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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하(太河)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옥비(玉婢)의 난 (선조실록, 계갑일록)

선조(수정실록) 16년 계미(1583) 4 1(임자) 쇄환령을 거듭 엄하게 밝히다

이 해에 쇄환령(刷還令)을 거듭 엄하게 밝혔다. 육진을 처음 개척했을 적에 백성을 모집하여 들어가 살게 하면서,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은 면천(免賤)하여 속량(贖良)시키고 양민은 토관(土官)의 자급을 주었으며, 그 중에 뛰어난 자를 발탁하고 공로가 있는 자는 서용하여 진장(鎭將)까지 승진시켰었다. 처음 갔을 적에는 곡식 종자와 농기구, 집과 살림살이를 관에서 마련하여 도와주었다. 그래서 내지(內地)의 무뢰한이나 실업자들은 다 그곳으로 갔었다.

 

그런데 성종조 이후부터 옛 법이 모두 폐지되고 변장들이 탐욕과 횡포를 부리니, 군사와 백성들이 이를 견디지 못하여 도망하여 돌아오는 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망해 오는 자는 영구히 역졸에 소속시킨다는 법령을 만들었다. 그런데 그 후에 도망와서 역졸이 되어 모면하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마침내 쇄환법을 엄하게 했던 것인데, 중앙과 지방에서 소요가 일어나 그 피해가 완호(完戶)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때에 경원부 속공 노비인 옥비(玉婢)가 도망하여 영남으로 돌아와 죽은 지가 이미 80년이 지났으나 법으로 보면 아직까지도 해당 역에 소속되어 있었다. 대신들이 이 법은 조금도 늦출 수가 없다. 그 자손의 남녀들을 다 되돌려 보내야 한다.’고 의논하였다. 그러나 옥비는 남의 첩이 되어 양인 행세한 지가 이며 오래였으며 자손은 모두 사족(士族)에게 출가하였는데, 그 수가 무려 수백여 명에 이르렀다. 시정(寺正) 윤승길(尹承吉)이 처음 경차관이 되어 마음 속으로 그 억울함을 슬퍼하여 혼인 관계가 소원한 자는 모두 감면해 주었는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체임되었다. 그뒤 최옹(崔顒)이 후임으로 오고부터는 일체 쇄환하고, 호소하는것을 허용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억울하게 횡액을 당한 자가 부지기수였다. 그리하여 사족(士族)의 아내가 된 자는 왕왕 자결하는가 하면 한강을 건널 때 통곡하는 소리가 온 부근에 퍼졌는데, 나라에서는 이를 옥비의 난이라고 하였다. 최옹이 얼마 뒤에 피를 토하고 갑자기 죽었는데, 사람들은 보응이라고 하였다.】』

 

계갑일록(癸甲日錄) 만력 12년 갑신(萬曆十二年甲申) 선조 17, 1584 5 17

사헌부에서 또 옥비(玉非)의 사건을 논하니, 윤허하지 않다. 옥비는 경원(慶源) 관비(官婢)인데, 성화(成化) 연간에 한 진주(晉州) 사람이 북도의 변장(邊將)으로 있으면서 경원 기생을 첩으로 들였으니, 그가 곧 옥비이다. 순찰사의 장계에 고하여 윤승길(尹承吉)을 경차관(敬差官)으로 삼아 옥비의 자손을 조사해 내니 그 수효가 매우 많았다.


사목(事目) 내용에 의하면, 자손으로 남자일 경우에는 그 아내까지, 여자는 그 남편까지 모두 연루하고, 그 붙어사는 자는 그 주인까지 모두 강제로 데려오라고 되어 있었다. 윤승길이 장계를 보내어 아뢰기를, “아내가 남편을 따르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지만 남편이 아내를 따름은 이치에 매우 어긋나는데, 하물며 그가 정처(正妻)도 아닌 우연히 만나 첩으로 데리고 사는 자에게 같은 경우로 논단(論斷)하는 것은 더욱 부당한 일입니다. 더구나 옥비가 남쪽으로 온 지 세월이 이미 오래되어 그 열읍(列邑)에 흩어져 사는 자손들을 사람들이 그의 근본도 알지 못하는데, 지금 붙어살게 했다는 이유로 논함은 더욱 억울한 일이 됩니다.” 하였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윤승길이 반쯤 조사해 내다가 어버이 병환으로 중도에서 돌아가고, 성영(成泳)이 후임으로 진천(鎭川)까지 와서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더 나아가지 않았다.


 김위(金偉)가 그 임무를 대신하게 되어 전후 조사해 낸 것이 5백여 명인데, 자손을 제외하고 아내가 되어 남편을 따라오기도 하고, 더러는 남편이 되어 아내를 따라오기도 하였으며, 그 아내와 남편은 양민(良民)ㆍ천민(賤民)을 가리지 않고 한 집안 식구로 논단하여 집안 식구들이 남아나는 사람이 없었으며, 천인들은 붙어살게 했다는 이유를 붙여 그 주인까지 아울러 강제로 데려왔으므로 더러는 한 여자에 두 지아비가 아울러 관여되기도 하고, 또 첩으로 인하여 그 정처(正妻)까지 데려오기도 하여 사족(士族)들도 그 속에 많이 끼어 있게 되었다. 데려올 때 도보나 혹은 말도 타고, 혹은 수레로 혹은 업혀서 오는데, 울부짖는 소리가 도로에 어지러우니 듣는 이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길에서 쓰러져 죽는 자도 많았다. 식사 때마다 반드시 하늘에 기도하기를, “김위(金偉)의 원수를 갚아 주소서.” 하였다. 15일에 사간원에서 장계로 사건을 밝혀 석방해 주고 아울러 김위도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다.


 이보다 앞서 우상 정임당(鄭林塘)이 장계를 올리려고 영상에게 말하니, 영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정임당이 연석(筵席)에 들어가 혼자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영상은 임금의 의사를 알고 거슬리지 않으려 하였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고, 정철도 박순과 같았으므로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다. 그러자 청의(淸議)가 일어나 정철을 비난하였다. 어제 승지 정사위(鄭士偉)가 또한 이 사건을 계주(啓奏)하였으니, 임금께서 나이 많은 이와 홀어미는 참작하라는 말이 계셨으므로 임금의 의향도 조금 변한 것을 알고 이런 주계를 한 것이다. 그러나 김위에 대해서는 일체 논급(論及)하지 않았으니, 요즘 정철ㆍ박순 등 사류(士類)들의 처사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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