난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체, 작별인사를 건넨다.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그 사람, 언젠가는 인연이 닿는다면 다시 만나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조용히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뜨니 어느덧 마지막 종착역인가 보다. 나는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짐이랄 것까지도 없다. 그냥 벗어놓은 외투를 손으로 집는다.) 자리를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날리는 시원한 기지개를 날린다. 기차가 멈추고 아무도 내리지 않는 마지막 역에 나 홀로 그 역에 내린다. 그리고 기차에게 쓸쓸히 작별인사를 한다.

 

 제법 날씨가 쌀쌀해졌다. 다시 목적지 없이 걷는다. 매서운 바람이 나의 귓불에 화를 내지만, 나는 그 바람을 다독인다. 괜찮아. 괜찮아. 그러자 피부를 매섭게 스치던 바람은 따듯한 노을과 함께 잔잔해졌다. 어느덧 저 산등성이 사이로 태양이 부끄러운 듯 숨어버린다. 정말 금세 숨어버렸다.

 

 걷다보니 어느새 바다이다. 철썩거리는 바다에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저 바다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니, 저 바닷속에는 뭐가 있을까? 분명 흑진주 같은 눈망울을 한 검은수염고래가 있을 것이다. 흰수염고래 사이에서 조금 특별한 검은수염고래는 분명 저 산기슭 계곡의 웅덩이에서 흘러 왔으리라. 철썩철썩 거리는 저 파도는 검은수염고래가 뿜어내는 물기둥의 잔잔한 파동일 것이다.

 

 그 파도의 인사에 나는 나의 검은수염고래에게 인사한다.

 

안녕?”

 

 그 험한 계곡 사이로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힘들었지? 그 웅덩이가 답답해서 나왔지만, 계곡의 바위들이 너무 날카로웠지? 여기저기 상처 입은 너의 등을 보자니 절로 고개가 숙인다. 잘했어. 그만큼도 잘한 거야. 아직 미성숙하고 몸집만 커다란 검은수염고래에게 나는 위로를 건네 본다. 그리고 다시 나만의 검은수염고래에게 인사한다.

 

안녕…….”


댓글 1

  • 001. 가는바람

    14.02.07 04:09

    ㅠㅠ 너무 아름다워요.
    //마지막 인사 같아서 마음이 아프네요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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