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선인
나는 손을 탁탁 털고 기지개를 쭉 켰다.
"으하하. 아우님의 실력을 보니 선인도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드네."
아직 살아남은 레더 스컬이 전부 탈혼수에 돌진했다. 탈혼수는 머리를 잃고 쓰러졌어도 뾰족한 털침은 그대로다. 레더 스컬은 자신의 몸이 털에 뚫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달라붙었다.
역시 지독한 악마종이다. 앞에 놈이 털에 꽂히면 그놈을 밟고서 올라선다. 그리고 터져 나간 머리 부위의 파편과 잘린 목 부위로 새까맣게 모여들어 만찬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런 놈들이 역겨웠지만 내가 내린 명령이라 일단 그대로 두었다. 괜히 놈들을 멈췄다가 모영에게 관심을 보이면 귀찮아진다.
혁련광은 내 무위에 크게 탄복하여 진정으로 즐거워했다. 그 마음이 내게 고스란히 전해져 왔으니까. 하지만 태을진군은 노안이 심하게 흔들거렸다.
"이보게 젊은이. 자네는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네. 혁련광 따위와 형제를 운운하는 것은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게 의형제를 맺으려면 모름지기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을 것이네."
"사부 지금 그런 소리를 해 봤자요. 이미 천지신명께 맹세까지 다 끝낸 상태인데 이젠 되돌릴 수 없소이다. 그렇지 않은가 아우? 하하."
음. 나는 누구의 분위기를 굳이 맞춰줘야 할 필요는 없다. 이 세계와는 별개의 사람이니까. 하지만 천마는 내 비밀을 모두 알고 있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다가는 그의 입에서 별의별 소리가 다 나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목숨을 걸고 그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죽이는 방법도 그렇게 어렵지 않다. 굳이 싸우지 않더라도 언노운이 뇌에 부하를 걸어 그를 미친 상태로 만들어 버리거나 잔인하지만, 뇌를 진흙처럼 녹여 버릴 수도 있다. 내 한마디에 이 자리에서···.
"그래서 나를 죽이겠다고?"
혁련광은 웃음을 멈추지 않고 이야기한다. 그는 내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제 생각이 넘어갔습니까?"
"그러니 알 수 있지. 아우님은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것 같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하지 않았나. 절대 아우님의 비밀은 입 밖으로 내지 않을 걸세."
"그렇게까지 나오시니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형님이 그러하시다면 아우는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나면 적마혈교로 오시게나. 자네가 가진 귀한 것들을 맛보고 싶어 환장할 것 같네. 가는 길에 고블린과 코볼트를 때려잡아서 그 고기 맛을 봐야겠네. 하하."
고블린과 코볼트 고기 요리법은 내 기억에서 넘어간 모양이다. 요괴라 지칭하지 않고 고블린과 코볼트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면 확실하다. 그런데 간다니?
"돌아가시렵니까? 저 때문에 명문정파를 멸한다는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지 않았습니까?"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만 날이 아니라고 놈들을 멸할 계획은 변함이 없네. 하지만 이제 아우님의 능력을 알았으니 아우님이 없을 때 움직여야 하지 않겠나. 하하."
"저와 술 한잔 나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보다 스승님이 자네와 긴히 할 말이 더 많을 것 같아. 자네를 양보하는 것이네. 으하하"
혁련광은 파안대소하더니 놈을 날린다. 모영이 비명을 질렀다. 천둥이도 깜짝 놀라 물러나려 했으나 혁련광은 훨씬 더 빨랐다. 그는 모영을 옆구리에 끼더니 언덕 위를 날아올랐다.
"이 애가 천수진인의 무남독녀라고 했겠다? 그놈 오늘부터 편히 발을 뻗고 자지 못할 것이다. 크하하."
혁련광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고 그의 웃음소리만 메아리쳐 들려왔다.
혁련광이 모영을 잡아갈 거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탈혼수가 죽었을 때부터 모영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굳이 천마의 그런 마음을 방해 놓고 싶지 않았다. 이곳 사람들의 풍류를 내가 방해하면 섭섭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나는 휘파람을 불어 천둥이를 불렀다. 내가 소맷자락을 펄럭이자 천둥이는 알아서 소맷자락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태을진군은 제정신을 수습하느라고 고심 중이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 난잡하게 어질러진 책장과 같았다. 정리정돈을 해야 숨이 트일 것 같은 분위기다.
"자네는 어디서 그런 무위를 얻었는가? 탈혼수를 일장에 절명케 하다니 내 자네와 같은 무위를 가진 자를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했네. 보패 중 으뜸이라는 번천인으로 조차 상처를 내지 못한 탈혼수를···."
디멘션 아크 입자포의 위력에 태을진군은 아직도 놀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강함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강함 위의 강함을 경험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자네는 명문정파의 소속도 아니고 하물며 사파나 마교의 인물도 아니네. 자네는 그 뿔은."
"혁형님이 태을진군님과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더니 이 뿔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이곳은 말을 나누기에 편치 않은 곳이네. 저놈들을 뒤로 물려 주면 어떻겠나?"
태을진군은 아직도 레더 스컬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나는 집중하여 명령했다. 남쪽으로 내려가서 다시는 북쪽으로 올라오지 말라는 생각을 전했다.
과연 탈혼수의 시체에 달라붙어 있는 놈들까지 모조리 남쪽의 구릉을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던 태을진군이 내 어깨를 한 손으로 짚었다.
"자네의 오른발로 내 왼발등을 밟게"
나는 태을진군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 상태에서 태을진군은 하늘 위로 떠올랐다. 순식간에 탈혼수의 몸체가 손바닥만 하게 작아지더니 한 번도 맡아 볼 수 있는 위층의 공기를 폐부로 머금을 수 있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없는 맑고 깨끗한 공기다. 그리고 얼굴 위로 맞바람이 심하게 부딪혔다.
"이것도 보패입니까?"
"풍신화라는 보패일세. 내가 신고 있는 이 신발이 바로 풍신화라네."
더는 이야기 하기 힘들 정도로 맞바람이 거셌다. 바람이 부는 속도와 버금갈 정도의 속도다.
얼마 가지 않아 혁련광의 기척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으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뿔의 공명이 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제까지 그의 기억이 넘어 들어오나 걱정을 했더니 천만다행으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공명이 저절로 꺼지는 모양이었다.
태을진군과 더 대화하고 싶었지만, 맞바람이 너무 강해 입을 벌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날았을까 해는 저물어 가고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벌써 산맥 여러 개는 넘었을 터였다. 저곳을 걸어서 아니 뛰어서 간다고 해도 며칠은 걸릴 거리다.
이 풍신화라는 보패가 무척 탐이 난다. 이것만 있으면 바다를 건너 네크로폴리탄으로 바로 갈 수가 있다. 이 속도면 하루 안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날고 또 날았다.
"밤도 깊었으니 잠시 눈을 붙여도 되네."
"네에? 잠을 자라고요? 이 상태에서요?"
"못할 일이 없지 않은가? 잠이 오면 잠을 자면 되지."
"전 편한 곳에 등이 닿지 않으면 좀처럼 잠을 못 자는 체질이라서."
바람이 불어 더는 말을 하기도 힘들다. 노인장은 정말 대단한 기력을 담고 있다. 악마의 피도 아니고 마인의 존재를 넘어선 어떤 힘이 깃든 사람이란 걸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날이 밝고 태양이 오른편에서 떠오르는 데 정말 장관도 이런 장관이 없다. 하늘 꼭대기에서 보는 일출은 정말 남다른 풍경을 보여 주었다.
쉬지 않고 난 끝에 거대한 산맥에 다다를 수 있었다. 중국의 맥이라 일컫는 곤륜산맥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풍신화의 위력을 새삼 느낄 수 있는 장면이다. 태을진군은 이렇게 먼 길을 쉬지 않고 날아와 악마종을 토벌하고 있었던 거다.
그 덕분에 적건문과 천문파는 악마종의 습격을 받지 낳고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던 거고.
혁련광은 그런 명문 정파를 없애려고 고심 중인데 항상 곤륜선인의 방해를 받고 있다. 사실 혁련광이 독한 마음을 먹고 명문 정파를 공격한다면 곤륜선인과 피의 대결이 일어날 것은 분명하다. 혁련광도 차마 생명의 은인인 태을진군에게만은 검을 들이댈 수 없었던 터로 악마종을 이용해 적건문과 천문파를 괴롭히려 했다.
산맥에 저런 건축물이 있었다니 놀랄 일이다. 산맥의 중심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든 돌로 된 건축물이 눈에 들어왔다. 대단한 위세다. 언노운이 보여 주었던 도교의 사원과 비슷한 형태인데 모조리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 모든 건축물의 하나하나가 다 돌과 석벽으로 되어 있었다.
단 하나의 나무도 사용하지 않은 말 그대로 석으로만 된 건축물이다.
태을진군은 내려서자 이상한 머리 모양의 사람들이 우수수 달려 나와 허리를 굽혔다.
"태을진군님을 뵙습니다."
"손님이 오셨으니 좋은 차를 내어 오너라."
사람들은 내 모습을 보고 기겁을 하며 입을 벙긋벙긋한다. 모두의 시선이 내 뿔에 쏠려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진작에 데빌 폼으로 돌아갈 걸 뿔을 달고 온 것을 후회했다. 나는 즉시 데빌 폼으로 전환했다. 그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태을진군이 한쪽 손을 펼쳤다.
그러자 시종으로 보이는 도인 한 사람이 이상한 총채 같은 것을 태을진군에게 건넸다.
"그것도 보패입니까?"
"하하, 이것은 도진(道珍)이네. 늘 내 손에 잡는 것이라 이놈이 없으면 허전해서 말일세."
태을진군을 따라 한 채의 돌로 만든 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둥그런 탁자와 역시 돌로 만든 의자가 있었다.
"이곳에는 돌뿐입니다. 나무가 하나도 없으니 삭막해 보이는군요?"
"하하, 그 반대일세. 여기는 목의 기운이 너무 강하여 석으로 누르지 않으면 수가 메마르고 화를 불러와 자연의 이치가 흐트러지니 이렇게 돌로 모든 것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거네."
"풍수 같은 건가 보네요. 이곳은 도교를 믿고 있습니까?"
"중국에 관한 공부가 어느 정도 있는 모양일세. 자네 입에서 도교라는 소리가 나올 줄 몰랐네."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태을진군은 내가 중국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내가 모르는 무엇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김이 모락모락하는 전통차가 눈앞에 있었다.
"대접할 것이 이것뿐이라. 이런 곳에는 따로 먹거리가 없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더군요. 공신단이란 것을 만들어 먹는 거 외에 달리 음식 먹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손혁기와는 어떤 사이인가?"
"처음 듣는 분입니다."
"자네는 조선인이 아닌가? 근접한 역사로 따지면 한국과 북조선의 땅이 있는 곳 말일세."
"···."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 자네의 그 뿔은 모두 특징이 있지 같은 뿔은 부모 대가 자식에게 물려 주지 않으면 모양과 형질은 유지 되지 않아."
"호오? 이 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이 뿔을 하는 인간을 두 번째로 봅니다. 아크 데몬이라고 우리 쪽으로 넘어온 놈이 행패를 부린 적이 있습니다. 형편없이 약한 놈이라 제가 처리하기는 했습니다만. 놈이 중국말을 하는 것을 보고 중국 땅에도 살아남은 인류가 있을 것 같아 건너와 봤습니다."
"음, 나는 혁기가 떠날 때 자신의 핏줄을 찾아간다고 하기에 설마 하고 있었더니 살아남은 인류가 또 있을 줄이야. 나는 북조선 땅으로까지 그를 찾아 가본 적이 있긴 하네. 이미 그곳은 악마들이 들끓고 있어 포기하고 돌아왔네. 그 땅은 악마의 땅이라고 아무도 가지 마라. 일러 놓았었네. 중국말을 하는데 뿔이 달린 놈이라? 그놈 몸의 색깔이 붉지 않던가?."
"그렇습니다. 데빌과 같이 살가죽이 붉은 놈이었지요."
"후,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 같군.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주겠네. 우리에게도 골치 아픈 일이니까."
"그런데 손혁기란 사람은 누구죠? 왜 저를 보고 손혁기란 사람의 이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는 정가이고 이름은 동혁입니다."
내가 순순히 이쪽 사람이 아님을 인정한 것은 그의 입에서 진실을 바로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네의 곧은 뿔을 보고 말하는 거네. 그 뿔은 부모의 형질을 물려받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은 형상이지 고로 자네는 손혁기의 아들이라 말하는 거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도대체 이 뿔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저는 세상에 이 뿔을 가진 것은 저뿐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군요. 이것 혹시 악마의 피로 인한 저주가 아닙니까?"
"허허허, 악마의 저주라 틀린 말은 아니네만. 꼭 그렇지는 않다네. 자네는 우리가 누구인지 아시는가?"
"천문파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곤륜산에는 선인들이 살고 그들이 곤륜선인이며 보패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마장기를 가르쳐 살아남을 수 있게 이끈 신선이라고."
"우리는 곤륜에 자리 잡고 있고 그들에게 곤륜선인이라 불리지만 우리의 정확한 명칭은 시안시아이 교단으로 바로 네필림의 자식들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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