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1)
어디를 가도 어수선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이 많은 회장에서 하루아침에 새파란 젊은 회장으로 바뀌었으니 그 불안감은 말 안 해도 이해가 간다.
삼대 길드는 정현규 형제와 차성철의 재판을 빠르게 처리했다. 세 명의 판결은 사형.
그런 초강수를 둔 것도 시민들의 불안을 잠재우려는 조치였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오래 끌고 가면 자칫 기본 뿌리부터 흔들릴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마인에 대한 불안감, 불사의 회람 길드 운영의 불투명성이 대두되어 헌터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아니, 지금 가장 중요한 시점인데 왜 일을 미루려 하시는지?"
은발의 신사 부회장 김상열은 나를 보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먼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성철 회장의 유언장에 의한 회장이 아니라 불사의 회람 모두가 인정하는 회장이 되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래도 회장직임을 내려놓겠다는 말은 공석으로 비워 두시려 하는 겁니까?"
"부회장님은 불사의 회람에 얼마나 몸담았습니까?"
"젊었을 때부터 정성철 회장과 함께했으니 50년이 넘었습니다."
"부회장님은 불사의 회람의 모든 역사와 함께 한 분입니다. 일각에서는 부회장님이야말로 차기 회장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저는 그럴 재목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회장님이 나이는 어려도 그 재질이 확실히 돋보이는 분입니다."
"당분간 부회장님이 대리 회장역을 맡아 주셔야 하겠습니다. 이건 저의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제가 불사의 회람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것을 정리 할 때까지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장 정동혁 회장이 얼굴을 비치는 것보다 연륜이 보이는 부회장님이 훨씬 모양새가 좋습니다."
박동훈 사장까지 나의 말에 동의하자 김상열 부회장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회장님께서 하시겠다는 일을 완결 지을 때까지 제가 임시로 업무를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나 회장의 명함만은 받지 않겠습니다. 회장 명함은 정성철 회장의 유언대로 정동혁 회장으로 명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시간은 초개와 같이 지나갔다.
1월 1일 헌터 아카데미 100기 졸업식이 있었다. 아마 100기에서 배출한 헌터 중 탑 오브 더 탑은 당연히 내가 되었다. 아마도 헌터 아카데미 사상 최고의 인물로 남을 테지.
F급으로 그것도 정크 보이 출신으로 입교하여 졸업할 때는 S 레벨 헌터에 불사의 회람 회장이 되었으니 이보다 더 역동적인 삶을 보여준 인물이 있을까 한다.
졸업생 대표로 강단에 설 때는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를 받아야 했다. 100기의 헌터들 중 나를 인간으로 취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나를 반신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 내가 그들에게 보여준 것은 특별하다는 이야기다. 100기 중 최고의 인물로 선정되었고 나에 대한 소문은 아마도 헌터 아카데미 몇 대를 이어 나가게 될 것이다.
나는 룸메이트 경수를 보고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는데 녀석은 다리를 후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지독한 겨울이 기승을 부릴 때쯤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세상은 바쁘다. 누군가 세상을 한번 흔들어 놓았지만 이모탈 시티의 삶은 시계의 초침이 움직이는 것처럼 또다시 흘러갔다.
과거의 일을 금세 잊히기 마련이다. 새로운 삶을 고민하기 위해 어제 일은 그렇게 잊히고 있었다.
"정말, 이게 얼마 만이예요? 얼굴 잊어버리는 줄 알았어요."
박수정은 나를 보며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떴다.
"정말 저녁 한 끼 같이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어요. 하지만 마인 사건 때문에 오고 싶어도 오지 못했죠."
"이거 이제 유명인이 되었지 않은가? 불사의 회람 회장님이라고 불러야 하겠어. 허허."
박엘리엄은 불룩 튀어나온 배를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수정이 음식 솜씨가 너무 그리웠습니다. 먹고 싶은 음식의 재료를 마구 담다 보니 이렇게 많아졌습니다. 하하."
"오늘은 실력을 발휘해 봐야겠군요. 호호. 그럼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전 요리를 하겠습니다."
나는 엘리엄과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따뜻한 커피잔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속에는 구수한 커피 향이 가득 담겨 있었다.
"동혁군은 생각보다 뛰어난 인재였군. 아니 이젠 회장님이라 불러야 하는가?"
"편하게 대하십시오. 아직 정식 회장도 아닙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어서 고맙네."
"그동안 다른 일은 없었습니까? 연합은 이모탈 시티에서 입지가 아주 작아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연합은 큰 걱정을 하고 있네. 불사의 회람과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것이 모두 무너졌어. 그들은 다시 일을 꾸미려 할걸세. 그들은 셈텍스에 목메어 하지"
"이동형 게이트 장치를 말하는군요."
"그건 네크로폴리탄에서 만들 수 없는 물건이니까. 마인의 과학력은 이모탈 시티의 반도 안 돼. 그래서 셈텍스는 절실한 물건이지."
"셈텍스가 없으면 인간을 네크로폴리탄으로 수입할 수 없으니까요."
"그것이 가장 핵심이지. 마인은 수가 계속 줄고 있어. 인구 유지를 위해서 새로운 피의 수혈이 급한 것이지."
"제가 그걸 제재하기 시작하면 전면전도 불사할 겁니다. 다른 삼대 길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불사의 회람이 마인과 내통하고 있는걸 지켜보기만 한 겁니다. 어쩌면 그들은 불사의 회람이 마인과의 평화적인 관계를 끌어내기를 바랐는지도 모르죠."
"내가 한때는 그들의 연락책이었다는 걸 자네도 알고 있겠지? 나는 무수한 인간들을 네크로폴리탄으로 보냈어. 그들은 대부분 살처분되었을 거야."
"그 죄책감으로 정무 인권 위원회에 몸담은 겁니까?"
"그런지도 모르지. 하지만 네크로폴리탄은 끊임없이 이곳을 찾아 왔어. 지금 연합의 구심점이 무너진 이상 그들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네."
"제가 오늘 여기 방문한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저번처럼 상이고람과 문정이란 마인이 올지도 모르죠."
"그 사람들은 이미 다녀갔네. 이번에도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내 의지는 확고하네."
"연합의 마인이 원하는 것은 엘리엄이 아니죠?"
"응? 무슨 소리인가?"
"수정이 말인데요."
"응? 수정이가 왜?"
"그녀 말입니다. 제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해서요."
"무엇을 말인가? 수정이니 내 딸이고···."
"그것이 아니라 수정인 만들어진 마인이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마인이었지 않습니까?"
엘리엄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탁자 위에 떨어뜨리듯이 내려놓았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저는 남들이 모르는 능력이 조금 있습니다. 그녀는 뭔가 특별한 존재인 것 같았거든요."
"그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고 딸 아이를 지킬 생각이야."
"감당하기 힘든 일이 벌어지면 언제든 저를 부르세요. 제 능력이면 두 사람을 도우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을 테니까요."
"든든한 우군을 얻게 되어 기쁘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수정이를 보호해주겠다고 맹세 할 수 있겠나?"
"맹세뿐이겠습니까? 그녀는 제 가족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안전은 제가 책임지고 지키겠습니다."
"자네라면 수정이를 믿고 맡길 수 있겠어."
"대신 누가 찾아오든지 간에 저에게 연락을 주십시오. 전 연합도 배제하지 않으려 하고 있으니까요."
"자네는 연합인가? 자치령인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 합니다. 정상적인 마인을 무조건 악으로 칭할 게 아니라 현명하게 대처하면 그들과 공생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참 반가운 소리일세. 자네가 불사의 회람 회장이 되었다는 것은 이모탈 시티에 큰 복이나 다름없어. 나는 여기서 자네의 행보를 지켜보겠네. 자네의 걸음걸음에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라네."
"두 분 오래 기다리셨어요. 식사가 다 됐습니다."
"수정이 요리를 이놈의 혀가 잊어버렸는지 모르겠네. 오늘은 배가 터질 때까지 먹어 볼까?"
"흥, 맛없다고 투정이나 부리지 마세요."
이들 부녀와의 식사는 오랜만이다. 나에게 가족이라는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자리였다.
출근과 동시에 보고서가 탁자 위에 차곡히 쌓여 있었다. 김상열 부회장이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지만, 결제는 무조건 내 손을 거쳐야 한다 하기에 이런 일이 일과가 되어 버렸다.
서류 처리는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물론 내가 일일이 검토하지 않는다. 검토하는 것은 언노운이다.
나는 차근차근 불사의 회람을 안정 궤도로 올려놓았다.
그 첫 번째 계획으로 대단지 자생 엘리시움 광석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부사장이 된 최우신이 잘 뛰어줘서 그럴싸한 장소가 마련되었다. 나는 이모탈 시티의 모든 엘리시움 정제소를 뛰어다니며 엘리시움의 미노핵 수백 개를 채취했다.
발품을 팔아 손에 쥔 이 미노핵은 엘리시움 자생지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근 2개월 만에 채취해도 될 만큼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나는 그길로 회의를 열고 공표했다. 모든 불사의 회람 소속 헌터의 한 달 납부 엘리시움의 양을 반으로 삭감시키겠노라고.
그것은 뉴스에 보도될 정도로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보장량 이상은 현금으로 매입한다는 조건까지 내걸었다.
불사의 회람 길드원으로부터 많은 호응을 끌어냈다. 특히 각박한 삶에 찌들어 있던 E, F 레벨의 헌터들은 길드의 이 같은 발표에 쌍수를 들어 환호했다.
젊은 헌터나 나이 많은 헌터들도 모두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이번 결정의 파급효과는 생각보다 상당했다.
삼대 길드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나는 꿋꿋이 밀어붙였다. 이것은 불사의 회람 회장직에 오르기 전 일종의 쇼맨십이었다.
김상열 부회장의 권유로 나에게 전담 비서진이 붙었다. 그들은 내 삶의 모든 것을 포장하고 다듬고 기름칠했다.
이젠 누가 보더라도 내가 불사의 회람 회장이라는데 크게 반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 스스로 아직 멀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고위층의 인사 중 새로운 정책을 펼치는 나를 못마땅해하는 부류도 있었다.
특히 정씨 일가의 생존자인 정성철 회장의 막내딸 정동희와 사위 박철현은 구세력을 단합하여 나에게 반기를 들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정성철 회장 유언장의 진실 조사를 지속해서 요구했으며 재산권 분할 상속에 관한 법적인 압력도 계속해 나갔다. 유언장의 효과는 막강하여 그들이 법적으로 나에게 승리할 요건은 단 하나도 가지지 않았지만, 몸에 달려드는 모기처럼 귀찮은 것은 분명했다.
정동희는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나는 40층 개인 주거 공간과 39층 개인 집무실에 특별한 장치를 설치했다.
그것은 간이 중계 서버인데 어느 층에 있든 언노운과 연동이 되도록 설계된 장치였다. 물론 이 장치의 구상과 설계는 언노운이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불사의 회람 본사 빌딩 모든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을 완벽히 체크할 수 있었다. 직원들의 사소한 농담까지도.
혹자는 비인도적인 짓이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보다 완벽하게 불사의 회람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단 한 명도 불평 없는 완벽한 길드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므로 썩을 기미가 보이는 부분은 최대한 빨리 도려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네크로폴리탄은 정성철 회장의 일로 이모탈 시티가 혼란한 상태라는 걸 고려해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하며 주변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 가지 부분에서 큰 걱정거리를 안고 있었다. 셈텍스의 부재와 마인의 재료가 될 수 있는 인간의 공급 루트가 완전히 막힌 상태라는 것이다.
며칠 동안 37층 연구실에 박혀 있었다. 나는 언노운과 함께 특별한 장치를 설계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모탈 시티에서 처음 시도하는 장비로 아이템 감정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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