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어렵게 끼운 첫 단추
넌 남의 머리 탐험할 때 허락받고 읽니? 난 몰래 들어가~ 왜? 더 짜릿하니까. 당연한 걸 물어~ 우아한 척, 고상한 척, 도도한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이들조차도 머릿 속은 모두 평등했어. 탐욕, 질투, 분노, 사랑, 연민 말로 다 표현 못할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은 데 그걸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 쉽게 내놓지 않아서 더 궁금한 속사정 내가 먼저 알아내어 긁어주니 멱살을 잡을 줄 알았는데 내 손을 잡으며 고마워했어. 치부가 드러났음에도 분노하지 않고 차분해지게 만드는 나만의 비결 궁금하지 않니? 그럼 조용히 따라와 그들만의 비밀이야기를 들려줄테니.
“ 모든 곳에 눈과 귀가 있는 듯 해 오래
머물기 힘들 것 같습니다. 사용인들을 전부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으니 일을 빨리
마무리 하고 올라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
다과 같은 거라면 하녀에게 시켜도 될 것을
굳이 집사가 가져다 준 것이 이상했는데
그것을 눈치 챈 루이가 즉흥연기를 펼쳐주어
무사히 넘어갔다.
“ 내가 쉴 곳이 점점 없어지는군. ”
“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헥터백작님의
그늘 아래에서 편하게 쉬실 수 있지만
백작님께서 헥터공이 아닌 다른 분에게
소백작의 지위를 넘기신다면 그땐 정말
쉴 곳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니
마음이 불편하시겠지만 나중을 위해서
한발 물러난다 생각하여 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
“ 어쩔 수 없지. 내가 형님도 아닌 동생의
눈치를 볼 수는 없으니 그리 할 테니 다시
이야기 할 수 있게 전해라. ”
그렇게 해서 겨우 헥터공의 마음을 돌린
나는 루이의 방을 나와 그자를 찾았다.
마침 호수를 바라보며 파고라 위 긴 의자에
드러누워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마무리를
지어야하지 않을까요? ”
“ 헥터가의 사용인으로도 참 잘 하는구나. ”
“ 저는 그저 수장님에게 받은 빚을 갚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
“ 너무 어려운 선택이지 않느냐 그냥 내게
온다면 좀 더 쉬운 일인 것을. ”
결국 속내를 드러내며 자신의 밑으로 들어
오란 말을 대놓고 하니 더 소름끼쳤다.
이 자는 그저 도구가 탐났을 뿐이다. 그
도구가 쓸모없어지면 바로 버려지는 걸
본 이상 절대 던컨엔 들어갈 수 없다. 절대.
“ 헥터가의 일은 어디까지나 대가를 치르기
위한 일일 뿐 이것이 끝난다면 전 성당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대부님 밑에서 배워야
할 것들로도 벅찹니다. ”
“ 남의 이야기나 듣고 있는 것이 무엇이
중요하다고 내 밑에 있으면 수중에 쌓이는
돈도 몇 배가 될 텐데. ”
“ 제가 아직 그릇이 작아 만족스럽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이야 운이 좋았을
뿐이지 언제까지고 운이 따른다는 보장이
없어서 말이지요. ”
“ 남들과는 다른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말이지. ”
“ 네? ”
“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에도 없는 녀석에게
강요해봐야 답은 똑같겠지.
앞장 서거라. 헥터공께서 어떻게 나오실지
두고 본 뒤 결정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
겨우겨우 두 사람을 설득하여 다시 응접실로
돌아온 나는 헥터공에게 한번만 참아달라는
말을 간곡히 청한 뒤 다시금 둘을 대면
시켰다. 그렇게 하여 헥터공은 훗날 일을
위해서 한발 물러나 던컨 수장의 장단을
어느 정도 맞춰 주었고 이에 그 자는 못
이기는 척 광산계약권의 전제 조건인 계약
공유에 대한 협약서에 사인했다. 자존심
싸움으로 인해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무리 없이 진행 되었으니 다음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 헥터공께서는 그럼 핏셔가에 언제쯤
서신을 넣으실 예정이십니까? ”
“ 우선 수확제때 대공각하께서도 참석을
하실 테니 이왕이면 함께 있을 때가 적기
이지 싶네. ”
“ 대공각하의 마음까지 사로잡는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전 준비해
둔 말을 타고 먼저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을 끝으로 그자가 먼저 자리를 떴고
우리 역시 감시를 받는 듯한 느낌의
별장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마차에 올랐다.
* D-Day
드디어 가을수확제가 시작되었다. 그 동안
농사일로 고생한 제국민들은 이날만큼은
보상이라도 받을 요량으로 쿠겔에 모여
들어 먹고 마시며 피로를 풀어냈다.
이 시기동안의 밤은 대낮보다도 더 밝게
빛나 거리를 사람들로 가득 메웠고 그들의
코와 입을 자극하는 맛있는 먹거리와 재미
있는 눈요기들이 거리에 넘쳐나 일을 앞두고
있던 나 역시 들뜰 수밖에 없었다.
“ 3, 2, 1 시작~!!! ”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성당의 꼭대기로
올라간 나는 시원한 바람에 맞춰 화려하게
터지는 불꽃들의 향연에 감탄사를 연달아
내뱉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시가지로 나가
구걸을 위해 돌아다니면서 보았던 불꽃보다도
더 크고 예뻤다. 뭐... 그땐 타 지역에서의
사람들까지 몰려드니 손만 내밀어도 수익이
생겨 제대로 쳐다보지 않아서이겠지만 암튼
그렇게 한참을 넋을 놓고 보고 있는데
“ 아펠~! 아펠!! ”
아래에서 희미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내려다보니 루이가 와 있었다.
“ 너 이 시각에 어쩐 일이야? ”
“ 저택에만 있자니 갑갑해서 얀과 같이
나왔다가 들렀어. ”
“ 얀을 여기까지 데리고 오면 어떡해~ ”
“ 괜찮아. 제법 입이 무거운 데다 사람이
나쁘진 않아. ”
“ 네 입에서 칭찬이 나올 정도라면.
아! 그건 그렇고 여기서 보는 불꽃놀이 진짜
예뻐. 예전에 몰랐는데 이렇게 예쁜 걸 왜
여태 놓쳤는지 모르겠다. ”
“ 우리가 이런 거 볼 정신이라도 있었냐?
몬스터가 수확제나 다른 축제 때 사람들
붐비는 거 아니까 평소보다 배로 가지고
오라고 시키는 통에 그거 맞추는 데 급급
해서 쳐다볼 겨를도 없었는 걸. 지금은
이렇게 여유라는 게 생겨서 저게 저렇게
생겼나 하면서 볼 수 있게 된 거지. ”
“ 말이 그렇게 되나. ”
“ 아! 헥터공이 너한테 전해주라고 한 게
있어. ”
“ 드디어 계획을 실행하려나보네. ”
“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내가 외출을 한다고
하니 바로 전해달라고 했어. ”
“ 그래? ”
난 루이가 가지고 온 서신을 서둘러 열었다.
아직 카지노경매가 시작되려면 이틀이나
남았는데 그 전에 할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싶어서 보니 전혀 다른 이야기가 씌어져
있었다. 서신을 읽자마자 난 그걸 들고 내려
와서 곧바로 루이에게로 갔다. 마침 얀은
자린과 이야기 중이라 루이를 끌고 기도실로
들어와 주변을 살핀 뒤 소근 거렸다.
“ 헥터백작께서 이번 수확제때 네 짝을
찾으려나보다. ”
“ 에?? 뭔 소리야? 성년식을 치르려면
비네의 나이로라도 2년이나 남았는데 어디
많이 아픈가? ”
“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매년 수확제가
열리는 날이면 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연회가
열리는데 이때를 핑계로 가문의 영식과
영애들이 한자리에 모여 즐기면서 평소 공식
석상에서 마음에 두던 이에게 솔직해지는
날이기도 하지. ”
“ 마을축제와 비슷하네. 또래 남녀들이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랑 귀족들도 별반
차이가 없네~ ”
“ 귀족들도 사람이지. 단지 그놈의 체면
따위가 뭐라고 좋아하면서도 대놓고 말하지
못하는 겁쟁이들일 뿐. 어쨌든 내일이
연회가 열리는 날이라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널 선도 보일 겸 내보내려고
하시나봐. ”
“ 키 작고 다리 저는 남자한테 누가 좋다고
말을 붙이겠냐? 영감님이 욕심도 많으셔 ”
“ 그래도 넌 헥터가의 장손이야. 당연히
욕심을 내실만 하지. 이왕 참석해야 한다면
너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
“ 무슨 일인데? ”
“ 백작님이 아니더라도 좀 부탁해야 할 게
있어서 어쩌나 했는데 어차피 참석해야
한다면 내일 핏셔가의 가신인 브리제자작의
딸이 나온다고 하니 네가 좀 구슬려줬으면
해. ”
“ 참나~ 이젠 여자까지 홀려야 하는 거야?
이놈의 인기란 ”
“ 입방정은 금물이다. 그래도 영향력 있는
가문의 가신이라 조심해야 돼. 넌 그날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은 뒤 이걸 목에
걸도록 해줘. ”
“ 첫 만남에 목걸이는 좀 아니지 않아? ”
“ 겉모양이 모자르니 선물공세라도 해서
마음을 붙들어야지. 그리고 저녁 때 볼 땐
가벼운 크리스탈처럼 보여서 부담스러워
하진 않을 거야. ”
“ 이거 크리스탈이 아니구나. ”
“ 다이아스포어라고 빛의 각도에 따라
반사되는 색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진귀한 보석이야. 저녁에는 몰라도 아침
햇살 아래에선 선명하게 색이 보일 테니
최소한 다음 날 아침까지라도 할 수 있도록
해야 돼. ”
“ 목걸이를 누가 봐야 한다는 거네. ”
“ 브리제자작이 직접 보면 제일 좋고 그게
아니더라도 말이 자작의 귀에 들어가도록
해야지. 시간이 없다보니 너한테까지 부탁을
하게 되네. ”
“ 어쨌든 영애가 목걸이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알아들었어.
그런 거라면 천재 루이에게 맡겨둬~ ”
헥터공이 아슬란왕국 시찰단을 위한 연회에
참석 이후 핏셔가와 제대로 된 연이 맺어
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여기저기 들어오는
아첨에 못 이기는 척 돌아다니더니 그것이
핏셔백작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다. 카지노
경매에서 나온 물건에 집중하고 있을 때
속삭여도 흔들릴까 말까 하는 이의 마음을
제대로 닫아놔 답답하던 차 헥터백작에게
허락을 받을 수 있다면 루이를 연회에 참석
시켜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일이 또
도와주니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루이를 연회에 참석시키겠다는 소식은 직접
루이에게 하거나 내일 내게 바로 전달하면
될 것을 어지간히 급했나보다.
“ 지금은 아들이니 헥터공 감시도 할 겸
바깥외출을 자제하도록 해. 내가 낮은
몰라도 밤엔 갈 수 없으니까 ”
“ 술이 문제야. 그 쓴 게 뭐가 좋다고. ”
“ 우리가 이해할 필요까진 없어. 그는
어차피 벗어나기 위한 패일뿐이니까. 그럼
내일 잘 부탁해. ”
“ 알았어~ ”
그렇게 이러저런 이야기를 마저 하다 얀의
목소리에 아쉬움 가득한 루이의 투정을
받아준 뒤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렇게 루이를
돌려보내고 나 역시 쌀쌀해진 밤바람에 내려
오니 자린이 숄을 어깨에 둘러주며 말했다.
“ 또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거 에요? ”
“ 누가 보면 우리가 사고만치는 아이들 인줄
알겠네. 루이가 헥터가에서 나오고 싶다는 걸
달래느라 그랬어 ”
“ 무슨 일 있었던 거에요? ”
“ 그냥. 귀족이 되면 좋은 옷 입고,
맛있는 거 실컷 먹는 것만 있는 줄 알고
좋아했다가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으니
머리가 터질 것 같대. 행복한 투정이라고
다독여도 봤지만 아무래도 적응은 실패인
듯 해. ”
“ 루이는 원래 자유로운 아이였으니 아무래도
제약이 많은 귀족의 틀이 갑갑할 수밖에
없겠지요. 혹시 작은 주인님 모르게 미움을
받거나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을까요? ”
“ 미운털 하나 박혔다고 의기소침할 루이가
아니지. 산전수전 다 겪은 녀석에겐 아무
일도 아니니 걱정은 없어. 오히려 루이가
괴롭히면 모를까. 단지 귀족생활이란 게
생각 했던 것보다 재미없다는 결론일 거야. ”
“ 백작님의 마음에 들었다 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아쉽네요. ”
한때 모엘신부가 아직 신의 부름을 받기 전
저택에서 없는 사람취급을 받으며 괴롭힘에
힘들었던 걸 떠올리던 자린이니 처음엔 반대
하였지만 상황이 루이에게 좋은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내심 기대를 했나보다.
보육원에선 완전히 어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 큰 성인도 아닌 어중간한 나이
대는 입양가기도 일자리를 잡기도 애매
했으니 그렇게 자린을 앞서 얼버무린 이유로
루이가 나오려 한다고 생각하게끔 했다.
물론 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을 꾸며서
어렵게 빠져나오려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또 잔소리를 들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나중에 알게 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남의 이야기는 끄집어 내어 해결하면서 정작 주인공의 이야기는 유일한 정신적 지주인 모엘신부외엔 알아주지 못해 아쉬웠네요. 그래도 글을 쓰면서 현실에선 소심하고 콩알만한 심장이 이야기 속에서는 대담하고 솔직하며 단단한 심장으로 버틸 수 있어서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어쩌면 저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었던 계기가 되지 않았나 조심스레 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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