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실체
의식은 분명히 나의 의식이지만 몸은 내 몸이 아닌 것처럼 통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신체 통제권이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어링도 먹통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이 다운되어 버렸다. 반월륜도 반응이 없었다. 몸은 점점 동심원의 중심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휙휙 지나가는 주변의 환경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올 만큼 의식은 완벽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구심점의 그 무엇이 힐긋힐긋 보이기 시작했다.
'여인?'
몸과 시선이 계속 돌고 있었기에 한 화면만 잡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얀 드레스 같은 것을 언뜻 본 것도 같고 무엇보다 긴 생머리가 보인 것도 같다. 그리고 그 의구심은 점점 확신으로 다가왔다.
아름답다. 처음 느낀 생각과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온 것은 아름다움을 넘어 치명적인 정숙함이었다. 날개옷같이 매우 얇은 하얀 천은 바람에 나풀거리기라도 하는 듯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그녀는 바위 위에 앉아 있었는데 새하얀 피부의 가는 다리와 엉덩이까지 길게 내려온 찰랑거리는 흑발은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옆선의 모습과 더불어 전율적인 충격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나는 빙빙 도는 시선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녀를 좀 더 바라보고 싶은 욕구가 치솟아 올랐다.
그녀의 얼굴은 정면이 아닌 옆 얼굴선만 보였는데 그것마저 가학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내 평생 봐왔던 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답고 성스럽고 정숙한 모습이었다. 가슴이 확 부풀어 오르고 머리가 멍해지는 충격을 느꼈다. 그녀를 볼 때마다 정신이 조여 지는 압박감을 받았다.
추잡한 생각은 단 한 올도 없었다. 마치 어머니 같은 위대하고 거대한 존재감 앞에 한없이 나약해지는 것 같았다. 오만가지 감정이 뒤죽박죽되어 나 자진의 존재를 잊어버릴 정도였다.
몸을 아무리 비틀고 용을 써도 무엇에 메인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이곳은 죽음의 계곡이고 악마의 하수인인 세슬로이드가 가득한 지역이다.
그런 곳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지금 생각난 것이지만 천사가 강림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라고 호칭하기에도 부담이 되는 그 여인은 고즈넉한 시선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피부가 너무나 깨끗하고 잡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손과 발 몸체 그 어디 하나 빼놓지 않고 인간과 완벽히 일치했다.
하늘하늘하는 흰빛의 날개옷은 펄펄 거리며 나부끼듯 춤을 춘다. 나는 회전을 하면서 계속 그녀의 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시야가 넓혀지고 세슬로이드의 틈이 벌어 지면서 그녀의 모습을 좀 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것은 바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세슬로이드의 시체가 쌓여 만들어진 시체의 무덤이었다. 그녀가 디딘 바닥은 세슬로이드의 시체로 가득했다. 지옥의 악귀는 모두 눈을 까뒤집은 체 마구잡이로 쓰러져 있었다.
동심원의 구심점은 그녀였고 그 주위를 맴돌던 세슬로이드는 픽픽 스러져 쌓여 갔다. 나는 필사적으로 이곳을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움직이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이건 내 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닭았다.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환상적인 성스러움 속에서 이율배반적으로 죽음의 공포도 함께 느꼈다.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심정이었다. 깊고 깊은 심연으로 계속 빨려 내려가는 공포에 숨이 막혀왔다.
그녀의 근처로 다가갔던 세슬로이드는 온몸을 몇 차례 부르르 떨더니 그녀의 앞뒤로 마구 쓰러졌다. 그녀의 주변으로 세슬로이드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갔다.
이 이상한 소용돌이의 구심점은 그녀가 분명했고 그녀의 주변으로 세슬로이드가 계속 죽어 나가는데 나도 그 죽음의 행렬 틈바구니 끼어 꼼짝없이 휩쓸려 갔다.
'안돼.'
비명도 목말라 버렸고 바둥거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정말 그 순간에 모든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내가 가진 모든 스킬이 무용지물이었다. 그 어떤 스킬도 반응하지 않았다. 세슬로이드도 나와 같은 현상에 휩싸인 것일 거다. 놈들처럼 차례차례 죽음의 굴레 속으로 떨어지길 기다려야 하나? 놈들은 진짜 죽은 것일까? 시체처럼 쌓인 세슬로이드를 볼 때 확실히 그들의 몸에서 이미 생명이 빠져나갔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동심원이 계속 회전할수록 그녀와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져 갔고 더욱 확실히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고혹적이고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눈이 아파 그녀를 정면으로 바라보기조차 힘들었다. 눈을 감고 싶어도 감기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알아챘다. 그 치명적인 아름다움 속에 죽음의 올가미가 가득 들어 있었다. 차가움. 소용돌이에 휘감기고 난 뒤 모든 감각을 잃어버렸지만, 지금 나는 시리도록 차가운 감각만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몸이 차가운 것이 아니라 영혼이 차갑게 식어 가는 느낌이었다.
'안돼'
나는 눈을 부릅뜨고 차가움에 대해 반항했다. 이대로 죽을 수가 없어. 안되라고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내 앞에 있던 세슬로이드가 부르르 몸을 떨더니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지금까지 느껴본 공포 중에서 최상급에 해당하는 공포를 느꼈다.
'죽는다.'
머릿속을 맴도는 압박감. 시리도록 차가운 느낌은 영혼까지 얼려 버릴 듯했다.
그때였다. 그 여인이 나를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나는 드디어 그 여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되었는데 너무나 찬란한 빛이 그녀의 얼굴에서 뿜어졌다. 눈을 감고 싶은데 감기지 않았다.
'끝인가?'
나는 성스럽고 찬란한 위엄을 느꼈다. 그것은 감히 거스르지 못할 절대적인 힘이었다.
내 몸은 공중으로 붕 떠올라 천천히 그녀의 무릎 위로 눕혀졌다.
감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새하얀 손길이 내 머리 위를 넘나들었다. 그녀는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그녀의 머리에 장식된 장식물을 볼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머리 장식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장식물이 아니라 뿔이었다. 양 이마 끝에서 솟아 나온 뿔은 화관처럼 그녀의 머리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엄청난 마력을 담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내 영혼이 모조리 빨려 나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가느다란 팔로 천천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악기를 연주하듯 그녀는 섬세하게 움직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냄새구나."
'말?'
그녀가 말을 한 것인가? 내 귀에 똑똑히 들려온 목소리는 인간의 톤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그녀가 낸 목소리가 아닌 줄 알았다. 그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위엄과 정신을 흔들어 버리는 충격파가 담겨 있었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야."
그녀가 머리를 쓰다듬을 때마다 이상하게 편안하고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어머니의 품속처럼 아늑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발점으로 서서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동혁아!"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억?"
눈에 비친 것은 잔뜩 걱정스러운 눈빛을 띠고 있는 이현희였다.
나는 재빨리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는 세슬로이드의 시체가 가득했다.
"3023, 응답해."
【외부 간섭으로 인해 기능 정지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저도 그게 글쎄."
나는 내 몸을 살폈다. 모든 것이 이상 없었다. 언노운도 응답했고 반월륜도 꺼내 보았다. 이전과 같이 내 몸은 완벽했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하지만 주변 가득 널려 있는 세슬로이드의 시체를 보면 결코 그것이 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박현은 주변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세슬로이드 수백 마리가 떼 몰살했는데요?"
나는 잠시 생각을 추스르다 이현희에게 이상한 여인을 만났던 이야기했다.
동심원처럼 돌아가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꼼짝없이 몸의 통제권을 잃었고 그녀 근처로 가던 세슬로이드가 죽어 나갔던 것이며 그녀가 자신을 무릎 위에 눕혔는데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 잠이 들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 말을 다 듣고 이현희는 몹시도 심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이상 있는 곳은 없고?"
나는 일어나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고 스킬을 발동시켜 보았다.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이현희는 널브러진 세슬로이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은 재료 챙겨라. 완전히 거저먹었군."
박현 일행이 세슬로이드를 수습하는 동안 이현희와 함께 대화를 이어갔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어휴,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벌렁벌렁합니다."
"그 여인은 누굴까? 어떻게 세슬로이드를 이렇게 학살할 수가 있지?"
"정말 성스러운 기운을 느꼈습니다. 단 한 번도 이런 감정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뭐랄까 범접하지 못할 느낌일까. 마치 신을 영접한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인간이 확실한 거냐?"
"정말 아름다운 미의 극치였습니다. 생긴 것은 우리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모탈 시티에는 몇 명의 외국인이 있는데 그들과 같은 외국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아 참, 머리에 화관처럼 생긴 뿔이 있었어요. 그걸 보면 인간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 뿔 이외는 모든 것이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입고 있던 옷도 그렇고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은 확실해요."
"음, 뿔이라. 그리고 세슬로이드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라. 넌 고차원적인 존재를 만났을지도 몰라."
"고차원적인 존재요?"
"그래, 우리가 갓 레벨이라 부르는 것들."
"갓 레벨!"
나는 한동안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저기 하우레스 라인의 하우레스도 갓 레벨이라고 하셨죠? 제가 본 것이 정말 그런 종류였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저만 살려 놓은 거죠?"
"난들 아나. 세슬로이드는 물론 너마저 그런 식으로 다뤘다면 갓 레벨이 아니면 불가능해서 그렇다고 해본 거야."
"아니 그런 신들이 이런 곳에 왜 돌아다닙니까? 진짜 그녀가 갓 레벨의 괴물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네크로폴리탄 정도는 우습게 멸망 시킬 것이 아닙니까?"
"나도 몰라 여하튼 분위기 좋지 않으니 이대로 철수해야겠다. 세슬로이드도 엄청나게 얻었으니 여기에 머물 이유도 없어."
박현 일행이 세슬로이드를 모두 수습하자 숲을 되돌아 나오기 시작했다. 분에 넘치게 세슬로이드의 시체를 얻었으니 더는 이곳에 머물 이유가 없었다.
"3023, 왜 기능이 정지한 것이지?"
【현재 분석 중입니다】
이곳은 정말 괴상하다. 레더스컬과 세슬로이드가 나를 공격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왜 나를 공격 대상으로 삼지 않을까? 그들은 나를 자기들 동료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이현희에게 물어보니 심지어 레더스컬과 세슬로이드가 만나면 서로 간 싸움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도 두 종 모두 나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유달리 악마 종만이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우리를 강기슭으로 와서 배를 타고 다시 강을 건넜다. 나는 멀어져 가는 죽음의 계곡을 보면서 자꾸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갓 레벨의 신이었을까? 그녀는 왜 세슬로이드를 죽였을까? 그리고 왜 나를 살려 두었지? 미칠 노릇이군. 저런 갓 레벨이 네크로폴리탄 지척에서 돌아다니고 있는데. 만약 저런 괴물이 이곳을 습격하면? 누가 상대할 수 있을까?"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한동안 그녀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자치령에 돌아와서도 멍한 기분이었다.
이현희는 보고하러 갔고 박현 등은 곧장 남대문 제철소로 갔다. 나는 지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다 이모탈 시티로 건너왔다.
며칠 자리를 비웠기에 유철환 비서로부터 간단한 보고를 받고 40층으로 올라왔다.
"얼굴이 왜 그래? 당신 얼굴 굳은 것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네."
"그래 보여?"
"요즘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야? 마인들 세계에 너무 빠져 있어. 당신은 슈퍼맨이 아니야. 조금은 쉬어 가면서 해."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 내가 요즘 무리를 했나 봐."
나는 박정아에게 팔베개를 베어 주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다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그녀가 공포의 악마로 변해 나를 미친 듯이 쫓아 왔고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다. 나는 모든 기술을 그녀에게 퍼부었으나 그녀의 나풀거리는 옷자락 하나 베어내지 못했다. 인간이 아닌 신과 싸우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나는 그 공포를 확실히 느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내 목을 움켜쥐었다. 나는 숨을 쉬지 못해 발버둥 쳤다. 그녀의 손아귀가 점점 조여 오면서 나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살려 달라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나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는데 온몸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내가 갑작스럽게 움직이는 바람에 덩달아 일어난 정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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