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몬스터가 움직이는 소리에 잠이 깼다. 잠결에 이어링을 확인해 보니 전날 처리한 몹이 리젠된 모양이었다.
"3023, 반월륜으로 처리 좀 부탁해."
몸이 아직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더 쉬고 싶었다. 마장기로 인한 데미지는 수복에 시간이 걸린다. 나는 좀 더 자기로 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시간 개념이 없었다. 던전 안이다 보니 주변 환경으로는 시간 추측이 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사십팔 시간 이분 팔초입니다】
이틀을 내리 쉬지 않고 잔 모양이다. 던전이 리셋을 두 번이나 했다. 텐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이템 몇 개가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내가 자는 동안 리젠 몹을 언노운이 처리 한 모양이다.
몸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내상이라고 하는 것도 거의 치유되어 있었고 외상도 깨끗이 아물었다.
커피 한잔을 내리고 음미하면서 담배 한 대를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셈텍스 수리가 먼저인데 이곳처럼 과학력이 나락인 곳에서 사실 셈텍스 수리는 무리라고 판단해야 한다.
다시 걸어서 네크로폴리탄으로 돌아가려면 한 달 정도는 잡아야 한다. 다시 돌아가야 하느냐 아니면 이곳을 더 조사해야 하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간만에 입에 문 담배에 씨름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냥 돌아갈까? 정아나 다른 사람의 걱정이 말이 아닐 텐데."
"3023, 네크로폴리탄에 연락을 취할 방법은 없어? 우주에 떠 있다는 인공위성을 이용하면 가능한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수신 가능한 인공위성을 해킹하기 위해서는 위성 수신 안테나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군. 백 오십 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작동하는 안테나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여. 더욱이 이곳의 과학력은 완전히 퇴보했으니 골치 아파."
담배는 완전히 꽁초가 되어 버렸다. 검지로 꽁초를 튕겨 버렸지만, 담배 한 대를 태울 동안 나는 어떤 결론도 낼 수 없었다.
"어휴, 여유분으로 셈텍스를 가지고 오는 건데. 왜 이리 멍청한 짓을 했을까?"
"3023, 몸 상태는 어때?"
【외상은 완치되었고 마장기에 의한 피해는 70% 정도 수복했습니다. 참고로 마장기를 순환 시키는 방법을 시행하면 한두 시간 이내로 완치 될 수 있습니다】
언노운이 말하는 기의 순환은 공석인이 가르쳐 준 내공심법이라는 것을 말한다. 붉은 기류를 몸 안으로 빨아들이고 단전에 모아 몸 내부의 혈맥을 따라 마장기를 순환하는 방법이다.
이블스 페이스를 쓰지 않아도 마인의 붉은 기류를 완벽히 통제 할 수 있다. 지금도 그 덕분에 데빌 폼을 유지하고 있어도 붉은 기류는 몸 밖으로 뿜어지지 않고 또 세상도 붉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치중했지만, 이들은 정신적인 발전에 치중했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공석인이 가르쳐 주었던 마장기의 운용 방법을 천천히 따라 했다.
정신 집중을 통해 마장기를 제어하여 온몸 구석구석 마장기를 순환시켰다. 이것은 상당한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혼자만의 조용한 공간이 필요한데 몬스터만 없다면 던전 만큼 좋은 장소는 또 없다.
이미 언노운이 주변을 정리했기 때문에 나는 마음 놓고 마장기를 운용법에 집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아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슬슬 마음대로 마장기를 제어할 수 있었다.
기가 막힌 혈은 언노운이 알아서 뚫어 주니 온몸으로 기력이 풍성하게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잠사후 언노운이 마장기에 의한 내상은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알려왔다.
아크 데몬을 조사하려 이곳에 넘어왔지만 아크 데몬 보다 더 한 것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천문파 문주 천수진인의 순수 전투력은 아크 데몬과 비교하여 조금 떨어질지는 몰라도 천수현음금이라는 보패까지 사용하면 아크 데몬을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워낙 환경 변수가 많아서 정확한 계산은 하지 못한다. 사실 신체나 능력 면에서는 아크 데몬 쪽이 높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크 데몬이 사용한 기술이다. 놈도 이곳에서 건너왔다면 분명 마장기를 사용해야 해야 했는데 그때 아크 데몬은 마장기가 아닌 그냥 평범한 홍권을 사용했다.
이것 또한 의문이다. 아크 데몬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중요하고 그들이 천마라고 나를 몰아세우는 것은 내 머리의 뿔을 보고 그런 듯한데···.
문제는 머리에 뿔이 나는 존재가 나 말고도 있다는 이야기고 거기다가 섬뜩한 것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받은 힘이라고 했다. 악마의 피가 흐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나도 솔직히 매우 놀랐다.
천마. 그는 과연 누구일까? 그나마 마교의 사람들이 가장 아크 데몬쪽에 근접해 보이기는 하다. 저번에 만났던 장만은 데몬 프린스의 느낌이 많이 났다. 그의 모습이 데몬 프린스의 축소판처럼 보였다.
마교도 파헤쳐 봐야 할 것 같다. 마음에 걱정이 내려앉는 것이 이들이 우리의 존재를 알고 과학력이 탐이나 무력으로 제압하려 들면 우리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우리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는 일이다.
그리고 이곳의 모든 것을 알아내야 대비할 수 있다.
시작부터 명문정파인 천문파와 완전히 적이 되어 버렸다. 솔직히 원래 생각은 공석인과 주엽비를 구해준 덕을 좀 보면서 천문파와 가까워 지는 것이 일차 목표였다. 가까워지기는커녕 이젠 원수 사이가 되어 버렸으니.
그들은 나를 찾기 위해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놓았을 것이다. 명문정파는 천문파외에도 세 문파가 더 있다.
공석인은 산시성의 천문파. 간쑤성의 적건문, 후베이성의 무당파. 그리고 곤륜산의 곤륜선인파를 사대 문파라 불렀다.
먼저 천문파의 힘을 느껴 보았으니 다른 사대 문파도 천문파와 비슷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대립하는 세력으로 동쪽의 사파라 불리는 녹림당이 있고 남쪽으로 가장 큰 원수처럼 여기는 적마혈교가 있다.
"일을 벌이려면 조금 크게 벌이는 것이 내 적성에 맞아. 정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곳에 좀 더 머물러 봐야겠다. 중국을 완전히 파악하고 난 다음 돌아가도 괜찮겠지."
최종적으로 결심을 굳혔다. 천문파에서 오해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이 있었지만, 천천히 풀어가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지도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둬야겠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이 제일 좋겠지. 솔직히 사람들을 피하려면 악마종이 있는 곳으로 가는 편이 좋긴 한데."
"3023, 이 던전의 레벨은 어느 정도지?"
【몬스터의 능력을 고려할 때 A 레벨 던전입니다】
"옷이 너덜너덜해졌다. 옷이라도 한 벌 마련해야지. 보스 몬스터 위치 잡아줘."
【알겠습니다. 총 세 마리의 보스급 몬스터가 검색되었습니다】
"세 마리? 보통 A레벨 던전에는 두 마리인데 여기는 세 마리인 건가?"
【마지막 라운지의 보스는 조금 특별합니다. 정확한 계산은 되지 않고 추론으로 이 보스는 리젠 확률이 팔백만분의 일입니다】
"뭐? 팔백만분의 일? 이거 봐라. 호기심을 확 자극하네."
A 레벨 던전이라 몬스터는 사냥은 의미 없다. 반월륜으로 휘저어가며 걸어가면 충분했다. 여긴 미로형 던전이다. 잘못 길을 들면 빠져나오기 힘든 던전이다. 미로형 던전에는 레벨이 있는 있는데 이 정도 레벨이면 최상급 미로에 속한다.
몬스터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이 되어도 길을 찾지 못하면 영원히 미로 속을 헤매는 던전이다. 이런 던전은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정신 건강상 좋다.
나는 이미 언노운의 정확한 길 안내로 아무 거리낌 없이 앞으로 나갔다. 이곳에 나오는 몬스터는 대부분 중국풍 몬스터다. 닭을 닮았는데 몸체가 타조만 하고 머리가 두 개인 놈도 있고
상체는 남자 상체인데 하체는 뱀인 몬스터도 있고.
던전 자체가 인간의 사념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이곳 사람들이 생각하는 괴물이나 요괴 따위가 던전의 몬스터로 등장하는 것이다.
첫 번째 보스를 만났다. 거대한 체구에 머리는 돼지 머리고 복부는 얼마나 거대한지 풍선 같은 배불뚝이다. 녀석은 어깨 위에 나무로 만든 거대한 떡 망치를 메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신이 난 듯 달려왔다. 물론 언노운이 그보다 더 빨리 반월륜으로 목을 잘라 버렸지만.
두 번째 보스 몬스터를 만났을 때는 행운력을 높여서 적룡문파복을 한 벌 구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천문파 당주들과 싸울 때 찢어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엘리시움 광석은 나올 때마다 꼬박꼬박 에테르를 흡수했다.
천문파에서 디멘션 아크 입자포 한 방 쏜 것 때문에 에테르 손실이 많았다. 이곳에서 생활하려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에테르를 흡수해 놔야 한다.
"자, 팔백만분의 일이란 놈을 한번 만나 보자."
눈앞에 보스 몬스터의 라운드가 있다. 일단 거대한 석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보자, 부셔서 열어야 하나? 아니면 장치가 되어 있는 건가?"
【정확한 문장을 맞추지 않으면 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강제로 열었을 경우 공간이 왜곡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공간 왜곡? 그게 무슨 말이지?"
【석문 안의 보스 몬스터가 있는 공간 자체가 사라집니다】
"아하, 그러니까. 방법대로 열지 않으면 안에 내용물은 사라진다 이 말이군. 이게 무슨 문장이지?"
【주역에 의한 팔괘의 배열입니다. 올바른 위치를 계산합니다】
석문에는 검은 작대기가 그려진 둥근 돌 원판이 여덟 개 박혀 있었다. 그 여덟 개의 원판에는 팔괘에 해당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검색 완료되었습니다. 먼저 여섯 시 쪽의 문양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려야 합니다."
언노운이 지시하는 대로 팔괘의 문양을 모두 맞추었다. 마지막 돌 원판을 맞추자 석문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은 진동이 울려 나왔다.
석문은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안에서 뜨거운 공기가 훅 뿜어져 나왔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굉장한 열기였다.
데빌 폼인데 이 정도 열기라. 안에 용암이라도 흐르고 있는 걸까? 나는 성큼성큼 걸어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어두웠지만, 사물을 확인하는 데 불편함은 없다. 곧은 길을 따라갔다.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거대한 비석 하나가 길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哮天犬'
비석에는 커다란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는데 효천견이라고 쓰여 있었다.
"뭐지? 으르렁거리는 하늘의 개라고?"
비석을 지나 안으로 더 들어갔고 팔백만분의 일이라는 보스 몬스터가 모습을 보였다.
"효천견이라고 한 이유를 알겠군."
말 그대로 개다. 체고는 내 키의 두 배 정도 되는 것 같고 윤기 나는 검은 털을 가졌다. 어둠 속에서 녀석의 눈빛이 활활 타오르는 듯이 도깨비불처럼 빛났다.
"효천견이라. 이놈이 팔백만분의 일 확률의 보스란 말이지?"
녀석도 나를 발견한 모양새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데 동굴 안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소리가 우렁찼다. 과장 좀 보태면 천수진인의 천수현음금과 비견될 정도다.
둘이 눈이 마주쳤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할 필요 있나? 그냥 서로 달려들었다. A 레벨 던전의 보스 몬스터가 강해 봐야 어느 정도이겠는가?
"3023, 행운력을 높여봐. 녀석이 무얼 드랍하는지 보자고."
【효천견에는 행운력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고정 드랍을 하는 몬스터입니다】
나는 효천견을 향해 달려가면서 언노운의 소리를 들었다.
"고유 드랍이라 이거지. 과연 무엇을 주려고 이러나?"
나는 양손에 마장기를 가득 모으고 쇄심장을 날렸다. 쇄심장의 장력은 대단한 힘이 누적되어 있어 쇄삼장을 맞은 상대가 쇄심장의 파괴력을 견디지 못하면 오장육부가 뱃속에서 다 터져 벌릴 정도로 무서운 장법이다.
효천견은 덩치에 비해 엄청나게 날렵했다. 녀석은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쇄심장을 피해 냈다.
"헐!"
내가 감탄사를 지르는 것은 녀석의 움직임이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아니 멋졌기 때문이다.
지금 내 파워는 재앙급 데빌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다. 물론 아주 집중해서 펼친 것은 아니지만 쇄심장을 피해 낸 것은 대단하다고 봐야 한다. A 레벨 수준의 몬스터가 피할 만한 것이 절대 아니었음에도 말이다.
쇄심장을 멋지게 피한 녀석은 곧장 달려들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시커먼 덩치는 상당히 멋졌다. 반월륜으로 토막 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녀석이었다.
녀석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훤히 보일 만큼 가까워졌을 때 나는 녀석의 위턱과 아래턱을 양손으로 덥석 움켜잡았다.
"이놈 내가 이래 봬도 데빌에 버금가는 힘이다. 너 하나 못 막을 거 같으냐?"
효천견이 주둥이를 다물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힘껏 벌렸다.
"어라?"
녀석은 주둥이를 위로 치켜들어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이놈 이거 A 레벨 몬스터가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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