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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화살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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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화살
작품등록일 :
2020.09.16 08:45
최근연재일 :
2020.09.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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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6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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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회군

DUMMY

장맛비에 거세진 물살이 위태해 보인다. 벌써 며칠 째인지 저 강을 건너야 하는데 도강을 시도할 엄두도 안난다.

입고 있는 갑주덕분에 끈적끈적해진 속살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내가 왜 이 곳에 와서 이런 고생을 해야하는 것인지 군생활에 경험했던 야전훈련 때의 기억이 나지만 이 곳보다는 덜 열악했다. 그나마 최고 지휘관이라 먹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숙영하는 천막이 시대가 시대인지라 열악하다. 거기에 더하여 무겁고 답답한 갑주까지 몸에 걸치고 있으니 그 때와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장군, 비가 너무 많이 옵니다. 도저히 도강을 시도하기 힘들 것 같사옵니다.”

“장군, 아무리 조정의 명이라 하나 이것은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 미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


“우군도통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상급자인 좌군도통사 조민수가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무얼 알아야 뭐라 말을 해주지. 입을 다문 채 심각한 척 얼굴 표정을 짓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다.


역사에서 조민수는 승전과 패전을 반복하였지만 적당한 군공을 쌓고 경험이 많은 숙장이었다. 군권을 장악한 최영이 상승무패의 장군인데다 정치적 야심이 만만찮았던 이성계를 감시하기 위한 감군역할로 이성계의 상급자인 좌군도통사에 임명된 것이다. 애초에 조민수의 군재가 이성계에 버금간다면 공요군의 출정에 처음부터 반대하였던 이성계가 공요군의 우군도통사에 임명되지도 않고 개경에서 최영의 견재나 받고 있었을 것이다. 최영의 입장에서는 이성계가 가진 무장 세력이 그 정도로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영이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장맛비에 시달리는 며칠 동안 조민수가 나-이성계-에게 채근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이런 인간이랑 요동을 공략하라고 보내다니 고려조정이 얼마나 인재가 없고 막장을 달렸는지 알겠다 싶을 정도이다.


“장군, 무슨 말이라도 해 보시오. 애초에 장군은 공요군의 출정을 반대하지 않았소?”


이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내가 아무리 쫄보라지만 이 상황에 최고지휘관이 조민수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이런 인간이랑 같이 요동을 공략하다니 이성계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뭐라고 말을 하긴 해야 겠지?


“하지만 장군께서도 아시겠지만 조정의 명입니다. 어떻게든 버텨서 장맛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단숨에 도강해야지요.”

“허어. 이장군 비에 발이 묶인 지 벌써 며칠이오? 익사한 병졸만 수백이고 활을 이어 붙인 아교도 다 녹아서 활이 단순한 막대기가 될 지경이오. 이러다가는 군량마저 다 썩어서 5만 대군이 요동 땅에 도착하기도 전에 패잔병의 꼴이 될 것이 뻔 하오.”

“제가 출정전에 공요군의 편성과 정벌을 반대했던 것은 사실이오나, 그것은 저의 충심에서 나온 진언이었을 뿐 조정의 뜻이 분명하다면 그에 따르는 것이 신하된 도리라는 것은 압니다.”


이성계가 했을 법한 의례적인 말을 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쫄보새끼, 내가 아무 것도 못할 상황이니 그래도 좌군도통사에 임명될 정도의 숙장이었던 조민수에게 묻어 가려 했더니만 이성계에 묻혔지만 능력있는 장군이라고 생각했었더니 형편없는 인물이다. 최영이 공요군에 직접 참여해서 지휘하려고 했던 게 이해가 된다. 이렇게 믿고 맡길만한 인물이 없었을까? 공요군의 출정을 계획한 것 자체가 무모하다고 할 법하다.


그것과는 별개로 문제이긴 하다. 정신을 차려 눈을 뜬 이후로 벌써 며칠째 이 작은 섬에서 병력들과 고립되어 아무 것도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 역사에서의 이성계라면 모를까 평범한 나로서는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대책이 없다. 기껏해야 군생활 중 야전숙영 몇 일한 게 다였고 비가 많이 온다싶으면 인명사고 발생을 피하려고 철수하고 해서 이런 빗속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것도 고역인데 내가 결정하고 지휘를 해야 한다니 말이다.


그사이에 장막 밖의 빗살은 더욱 굵어져서 내리는 빗소리가 귀를 때린다. 압록강변의 작은 섬인 이곳에서 5만여 병력과 함께 고립되어 있는 난 평범한 대학생이었는데 MT에서 사발주먹고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니 이러고 있다. 처음에는 무슨 영화촬영장인 줄 알았다.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처음 눈 뜨고 내가 이성계라는 것을 인지했을 때부터 조민수와 다른 장군들 눈치나 보면서 묻어가려 했던 내 희망은 무능한 겁쟁이 조민수 때문에 불가능할 것 같다.

여기서 난 사실 이성계가 아니라고 한다면 역사에서 알려진 이성계의 상황에 빗대면 그냥 관직에서 물러나는 정도로는 안 끝날 것이다. 어쩌면 이성계진영의 다른 이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아니면 반대진영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문제다. 결국 나는 이성계로 행동해야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게 해결될 문제이기는 하지만 며칠째 뺨을 꼬집는다던가 날선 칼에 손가락을 살짝 댄다던가 했지만 이게 현재 내가 처한 진짜 현실이고, 가상현실이나 꿈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만 알게 되었다.


“장군, 그러면 일단 조정에 다시 한 번 상주해보시는 것은 어떻겠소?”

“군령은 지엄한 것입니다. 한갓 장맛비에 어찌 조정에 명을 철회해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장군 현실을 보시오. 군령이 지엄한 것은 한평생 군문에서 군을 지휘한 나도 잘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끌고 있는 공요군은 고려전토에서 가려 뽑은 정예중의 정예요. 이런 정예병들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불어난 강물에 휩쓸려 녹아 없어져 버리기라도 하면 남방의 창궐하는 왜구와 북변의 오랑캐들을 무엇으로 막아 내겠소?”


맞는 말이기는 하다. 여기 있는 5만은 사실상 고려의 국력으로 긁어모은 고려 국방력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병력이야 최영이 이끄는 소수의 병력 외에는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막대기 하나 들려서 번이나 서게 하는 정도 외에는 사실상 쓸모가 없는 병력이었으니 말이다.


“ 지금도 왜 강을 건너지 않냐는 조정의 채근이 빗발치고 있으니 일전에 장군이 말한 출정불가론으로 조정에 상주를 해서 비가 그칠 때까지라도 군을 보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도록 합시다.”

뭐, 그정도라면 괜찮겠지 어차피 뾰족한 수도 없으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상주문을 공요군 전체 장수의 이름으로 연명하여 작성하여 조정에 보내도록 하시지요.”


조정에 상주문을 올리고 몇일인가가 지났다. 그 사이에 조정에서 보낸 감군이 공요군에 합류하여 지휘부를 힐난하며 진군을 재촉하였으나, 그자도 압록강 한가운데에서 현실을 몇일간 보고 나더니 별 말없이 한숨만 쉬는 상황이다. 그나저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분명 당내 다른 의원들과 함께 폭탄주를 몇 순배 돌리고 정신을 잃은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 대학전공이 사학으로 운동권들의 소굴이라는 외부인의 평대로 신입생 때부터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학생운동중 노선이 다른 학생운동의 일파나 소위 말하는 ‘비꿘’을 상대로 하는 선동, 누명 덮어씌우기 등은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그러한 활동으로 국회에 입성하는 데에 성공 벌써 3선이나 한 중진 국회의원이 되었다. 정치에 입문한 이후로도 여러 가지 음모와 선동을 기획하여 성공한 공으로 정권을 잡은 결과 요직으로의 등용이 예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황당하게도 이렇게 갑옷을 입고 빗물에 넘처 나는 압록강을 바라보는 신세가 된 것이다.

이게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나 자신이 신기할 정도이다. 다른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보통 정신줄을 놓거나 절망하여 자살을 선택한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나는데 신기하게도 나는 담담한 심정으로 강물을 바라보고 있다.

다년간 음모와 암투의 세계에서 살아와서 멘탈이 단련된 것일까?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궁리해야 한다. 나는 역사의 이성계처럼 상승무패의 장군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당장 이시대의 보편적인 병장기인 환도나 활을 사용하기도 버거운 상태이다. 비 덕분에 아직 병장기를 사용할 상황에 처하지 않았기에 아직 내가 이성계 장군이 아니라는 것이 들키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계장군으로 살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이성게 흉내를 내보았자 전쟁터 어딘가에서 개죽음 당할 거다. 개인적인 무위와 지휘력이 당대 최고급의 군지휘관과 전쟁이라고는 특히나 냉병기를 휘두르는 전근대의 전쟁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밖에 못 본 나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격차가 클테니 말이다.

그래,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으로 이 세계에서 살아 남자. 요동정벌은 그것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자들에게 맡기고 말이다. 이렇게 결심하니 마음이 편해지는 군. 내 성격대로 마음 먹었으면 바로 실행하자. 좌군도통사 조민수 장군의 장막으로 가보아야 겠다.


이성계 (1335~1408)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 시기부터 급부상한 신흥 무장 세력이었다. 그는 고려의 중앙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니라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 지역에서 힘을 키워가던 변방의 세력이었다. 쌍성총관부는 원나라가 1258년(고려 고종 45년) 고려에 침입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한 후 설치한 통치 기구였다. 철령 이북의 땅은 공민왕이 이 지역을 수복하기 전까지, 근 100여 년 동안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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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5만을 이끌고 요동을 점거하고 원나라를 축출하는데 대공을 세웠던 서달의 15만 대군을 패퇴시키고 자신이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던 여진기병 2만까지 더하여 7만의 대군으로 대도까지 진군하였다.


망해가던 고려는 이성계장군의 요동정벌 및 발해고토회복을 통하여 심왕위를 대원과 대명 양국에 인정받고 양국으로부터 형제의 예를 받고 아우국으로 양국에 세폐를 받는 등 중흥을 하여 그 후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대발해국 태조)이 고려에게 선양받아 건국한 대발해국은 약 200년간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군림하였었다.


이성계의 요동정벌은 발해멸망 후 약 450년간 상실했던 요동 및 연해주의 지배권을 다시 되찾고, 발해멸망 후 다시 연해주 등의 퉁구스계통의 예속민들을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여 현대 한민족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그의 요동정벌은 그 후 대발해국의 영토확장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설천주 및 예해주(濿海州, 영령캐나다에서는 알래스카라 부른다.)까지 영역을 확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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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략


[네이버 지식백과] 태조 이성계 [李成桂] - 조선의 제1대 왕 (인물한국사)






“장군,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돌아가도록 합시다.”






위화도회군



[ 威化島回軍 ]


요약고려 말기인 1388년에 요동정벌군의 장수였던 이성계(李成桂), 조민수(曺敏修)가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정변(政變)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중략]

우왕은 서경(西京)에 머무르며 5만 여명의 군사를 징발하여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으며, 최영을 총사령관인 팔도도통사(八道 都統使)로 삼고, 조민수(曺敏修)를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이성계(李成桂)를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로 삼았다. 그리고 조민수와 이성계가 원정군을 이끌고 출정케 하였다. 음력 4월 18일에 서경을 떠난 원정군은 19일이 지난 음력 5월 7일에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威化島)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압록강의 물이 불어나 강을 건너기 어렵다며 진군을 중단하고 14일을 머물렀다. 그리고 이성계는 조민수와 상의하여 “①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은 옳지 않다(以小逆大) ②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옳지 않다(夏月發兵) ③ 온 나라의 병사를 동원해 원정을 하면 왜적이 그 허술한 틈을 타서 침범할 염려가 있다(擧國遠征, 倭乘其虛) ④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풀어지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시달릴 염려가 있다(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는 이른바 ‘4불가론(四不可論)’을 주장하며 요동 정벌을 중단하고 철병(撤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서경에 있던 우왕과 최영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속히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정변(政變)을 모의하여 음력 5월 22일 회군을 결행하였다. 우왕과 최영은 당황하여 서경을 떠나 수도인 개경으로 급히 돌아가 반격을 준비하였다. 위화도를 떠난 지 9일 만인 음력 6월 1일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끈 반란군은 개경 부근까지 진군했으며, 2일 후에는 개경을 함락시키고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았다.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강화도(江華島)로 유배하였으며, 최영은 고봉(高峰, 지금의 경기도 고양)으로 유배하였다가 처형하였다. 그리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昌王)을 왕으로 세웠으며, 조민수는 우시중(右侍中), 이성계는 좌시중(左侍中)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조정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대립하였으나, 군사력뿐 아니라 신진사대부들을 기반으로 정치적 기반도 튼튼히 확보하고 있었던 이성계가 승리하였다. 이성계는 1389년(창왕 1) 사전(私田) 개혁을 빌미로 조민수를 유배하였고, 조민수와 이색(李穡)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창왕을 신돈(辛旽)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폐위시키고 공양왕(恭讓王)을 새로 왕으로 세웠다. 이처럼 이성계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조선(朝鮮) 왕조가 창건되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위화도회군 [威化島回軍]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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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명군/근조팬픽) 단종애사2 20.09.19 79 0 17쪽
5 명군/근조팬픽) 단종애사1 20.09.18 99 0 9쪽
4 김종직의 결심 20.09.17 119 0 4쪽
3 돌아온 주익균 20.09.16 68 1 6쪽
2 왕조를 위하여 20.09.16 123 0 14쪽
» 위화도회군 20.09.16 107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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