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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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노(산티아고 순례길)가 허락한 사람만이 카미노를 걸을 수 있다.’
12년 전 9월 그 길을 걸을 때 어느 한국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수십, 수백 년 전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약간의 체력과 용기만 있다면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니 아직도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누구나 걸을 수 있다고 해서 누구나 선택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다.’
‘순례자’의 저자 파울로 코엘류가 ‘알레프’에서 한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바로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찾는 ‘프랑스길’만 해도 800km에 육박한다. 다른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걷기만 했을 때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대부분 사람에게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그 길을 갈망하는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늘어만 간다. 도대체 어떤 매력이 사람들을 그 길로 이끄는 걸까. 그때나 지금이나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제부터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12년 전 처음 그 길을 걸을 때의 이야기다. 많은 사람이 묻는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사람도 같은 질문을 할지 모른다. 왜 12년이나 지난 지금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그동안 참아왔던 대답은 ‘이제야 쓸 수 있게 됐다.’이다.
걷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작성한 여행기가 있었기에 내용을 잊을 걱정은 없었다. 그래도 한 달여의 시간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없기에 여행기를 보더라도 가끔 기억이 가물가물한 날이 있다. 어라? 뭐지?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했지? 왜 이런 내용을 쓴 거지? 도대체 어떤 사건이 있었던 거야?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사진을 보며 그날로 돌아가 본다. 새벽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그날의 내가 되어 길을 더듬어 걷다 보면 며칠 전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10년이 흘렀음에도 마치 첫사랑과의 추억처럼 그 길은 아련하지만 확실하게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큰 부담이 되진 않았다. 다만 그때가 영영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이따금 찾아오긴 했다.
순례길은 걷는 이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의지와 사연들이 공존한다. 그들 모두 원하는 답을 얻거나 의미를 찾는 건 아니다. 길 위에서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 첫발을 디딜 때와 마지막 발을 뗄 때 바라고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무언가와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아무 것도 얻지 못하거나 산티아고라면 치를 떨며 다시는 스페인 쪽으로 오줌도 안 눌 거라던 사람도 있었다.
다행히 난 운이 아주 좋은 사람이었다. 첫발을 디딜 때 바라고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이 그 길이 내게 준 것인지 약 한 달의 시간 동안 800km란 긴 거리를 걸으며 스스로 얻은 깨달음인지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 선물이 삶의 방향과 형태를 바꾸고, 10여 년의 세월 동안 시나브로 삶과 의식을 다듬어 이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것만은 확실하다.
지난 몇 년 동안 더욱 유명해지고 많은 사람이 찾는 그 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며, 세상 모든 진리가 그 길에 있다거나 그 길을 걸어야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범한 한 남자가 낯선 길을 걸으며 만났던 아름답고 소중했던 일들을 혼자만 기억하기 아까워 함께 나누고자 함이다. 지인의 여행담 듣듯 가벼운 마음으로 읽히길 바랄 뿐이다.
- 작가의말
여행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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