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조선에도 4차원이 존재했다?
본 웹소설은 픽션이며 인물, 지명, 종교, 사건 등은 실제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물론 석환이와 제천이의 벽이 곧장 슬라임이
된 것 마냥 말랑해지진 않았지만 도끼눈을
하고 있던 석환이의 눈가가 조금은 부드러
워진 것 같아 다행이다.
“ 그러니까 말입니다. 장의. ”
“ 제천이가 쌓인 게 많았나보네. ”
어느 새 한잔, 두잔 기울이다 보니 그득
했던 병이 텅 비었다. 아직 나와 석환은
정신이 가출하지 않았지만 제천이는 혀가
이미 어디까지 말려선 눈까지 풀렸다.
“ 석환, 아무래도 이 녀석을 업고 문을 통과
하기가 쉽지 않겠어. 서리의 번이 바뀌기 전에
들어가자. "
“ 큭큭, 무슨 걱정이야. 적당히 보고 안
되겠으면 담장으로 넘기면 되지. "
“ 으이구, 제천이가 무슨 짐짝이냐 냅다
던지게. 어서 일어나 어차피 조금 있으면
인정(人定)이야. 홍루에서 인정을 보내고
나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
“ 알았어. 네가 앞장서 내가 업을 테니. ”
홍루를 나서기 전 주변부터 살폈다.
재수 없게 또 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 조심스레 움직여 어느 정도
걸었을까.
“ 많이 늦었네. ”
누군가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순간 머리칼이 쭈삣 서면서 술이 확 깼다.
우리를 알아볼 이가 없을 텐데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려다 혹여 서재 쪽 인간들인가
싶어 멈추고 기다렸다.
“ 그날은 말이야. 통성명도 하지 못하고
간 것이 못내 아쉬웠는데. "
‘ 신성군?? ’
서둘러 고개를 돌리니 진짜 그 자다.
어이가 없으려니 실종됐다는 인간이
멀쩡하게 눈앞에 있다.
“ 신성군마마께서 어찌... ”
“ 궁금한가? ”
‘ 아니. ’
“ 지금은 아무래도 시각이 늦었으니
안 되겠고. 내 조만간 연통을 넣도록 하지.
아! 오늘 자네들은 나를 보지 못한 것이네.
알아듣겠는가? "
‘ 못 알아들으면 다음날 제상 위에 내 영정
사진이 덩그러니 올려있겠지. 아 진짜 '
사실은 궁금했다. 자작극이냐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싶은 질문이 수십, 수백
개가 차오르는 것을 눌러 참았다. 지금은
신성군의 말대로 우린 성균관으로
돌아가야 한다.
“ 저희는 눈이 멀고 귀가 닫힌 상태입니다. ”
“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하게. ”
그렇게 말을 하고선 곧장 사라졌다.
무슨 귀신에 홀린 듯한
“ 유정, 우선은 돌아가세. ”
“ 그래. 술이 덜 깨서 선 채로 꿈을
꾼 것일 수도 있으니까. "
유정이 운이 다한 것 같다.
찝찝하고 기분 나쁜 이 느낌에 서둘러
우린 성균관으로 돌아와 제천이를 눕힌
뒤 내 방으로 들어갔다. 이미 성필과
이혁이 잠든 뒤라 자연스레 건너와선
혹시나 하고 월아를 불러보았다.
“ 월아가 답을 하던가? ”
“ 응, 모른 척하고 욕하니까 나오던데? ”
“ 하여간에 그이도 참 특이하지. ”
『 내가 좀 특이하긴 하지. 』
“ 인정하는 거야? ”
“ 월아 왔어?? ”
“ 그래. 자네 옆에 앉았네. ”
으---힉~!!
『 언제까지 이 웃긴 면상을
봐야 되는 거지? 』
“ 큭큭큭, 월아 네가 이해를 해.
어차피 안 되는 걸 강요해봐야 소용
없는 것이니. 그보다 네가 분명
홍루에서 우리와 인연이 있는 이가
사라졌다고 했잖아. "
『 그래. 』
“ 근데 그 자가 좀 전 반촌 골목에
자신을 드러냈어. 것도 멀쩡한 채로. "
『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
“ 혹여, 다른 소식을 듣진 않았어? ”
『 모두는 보지 못한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으니 아무래도 들리는 소문과 다른
자일 수도. 』
“ 월아가 무어라 하는가? ”
“ 있어봐. 아직 이야기 하지 않았으니.
소문은 무엇이고 죽은 자들이 본 그의
실체는 뭐란 거야? "
『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청할 수 없고
여자의 품에서 안정을 취한다고 왕가의
수치라는 소문』
“ 표면은 그런데 너희들이 본 건 ”
『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이 본
속내는 생각보다 멀쩡했어. 마치 딴 사람인
것처럼 』
“ 흐음... 살아남기 위해서 가면을
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욕심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네. "
“ 월아가 하는 이야기가 정확히
무엇이란 거야? ”
“ 그 날 우리가 본 것으로 그 자를 판단
해서는 안 된다는 거,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덫에 걸렸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 "
“ 덫이라니? ”
“ 아무래도 우리의 아버지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홍루가에 처음 간
그 날 일부러 들이닥친 듯 해. 자신을
알아보는지 못 알아 보는지도 확인도
할 겸. "
“ 대군이라는 것을 알고 몸을 사렸다면
아무래도 패로 쓰기엔 부담스럽겠지.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제대로 걸렸다
그 말이야? "
“ 그냥 추측이긴 하나, 아까 우리를
바라보던 눈빛은 그 날 흐리멍덩했던
그게 아니었잖아. 아무래도 불길해. "
“ 고작 대사헌과 제학의 위치가 무슨
쓰임이 있을 거라고. 괜한 생각이 아닐까? "
“ 우리가 뭐라고 굳이 아는 체를 할 거야.
이유도 없이 "
“ 그냥 편하게 생각하자. 우리는 그저
한낱 성균관 유생이야. 그날은 정말
술에 취해서일 수도. "
석환의 말대로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날 우리를
낮춰 부르는 것이며 술에 취한 사람이
어두운 밤에 정확히 얼굴을 알아
보는 것이며 자꾸만 께름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은 왠지 여자
유정의 감이 무뎌졌으면 하는 밤이다.
석환은 졸음이 밀려오는 지 내일 생각
하자며 나를 안심시키기에 어차피
아직 일어난 것도 아니요,
일어나지도 않을 일에 괜시리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월아에게 인사를
한 뒤 곧장 자리에 누웠다.
“ 사주단자(四柱單子)를 물렸다는군. ”
서재쪽에서 나는 소리다. 조반을 들다
귓구멍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손을
멈춘 뒤 집중하니 갑작스레 사라진
신성군과 혼인을 약조한 가문에서
대군댁으로 사주단자를 돌려보냈다는
말이다.
“ 아직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판에 ”
“ 어차피 허울만 좋은 이와 혼약을
맺는 것만으로도 불만이었을 텐데
어쩌면 얼씨구나하고 반겼을 지
누가 알겠나? "
“ 그래도 왕실과 혼약이 깨어지면
처자에게도 좋은 일은 아닐 텐데. "
“ 모를 일이지. ”
‘ 이 인간이 결혼하기 싫어서
도망친 건가? ’
만약에 고작 그런 일로 자작극을
벌인 거라면 신성군이고 나발이고
보이는 즉시 죽빵을 날려버릴 셈이다.
꿈자리까지 휘저어 짜증이 날판인데
괜한 사람 여럿 피해를 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조반이 모래알밥으로
변하는 순간에
“ 장의, 천천히 드시지요.
그러다 체하시겠습니다. ”
지기가 지나다 내가 밥을 우겨넣는 것에
걱정이 되었는지 물 한잔을 내려놓고
갔다. 이에 고맙단 말과 함께 물잔을
드니 아래에 놓인 쪽지가 눈에 들어와
곧장 소매에 가려 넣었다.
「 비천당 뒷문이 열려있더군. 봄꽃이
조금씩 보이는 게 지금 놓치면 후회
할 것 같으니 어떻게 보러 오겠나?
- 홍루의 벗 」
“ 피곤한 인간이네. 이거 ”
“ 응? 무슨 소리입니까 장의? ”
“ 석환사제 학당으로 가기 전 잠시
나와 강론주제에 대해 논해야 겠으니
비천당으로 가지. "
“ 이미 정해놓지 않았습니까? ”
“ 술잔으로 빚은 벗이 비천당 꽃밭을 보여
준다고 하니 어쩌겠나. "
“ 아! ”
무슨 소리인가 싶어 갸우뚱하다
술친구라는 말에 먹던 밥도 멈춘 뒤
곧장 재촉하여 식당을 나선 후
주변에서 보는 이들이 없는 지
살펴가며 비천당으로 향했다.
“ 오셨는가! ”
“ 하아... ”
“ 내가 그리 반갑지 않은 모양일세? ”
“ 저희가 그럼 아주그냥 두 손 벌려
반길 줄 아셨습니까? ”
퉁명스러운 나의 대답에 석환이
당황하여 얼른 옆구리를 찔렀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어차피 벌거벗으면 똑같은
사내인 것을 무엇 하러 예를 차리나.
그리고 몸을 사려야 할 이가 누군데.
“ 언짢게 했다면 이해해주게나.
사람 하나 살리려다 보니 그리
되었어. "
“ 그 분이 누구신지는 관심에도
없습니다. 그저 저희의 안위가
위협을 받을 뻔 하였다는 것이지요. "
“ 장의 말을 가려하시지요.
신성군께서 노여워하시면 ”
“ 괜찮네. 내가 하나는 생각하고 둘은
생각지 못한 탓이지. "
“ 그럼, 신성군께서 살리고자 하신
분은 무사하십니까? ”
“ 그렇다고 보아야지. ”
왠지 씁쓸한 눈빛이다. 아무래도 이번
혼사의 대상을 말함인데 삼류영화에서나
볼 법한 꽃잎이 흩날리고 불쌍해
보이는 지 멜로는 질색인데 아주그냥
진하게도 흘린다.
“ 지키시지 그러셨습니까. ”
“ 모래성에 들어 올만큼 심지가 강한
이가 아닐세. 그런 거라면 애초에 들이지
않는 것이 그이를 살리는 일일지도. "
“ 그럼 차라리 머리를 밀고 불교에
귀의하지 그러셨습니까.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살 수도 있을 텐데요. "
“ 장의~!! ”
도가 지나쳤다 생각했는지 석환이
내 손을 잡아 말렸다. 그제야
내가 생각해도 무슨 배짱으로 이리
나오는 지 불손하기 그지없다.
어딘가에 숨어있을 신성군의 호위가
칼에 손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있을 게 뻔한데 그러나 이 입이 방정
또 다시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그 분에게 진심이셨습니까? ”
“ 그건 중요하지 않네. ”
정략혼이라고 해서 상대를 보지도
않고 혼인을 하진 않는다. 최소한
한 번의 만남이 있음을 특히나 왕실의
혼사다. 그러한데 이리 혼자서 절절
해선 마치 사모하는 이의 앞날을 위해
희생한다는 개풀 뜯어먹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심약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또 꼭지 돌아 할 말 못 할말
고르지도 않고 마구 내뱉었다.
“ 여인은 말입니다. 신성군마마
자존감 낮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약한 사내에겐 감흥이 없습니다.
아무리 역경이 온다 해도 한번쯤은
강하게 보이는 것을 오히려 원하지요. "
석환은 포기해버렸다. 유정이의
막말대잔치를 막을 수 없다 여겼기에
그저 신성군이 자비롭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멍청한 친구가 입 좀 제발
다물기를 간절히 기도 했다.
“ 풉.. 푸..하하하~!~!!! ”
무섭다. 실성하거나 돌아이라면 어쩌나
한 것이 하필 왕가의 자손이면 더더욱
피곤한 일인데 나는 순간 격한 두려움에
몸이 굳는 듯 했다.
“ 석환아... 너라도 살아야지. ”
“ 이제야 정신이 드냐? ”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며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히는 것이
신성군이 손이라도 드는 날엔 곧장
칼날이 목을 스칠 것이다. 여기서
죽는다면 난 어디로 혹시 운 좋게
내 세상으로 가면 좋겠지만 그럼
여기 유정은 그냥 개죽음 당하는 거?
이런 나는 원래대로 돌아가기 전
여기 유정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
“ 신성군마마! ”
“ 하..하... 하하하 미안하네.
너무 웃겨서 그만 큭큭 허수아비에게는
새들만이 벗이었는데 나에게 진심으로
충고하는 이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해서 말이야. "
“ 당연하지요. 누가 감히 대군께
직언을 드리겠습니까. ”
“ 그러게나 말이지. 내가 보는 눈은
나쁘지 않나보이. ”
“ 장의는 신성군께 악의로 그리
한 것이 아니오니 부디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
“ 아닐세. 나는 오히려 고맙단
소리를 하고 싶어. ”
“ ...??? ”
“ 솔직히 말이야. 마음이 동하지
않더라고. 박색도 그런 박색이
없더라니까. "
‘ 아니 그럼 못 생겨서 그 난리를 치도록
한 거라고? 아니 이게 뒤질라고~!! '
순간 내 이성의 끈이 또 다시 풀리는
상황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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