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의 터줏대감
"잠깐만 모두 물러나 있어 보겠습니까? 확인할 게 있어서요."
나는 녀석이 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강희찬 일행은 천천히 내 뒤를 따라 왔다. 녀석은 빠른 속도로 다가왔는데 산등성이 너머로 놈이 모습을 보였다.
조금 전과 같은 이블 워리어다. 똑같은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악마의 두상 생김새가 조금 달랐다. 아마도 녀석들은 각자 개성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사람이 다 다르게 생긴 것처럼.
우리를 발견한 놈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놈의 정면으로 다가갔다. 놈과의 거리가 좁혀졌지만, 공격은 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놈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놈의 발이 내 바로 옆자리를 찍으면서 지나갔지만, 공격은 아예 없었다. 바로 이거다. 악마종은 나를 절대 공격하지 않는 것이 다시 확인되었다.
강희찬은 고함을 치며 놈을 맞이했다. 나는 이블 워리어의 등을 향해 반월륜을 날렸다.
희찬의 앞으로 떨어진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 내려갔다. 그는 굴러오는 머리통을 낚아채더니 망설임 없이 혈액 응고제를 듬뿍 발랐다.
"어떻게 된 겁니까?"
"보시다시피. 레더 스컬도 그렇고 세슬로이드, 이놈 이블 워리어도 저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신기하네요. 회장님을 아예 못 본 척하고 지나칠 때는 소름 돋았습니다."
정찬우는 이블 워리어의 몸뚱이를 수습하면서 말했다.
"이놈 아까처럼 무식하게 강한 놈 맞는 거죠?"
강희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도."
"회장님이 너무 하시니까 이놈이 강한지 실감이 안가서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딴 세상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말했을 때 너희들은 반신반의했었잖아. 이제 믿을 수 있겠지? 데빌도 쪽을 못 쓰고 회장님의 주먹에 떡이 됐다니까."
"마인이 아닌데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이 정도까지 강해 질 수 있는 겁니까? 놈들이 왜 회장님을 공격하지 않을까요? 회장님의 강함을 알아보고 상대가 안 될 것 같으니까 아예 공격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아뇨, 악마종만 그래요. 일반 필드 몬스터나 던전에서는 예외 없이 공격합니다. 하지만 유독 이 악마종만 나를 마치 못 본 척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그럼 회장님은 악마종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닐지."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혹시 동료로 여기고 있는 거 아닙니까? 하하"
강희찬의 말에 순간 소름이 쭉 올라왔다.
"농담이라도 섬뜩한 말은 하지 마세요. 하. 순간 당황했습니다."
"그나저나 이놈들 대단합니다. 대장장이들이 춤이라도 출 것 같은데요? 이런 양질의 재료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걸 겁니다."
"금강산이란 곳에 터줏대감을 포함해 여덟 마리가 더 있습니다."
"후하. 회장님은 그런 것까지 다 파악하고 계시네요. 회장님 같은 사람만 있으면 사냥은 그냥 노났습니다. 공격도 하지 않는데 그냥 쓸어 담으면 되는 수준이잖아요."
"하하, 그러게 저도 왜 공격하지 않은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강희찬은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럼 온 김에 그 여덟 마리 몽땅 잡고 갑시다. 회장님."
"그럴까요? 저도 어려운 걸음 했으니 싹쓸이하고 갑시다. 대신 터줏대감으로 검 하나는 만들어 주실 거죠?"
"당연하죠. 어차피 회장님이 다 때려잡으시는데 김철 아저씨한테 특별히 부탁해 놓겠습니다. 그분이 연합 최고의 대장장이시죠."
"그럼 제가 길잡이를 하겠습니다. 여덟 마리 모두 때려잡죠."
지도를 보면서 노선을 잡았다. 지나가는 길에 덤벼드는 세슬로이드와 레더 스컬은 희찬 일행이 때려잡았다.
"어라? 저놈들이 왜 여기로 왔지?"
희찬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몬스터 몇 마리를 바라봤다. 놈들은 레서 데몬으로 보였다. 이곳은 침습이 이루어진 땅으로 악마종 외에 다른 몬스터는 거의 없다. 필드 몬스터는 악마종을 피하려는 습성이 있으므로 근처에도 오지 않는다.
"잠깐만요. 레서 데몬이니까 저놈들 반응을 한번 보죠."
아가문드를 뽑아 들고 레서 데몬이 쪽으로 움직였다. 역시 생각대로 레서 데몬은 흉측한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아가문드로 놈들을 양단 냈다. 집중하면 놈들의 움직임이 슬로 모션으로 비칠 지경이었다.
어디가 약한 곳인지 공격 동선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그 개체에 대한 정보가 한눈에 파악이 됐다. 아가문드는 매섭게 움직였고 레서 데몬을 차례차례 베어 넘겼다.
"얼래, 진짜로 악마종만 덤비지 않는군요. 레서 데몬은 회장님을 공격하는데···."
"그것 봐요. 이상하죠? 레서 데몬은 저를 공격하잖아요. 악마종만 그러네요. 왜 그런지 저도 알 수가 없네요."
강희찬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그놈들 아예 회장님만 노리는 것 같은데요?"
정찬우도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그놈들 회장님만 노리고 달려드는 거 아닙니까?"
"희한하네. 악마종은 회장님을 무시하고 일반 몬스터는 회장님만 공격하고."
강희찬은 마지막 레서 데몬을 베어버리며 말했다.
"그것 보면 왜 데빌 같이 강한 놈이 내려오면 주위 필드 몬스터가 반응에 이끌려 모여들죠. 스파이더 윕이나 스크리머 같은 필드 몬스터가 데빌 같이 엄청난 놈이 나타나면 그 주변으로 이끌림이 있다고나 할까? 지금 레서 데몬도 회장님 주변으로 모여드는 것 같은데요? 특히 이상한 것이 이쪽 세계로 레서 데몬이 건너온 적이 거의 없거든요."
정찬우는 나를 신기한 듯 바라봤다.
"회장님 정말 인간 맞으시죠? 혹시 악마가 변신한 건 아닐 테죠? 그 가면은 왜 쓰고 계신 겁니까? 그 악마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진짜 악마로 보이잖아요."
"이건 전투할 때 편해서 쓰는 겁니다. 다른 이유는 없어요."
이들은 이블 페이스를 쓰면 마인 특유의 붉은 기류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마인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궁금증은 뒤로 한 채 사냥은 계속됐다. 터줏대감이 있는 곳을 중심점으로 잡고 반원을 그리면서 이블 워리어를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 싸울 필요도 없는 것이 내가 나서 반월륜만 날리면 그만이었다.
레더 스컬과 세슬로이드만 희찬 일행이 처리하고 이블 워리어만 내가 잡는 식으로 해서 날이 저물 때까지 다섯 마리의 이블 워리어를 처리했다.
날이 저물어 야영지를 차렸다. 야영지는 우리 쪽 세계에 차려졌다. 아무래도 공기의 무게가 다르므로 우리 세계에서 잠을 자야 푹 잘 수 있다. 미리 주변 몬스터는 희찬 일행이 다 처리해 놓았다.
사냥 후의 저녁은 정말 꿀맛이었다. 산속에서 이런 진수성찬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함 그 자체였다.
"회장님은 정말 놀라운 사람입니다. 저는 에덴의 사람들이 회장님과 비슷한 능력을 갖췄는가 하여 매우 놀랐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에덴에서 가장 강하다는 사람도 평범한 노멀 마인의 전투력 수준입니다. 저만 비정상적이라."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만약 회장님 같은 사람이 있다면 네크로폴리탄 정도는 우습게 정복해 버릴 것 아닙니까?"
"하하, 설마요. 사람이 같은 사람을 왜 죽입니까? 세상에 널린 것이 몬스터고 악마인데."
"거참 오늘 온종일 회장님과 같이 있었는데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악마종이 왜 회장님을 공격하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뭐 풀리는 않은 수수께끼를 가지고 자꾸 이야기 꺼내봤자 답이 없잖아. 일찍 쉬자고 내일은 터줏대감을 잡아야 하니까. 이거 일주일 계획하고 나왔는데 사흘 정도면 끝나겠어."
사냥인지 처리인지 분간이 안 간다. 희찬 일행은 숨어 있고 내가 다가서도 이블 워리어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반월륜이 번쩍이며 머리통이 구르면 숨어 있던 희찬 일행이 처리하러 달려 나오는 것뿐.
수월하게 이블 워리어를 처리하는 것에 희찬 일행도 맛이 들인 듯하다. 그리고 내가 처리하는 이블 워리어는 이블 워리어 중에서 우두머리격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았다. 실제로 평범한 이블 워리어도 만났으니까. 생긴 것이 세슬로이드와 비슷했다. 능력, 덩치 모든 것이 세슬로이드 상위버전 몬스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가 언노운에게 금강산에서 가장 강한 놈 서열대로 열 마리 표시해 달라고 했다는 것을 깜빡했다. 이블 워리어 중에서 가장 강한 아홉 놈을 다 잡았다. 사흘째 되는 날 마지막으로 터줏대감을 남겨 놓고 있었다.
금강산도 별거 없네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비정상적으로 강한데다 악마종은 나를 공격하지 않으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강희찬 일행만 이곳에 왔다면 금강산 입구 근처에서 세슬로이드 몇 마리 정도 사냥하다 끝났을 것이다.
"쉿, 조용히 하세요. 이제 근처입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세상 편리하네요. 회장님하고 다니니까 몬스터 어디 어디 딱딱 박혀 있는지 다 알고"
"저기 계곡 아래쪽입니다. 이놈은 이블 워리어가 아닙니까? 왜 우리 세계에 와 있는 거죠?"
"터줏대감은 이블 워리어도 아니고 세슬로이드 계열도 아닙니다. 그리고 놈은 원래 우리 쪽 세계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정글처럼 울창한 수풀 한가운데 있는 계곡 물소리도 들리는 곳이다.
마지막 남은 붉은 점등이 있는 곳으로 접근하는 중이다. 점등이 틀리지 않는다면 놈이 터줏대감이다.
계곡 아래로 이동한 우리는 시원한 초록색의 향연에 잠시 젖어 들었다.
"경사와 지형이 좋지 않아요. 이런 곳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고역이겠는데요?"
"녀석이 만약 악마종 계열이라면 회장님을 공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쉬운 먹잇감이죠."
"일단 한번 가 봅시다. 저도 놈이 악마종이라면 좋겠습니다."
계곡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붉은 점등은 가까이 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희찬 일행은 몸을 숨기고 있고 나 혼자 붉은 점등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곧 끔찍한 동굴 입구를 발견했다.
"그곳이 놈의 은신처일 수도 있겠네요. 안에 있는 것이 확실합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점등의 위치상 동굴 안이 확실했다.
"같이 들어갈까요?"
"아뇨, 저 혼자 들어가 보겠습니다. 놈이 악마종이라면 공격하지 않을 테니까요."
동굴은 상당히 넓고 컸다. 푸른 이끼와 오랜 세월의 느낌상 자연 동굴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아가문드를 손에 들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터줏대감이라는 별호에 맞게 혼자 사는 놈일 확률이 높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자 눈앞이 확 좁혀지면서 시커먼 어둠 속에 묻혔다. 언노운이 눈동자의 빛 조절을 최대로 하여 어둠에 금세 익숙해졌다.
동굴은 그리 깊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 붉은 점등이 있었기에 나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접근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번쩍 이는 두 개의 불빛을 봤다.
나는 그 불덩이 같은 두 개의 불이 놈의 두 눈에서 쏟아지는 안광이란 걸 알아차렸다. 놈의 두 눈에서 도깨비불 같은 안광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놈은 확실히 나를 인지하고 들어서는 모습도 봤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놈의 모습이 보였는데 엄청난 키 때문에 동굴 안에서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희찬의 설명대로 얼굴은 악마도 아닌 세슬로이드도 아닌 정말 희한한 생김새였다.
도깨비 딱 그 모습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희찬의 말대로 금강산 터줏대감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이블 워리어의 우두머리격보다 약간 더 강할 정도일까? 그런 느낌이다.
놈은 나를 인식한 것 같았지만 움직이지 않고 있다. 역시 악마종이라서 나를 공격하지 않는 걸까? 반월륜을 꺼내 놈을 향해 날렸다. 어차피 이블 워리어 우두머리보다 약간 더 강할 정도니까.
두 개의 불빛이 순간 일렁거렸다. 목을 향해 날리긴 했지만, 어두웠기에 반월륜이 놈의 어디를 베었는지 잘 몰랐다.
불빛이 나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다. 이건 적어도 나를 향한 적대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런 좁은 곳에서 놈과의 전투는 불리하다고 느끼고 동굴 밖으로 뛰었다. 동굴은 깊지 않으니 금방 밖으로 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막 동굴 밖으로 벗어나 상체를 일으키는 터줏대감을 봤다. 확실히 거대한 놈이다. 녀석이 큰 고함을 지르니 주변 계곡이 쩌렁쩌렁 울렸다.
숨어 있던 강희찬 일행도 뛰어나왔다. 터줏대감이 나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이놈은 회장님을 공격하는군요."
"주의를 끌어라. 지형이 까다로워 조심해."
나는 정확히 놈의 목을 향해 반월륜을 날렸다. 이블 워리어의 우두머리도 간단하게 베어 버리는 위력이다.
-캉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뭔가 엄청나게 단단한 것에 부딪히는 소리다. 터줏대감의 손바닥에서 뭔가 튀어나와 반월륜을 쳐냈다. 손바닥에 튀어나온 것은 코끼리의 상아처럼 길쭉한 원뿔 모양이었는데 나는 곧 그것이 뼈라는 것을 알았다.
"뭐냐? 저놈 저런 기술을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강희찬은 놀라 소리쳤다. 일행은 일제히 터줏대감을 향해 아가문드를 날렸다. 하지만 터줏대감의 가죽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이놈 뭔가 다르다! 예전의 터줏대감이 아니야."
"이 정도는 아니었잖습니까? 뭔가 이상합니다."
나는 희찬 일행의 반응을 보고 그들이 만났던 터줏대감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손바닥에서 솟은 송곳 같은 뼈를 무기처럼 휘둘렀다. 김현철은 방패로 감히 막아낼 엄두조차 못 내고 뒤로 물러났다.
악마종인가? 그렇지 않은가? 언노운에게 반월륜의 제어를 맡기고 아가문드를 쥔 손에 역장 에너지를 올렸다. 주변 땅거죽이 완전히 들고 일어났다. 동굴 입구는 무너질 듯 흙더미를 쏟아 냈고 주변 수풀은 초토화되었다.
희찬 일행은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속 뒤로 물러났다.
새하얀 원뿔이 정찬우에게 날아들 때 나는 기합을 지르며 스페이스 커터를 날렸다.
삭둑 잘린 왼팔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됐다."
희찬이 환호성을 질렀는데 그 순간 떨어진 팔과 잘린 부분에서 핏줄기가 이어지더니 단번에 잘린 팔을 끌어 올렸다. 순식간에 붙어 버린 팔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불과 수초 만에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제길 귀찮게 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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